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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281화 (281/352)

〈 281화 〉 외전:난쟁이와 듀라한

* * *

무슨 일이든지 과하면 모자라만 못하다고, 적당한 게 세상을 살아가기에 제일 편한 법이다. 유라는 그 말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팔이 안 닿아...

냉장고에서 마실 우유를 꺼내려던 유라는 인상을 쓰고 저 높은 곳에 있는 우유를 노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의자를 가져와서 올라타야겠다고 유라는 생각했다.

130CM.

유라의 키였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인 그녀 나이 또래의 키를 생각하면 정말, 심하게 작은 키였다. 사실상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키라 그녀 전용의 책상이나 도구가 필요할 정도였으니까. 유라는 자신의 작은 키에 스트레스를 자주 받곤 했다.

당장 그녀보다 어린 리온이 140 근처로 유라보다 컸으니, 연하에게, 그것도 어린애에게 내려봐진다는 것은 한참 민감한 나이일 유라에게는 꽤 기분 나쁜 일이었다.

“아오...씨...”

“이거 맞지?”

“고마워요 언니...”

유라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유진에게서 우유를 받아들었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인 유라였지만, 유진에게는 언제나 고분고분한 편이었다.

부모를 잃은 자신을 거두어진 사람이기도 했고, 보호자를 자처하며 대신 부모노릇을 해주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유라는 유진에게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기에, 언제나 유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우유를 들고 쭈뼛대던 유라는 의자에서 내려와 유진이 꺼내준 컵에 우유를 따랐다. 우유가 컵을 3분의 2쯤 채우자, 유라는 따르기를 멈추고 우유를 다시 냉장고 밑 부분에 넣어놓았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유진에게 있어서 유라는 나이차 많이 나는 사촌 여동생 같은 느낌이라, 유라의 행동이 마냥 귀엽게만 느껴지곤 했다. 물론 좀 까칠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저 나이 대를 생각하면 저 정도는 충분히 귀여운 수준이었다.

“후...”

“너무 많이 마시진 마. 저번처럼 배탈 날라.”

“양 조절도 못할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네요...”

“그래그래.”

유진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유라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행동이 퉁명스럽긴 하지만 유진에게는 투정부리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언니는 무슨 일이에요? 밥 만들 시간은 아닌데­”

“간식이나 만들어볼까 해서 내려왔지.”

“간식?”

“응. 간식. 이사 올 때 오븐도 사놨는데 한 번도 안 썼잖아. 쿠키나 만들어볼까 싶어서.”

“...도와드려요?”

“도와주면 나야 좋지.”

유진은 냉장고와 선반에서 재료와 도구를 꺼내며 대답했다. 유라는 발판을 끌고 유진의 옆에 서서 유진이 능숙한 솜씨로 재료와 도구들을 늘어놓는 걸 보면서 감탄했다.

“언니 쿠키도 만들 줄 알았어요?”

이 언니는 못 만드는 게 뭘까, 유라는 지금껏 유진이 만들어온 요리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한식은 물론이고 양식에 저번에는 새로 생긴 중국집을 한 번 시켜보더니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단 낫겠다!”하면서 정말로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을 만들지 않았던가.

“예전에 한 번 만들어본 적은 있어. 그 때는 좀 타긴 했지만, 생각보다 먹을 만 했거든. 요즘은 요리 짬밥이 좀 쌓여서 아마 괜찮게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끈을 꺼내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묶었다. 사실 요리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줄이면 그만이었지만, 머리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이 귀찮았기에 그냥 묶는 쪽을 택했다.

머리를 묶은 유진은 중탕으로 버터를 녹이기 시작했다.

“유라야. 계란 좀 풀어서 섞어줄래?”

“알았어요.”

유라는 옆에서 계란을 섞으며 유진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버터를 적당히 크림이 되도록 녹여낸 뒤 설탕과 섞었다. 이번이 두 번째라고 말했지만 마치 매일 한 것 마냥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유라는 자기가 하던 일도 잊고 감탄사를 흘리며 유진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유라야?”

“네?”

“계란 다 풀었어?”

“잠시 만요.”

유라는 그제야 계란을 거품이 나도록 섞어서 유진에게 건넸다. 유진은 생지를 만들며 옆에서 그녀의 요리를 지켜보는 유라에게 말을 건넸다.

“유라야, 요즘 무슨 고민 있어?”

“고민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라의 사고가 잠시 멎었다. 고민? 고민이라면 많았다. 진학문제부터 이런저런 고민까지, 고민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유라는 유진에게 고민을 털어놓아도 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혈연은커녕 생판 남에 불과한 사진을 거둬주고, 학비부터 생활비까지 전부 대주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물론 부모님이 남긴 돈과 국가에서의 지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유진의 행동이 빛을 바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유진은 나이가 많기는커녕 아직 20대 후반밖에 되지 않았으니, 유라는 자신이 유진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따금씩 생각하곤 했다. 말마따나 결혼할 생각은 1도 없다고 유진이 말하곤 했지만 그게 정말 본심인지 유라는 알 길이 없었으니까.

“응. 요즘 고민에 빠진 얼굴이라서 말이야.”

“없어요.”

“그래?”

굳이 말할만한 고민은 아니다­그런 의미를 담아 유라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유진은 뭔가 아쉬운 얼굴을 잠시 보이고는, 평소대로 웃음기가 서린 얼굴을 하곤 말했다.

“나중에라도 생기면 말해줘. 아, 연애 고민은 빼고. 난 연애라곤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별 도움은 안 되거든.”

