〈 282화 〉 외전:라쿤은 괴로워
* * *
세상에 기묘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라쿤박사는 그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지성체였다.
라쿤이면서 인간, 인간이면서 라쿤. 아주 애매한 위치에 서있는 그야말로 이 세상에 기묘한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였으니까.
“오늘도! 일이! 많군!”
“변이자의 수가 그 사건 이후로 2배 가까이 상승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알고! 있네!”
작년의 그 사건 이후로 변이자들의 숫자가 갑작스럽게 폭증했기에, 자연스럽게 변이자관리본부의 수장인 라쿤박사가 바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안 되는 변이자 연구학의 최고권위자 중 한명이기도 했고, 본인도 변이자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이 애매한 직책을 맡기에 적임인 사람이었으니까.
변이자들의 검사도 라쿤박사가, 각종 테스트 결과도 라쿤박사가, 변이자 관련 정책에 관한 건의도 라쿤박사가, 온갖 일을 라쿤박사가 처리해야 하니 최근에 라쿤 박사는 그토록 좋아하던 연구도 미뤄두고 일에 빠져 살 수 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전부 내팽개치고 퇴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마땅한 후임자도 없고, 아직 관련 인력이 양성되려면 최소 5년 이상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다른 분야에 비하면 제대로 된 전문 인력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지금은 기존 관계자들과 추가 채용을 통한 인력 확대를 통해 어떻게든 꾸역꾸역 일을 진행해나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조치에 불과한 일이었다. 결국 사회가 안정되려면 변이자에 대한 온건한 인식을 심어줌과 동시에 변이자에 대한 사회적, 생물학적 연구가 병행되어야만 한다.
“변이자가! 절도를! 저질렀군!”
“고양이 변이자가 저지른 범죄입니다. 해당 변이자는 절도 전과를 가진 전과자였고, 변이자가 되자 그 능력을 활용해 절도를 3건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사고를! 치는! 녀석이! 줄었으면! 좋으련만!”
근 한 달 동안 일어난 변이자 관련 범죄 횟수는 약 32회.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많다고는 할 수 없고 대부분이 잡범이긴 했지만, 인식이란 건 그런 작은 파문만으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문제였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변이자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판국이니, 그나마 변이자의 존재가 부드럽게 받아들여진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라쿤 박사는 생각했다. 물론 그나마 좋은 편이라는 한국의 변이자에 대한 인식도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아서, 라쿤 박사는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여럿 계획 중이었다.
특히 흡혈귀와 서큐버스 변이자들을 위한 인식 개선이 가장 절실했다. 종족 자체가 좋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라쿤 박사는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엘프처럼 처음부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드워프처럼 눈에 띄게 재주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니 인식 개선이 정말 어려운 종족들이었다.
심지어 흡혈귀는 공표 전 이야기기는 했지만 사이비종교를 만들어서 피를 수급하다 걸린 전적까지 있었기에, 변이자관리본부 입장에서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물론 사고를 친 횟수를 생각하면 ‘듀라한’보다 많지는 않겠지만.
“요즘은! 이유진양이! 조용하군!”
“...그렇군요.”
라쿤 박사는 한 때 변이자관리본부를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던 이유진을 떠올렸다. 작년부터 이어진 인연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집에 초대받은 전적도 있으니, 사적으로는 가장 친분이 있는 변이자중 하나였다.
라쿤 박사 입장에선 아주 희귀한 종족의 변이자라 학구열을 불태우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온갖 트러블을 몰고 오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세상을 구한 영웅 비스무리한 존재기도 했고, 과학자로서는 ‘여신’이라는 비과학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일찍부터 신화적인 존재의 여부를 알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트러블 메이커가 여신이라니, 세상이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라쿤 박사는 생각하곤 했다.
그 트러블 메이커가 세상을 구했으니 고마워 해야 할 입장이었지만, 그 트러블 메이커가 날려버린 예산을 생각하면...
“자네! 이후! 일정이! 뭐가! 있는지! 말! 해보게!”
“점심에 국회의원 OOO님과의 만찬이, 저녁에는 OO그룹 OOO회장님과의 저녁약속이 있습니다.”
“끙!”
아주 귀찮은 일의 연속이었다. 머릿속에 욕심만 그득한 권력자 놈들이랑 신경전을 벌이느니 차라리 일에 파묻혀 살고 말지. 라쿤박사는 적어도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비밀기관인 것도 있기는 했지만 없는 취급을 받았던 게, 변이자가 전 세계적으로 그 존재가 드러나자 물밑에서 접촉해오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졌다고 라쿤박사는 생각했다.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그리고 영향력이 미지수인 기관이 나타났기에 이왕이면 친분을 쌓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노골적인 의도가 보였기에 라쿤 박사는 최근 약속 이야기만 들으면 절로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고급스러운 음식이 라쿤 박사한테는 그다지 맛있게 느껴지지도 않고, 일주일에 7, 8번 씩이나 식사약속이 잡힌다면 더더욱.
“오늘도! 지랄맞은! 하루가! 되겠군!”
“...그래도 지원은 늘었으니 참으셔야 합니다.”
“그건! 알고! 있다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빈말로도 현 재정상태가 풍족하다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니, 라쿤 박사에게는 선택권이 없기도 했다. 급격하게 늘어난 일감에 기존의 예산으로는 운영도 빠듯하게 해야 했고, 조금 더 풍족하게 운영하려면 꺼려져도 후원을 받는 쪽이 유리했으니까.
언제나처럼 최대한 중립을 고수하며 내키지 않는 식사를 하면 될 뿐이다.
라쿤박사가 받는 스트레스만 감수한다면 거저먹는 장사에 가까웠으니까.
“이럴! 때는! 정년퇴직이 하고 싶군!”
“저희는 정년퇴직 개념이 없습니다.”
“이런! 젠장! 알고! 있네!”
전 비밀기관의 비애였다.
적절한 후임자한테 자리를 넘기고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는 했지만, 라쿤 박사 자신도 최소한 몇 년은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쪽 관련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극소수이기도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는 건 권력자들한테 변이자관리본부 자체를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준다는 의미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믿을만한 후임을 물색한 뒤에야 라쿤 박사는 격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라쿤 박사는 울며 겨자먹기로 오늘도 일을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