언니 정도면 밖에 나가면 사귀고 싶은 사람이 줄을 설 텐데. 나는 만나줄 사람이나 있으려나.

130cm은 작아도 너무 작은 키였다. 중학생도 아니고 초등학교 저학년과 비교해야될 만한 키였고, 요즘은 발육이 좋아서 초등학교 저학년인데도 그녀보다 키가 큰 아이도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작은 키.

키가 컸으면 좋겠지만, 변이한 종족이 난쟁이였던 만큼 키가 여기서 더 크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불가능한 것에 매달리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미련이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유라는 방에서 키가 커지는 운동을 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미신에 기대어 우유를 많이 마시기도 했다.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 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유진은 생각에 잠긴 유라를 흘끗 보곤 역시 고민이 있는 것 같다고 확신했다. 저렇게 대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당연한 거였다. 유진은 유라를 부를까 고민하다 재밌는 방법이 생각났다는 듯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띄웠다.

유진은 만들어낸 생지를 비닐에 담아 피자도우를 피듯이 반죽을 평평하게 펴냈다. 유진의 완력에 의해 순식간에 펴진 생지를 유진은 냉장고에 집어넣고는, 아직도 고민에 잠겨있는 유라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고 들어올렸다.

“어? 어?”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으실까~”

“내려줘요!”

“무슨 고민하는지 말해주면 내려줄게~”

“고민 없다니까요!”

손에 매달린 대롱대롱 고양이 같은 모양새로 들린 유라는 유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유라의 허약한 근력으로는 유진의 고릴라 뺨치는 팔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유라는 유진의 의도대로 소파에 내려앉혀질 때까지 들려서 좌우로 흔들어져야만 했다.

“어지러...”

“우리 꼬맹이가 무슨 고민이 있길래 멍을 그렇게 때려?”

“고민 없어요.”

에구, 삐졌네. 유진은 홱 돌아서서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는 유라를 보며 혀를 찼다. 너무 심했다. 애가 어린애처럼 대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래? 정말? 얼굴에 ‘나 고민 있어요’라고 써놓고?”

“...없어요.”

유진은 계속해서 튕기는 유라의 모습에 뒤에서 유라를 끌어안았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에 유라가 당황하며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유진이 일부러 풀어준 게 아닌 이상에야 유라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라는 코를 파고드는 희미한 우유냄새에 과거의 일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부정할 필요는 없는데. 난 네 보호자잖아. 부모 대신이니까 고민거리 정도는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막말로 내 젖까지 먹...”

“닥쳐요 좀.”

그 때 일 생각나게 하지 마요. 부끄러워 죽을 거 같으니까. 쏘아보는 유라의 매서운 눈초리에 유진을 입을 다물었다.

“그냥 키 때문에 고민했을 뿐이에요.”

“키는...어, 깔창 사줄까?”

“아 좀!”

“농담이야 농담. 키는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영역은 아니네.”

“키 작으면 얼마나 불편한 줄 알아요? 냉장고에서 뭘 빼내기도 힘들지, 책상은 어린이용 책상을 써야 키가 맞지, 사람들이 초등학생으로 오해하기도 하고. 또래 애들한테 어린애 취급받는 건 일상이에요! 누가 이렇게 작아지고 싶어서 작아진 줄 아나!”

“130cm가 확실히 한참 작은 키긴 하지.”

“10cm만 늘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 뭐하면 키높이 신발이라도 신는 게 답이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아니잖아요.”

“태생적인 문제는 해결하기 힘들어.”

마법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유진은 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기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거봐요. 말해봤자 해결도 안 되잖아요.”

“그래도 속 시원하지 않아?”

“...그렇긴 해요.”

“내가 네 보호자잖아? 그러니까 고민이 생기면 속 시원하게 털어놔. 고민을 해결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들어줄 순 있잖아.”

“...언니.”

“왜?”

“언니는 저한테 왜 잘해줘요? 솔직히 생판 남이고...그렇다고 제 부모님과 아는 사이도 아니고...”

“음...그냥 오지랖이라고 하자. 그렇게 밖에 설명을 못하겠네. 거창한 이유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냥 오지랖이야 오지랖.”

오지랖...짧지만 강렬한 단어가 유라의 머릿속에 박혀들었다. 어쩐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말이었다.

“...언니, 고마워요.”

“오글거리게 왜 이래.”

“언니가 없었으면,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미화되곤 하는 게 과거라고 해도, 내 인생은 무관심과 방치로 점철된 인생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몇 번 본적조차 없고, 어머니는 일로 바쁘셔서 거의 보지도 못하고, 언제나 혼자서 시간을 보냈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슬픔보다는 공허함이 앞섰기에, 유라는 삶의 의욕이 별로 없었다.

평소처럼 수다쟁이의 가면을 쓰고 활발한 척 할 뿐.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좋게 봐줄 테니까. 아주 약간의 관심을 갈구하기 위한 수단. 그게 바로 수다였다. 그것도 세상에 혼자 남겨진 순간, 유라는 그 가면마저 포기하려 했다.

그녀를 껴안고 있는 여성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줄 때까지는.

인연이라곤 변이자관리본부에서 잠깐 마주친 정도에, 아는 것은 이름과 직업밖에 없는 사람이 자기를 선뜻 친동생처럼 돌봐 주리라고 유라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유라는 유진을 만나고 나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은 희망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을 치던 자신에게 손수 희망을 품에 안겨줬으니까. 유라는 몸을 뒤집어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진은 유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이내 웃으며 유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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