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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277화 (277/352)

〈 277화 〉 외전:처녀귀신은 외롭다

* * *

“심심하다...”

세연은 천장에 매달려 폰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 집에 오게 된지도 벌써 석 달, 평소처럼 청소를 마친 세연은 천장에 붙어 시간을 죽였다. 폰이라도 만지는 게 그나마 시간을 죽이는 방법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10시간 넘게 폰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나마 하던 모바일 게임도 결국 한 두 시간 돌리면 질리는 법이고, 그렇다고 방송을 보자니 그것도 신물이 나던 참이었다. 수면 없는 귀신의 하루는 너무나도 길었다. 게다가 지금 시간은 새벽이니, 하다못해 친구인 유진과 놀 수도 없었다.

본인이 유진의 방송을 뒤에서 보조하고 있으니만큼 평소에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알고 있기도 하고, 이 집에 오고 나서 유진이 워낙 바빠진 탓에 하루에 대화도 별로 나누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수도 없는 게, 유진과 집안 어지럽히는 망할 망아지...아니 에포나 외에는 그녀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새롭게 들어온 식구인 이세계인은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기는 하지만, 세연은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질 수 있을 정도로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래저래 복잡한 마음에 세연은 방에서 빠져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과, 정원 한가운데에 서있는 눈사람. 어제 유진과 리온, 에포나가 같이 만든 눈사람이었다. 세연은 눈사람 위에 걸터앉아 아직은 어둑어둑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하늘은 달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세연은 어두운 밤하늘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유진과 만났을 때부터, 이 집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과거를 전부 되새겼을 쯤에는 조금씩 날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옥참마도를 이렇게 밖에 내둬도 되는 건가?”

세연은 눈사람의 팔이 되어버린 지옥참마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지옥참마도는 사실상 세연의 본체에 가까웠기에, 이런 데에 방치해두고 들어가 버린 것은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자신을 소중한 친구로 여긴다는 사실 자체는 잘 알고 있지만, 원래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납득되는 것은 아니니까.

세연은 반으로 갈라진 지옥참마도를 쓰다듬었다. 원래 그녀의 몸 안에 있어야할 물건이 이렇게 버젓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내장이 끄집어내진 느낌이라고 세연은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젓고는 눈사람의 위에서 내려왔다.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으니, 슬슬 아침 청소도 해야 하고 정원도 청소해야 했다. 그렇게 세연이 청소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어, 귀신언니다.”

무슨 일인지, 에포나가 눈을 비비며 정원에 나타났다. 세연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포나를 보며 가볍게 인사를 해주곤, 집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세연은 에포나가 옷자락을 붙잡고 보내주질 않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니?”

“같이 놀래?”

“놀자고?”

“응! 심심해! 하지만 주인님은 리온이랑 자고 있어!”

어제 셋이서 같이 잔다고 했더니 정말로 같이 자는 구나. 에포나는 평소 습관대로 일찍 일어난 모양이라고 세연은 생각했다.

“놀자!”

청소해야 하는데...세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온을 뿌리칠 정도로 모질지 못했다. 세연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청소해야 하니까 조금만 놀아줄 거야?”

“알았어! 헤으응!”

...저 소름끼치는 감탄사는 어떻게 안 될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지만 세연은 가까스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수 있었다. 유진이 저걸 고치려고 반년 가까이 노력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전히 에포나는 저 감탄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세 살 버릇 여든 까지 간다더니 그게 정말 맞는 말 같다고 세연은 생각했다.

“그럼 뭐하고 놀까?”

세연은 기본적으로 수호령이긴 해도 유령이라, 할 수 있는 놀이가 한정적이었다. 유진과 멀리 떨어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행사할 수 있는 물리력이 아주 강한 것도 아니었다. 딱 성인여성 정도의 힘이었기에, 그나마 체력이랄 게 없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눈사람 만들자!”

“눈사람?”

그 정도라면...아마 가능하겠지? 세연은 발자국 하나 없는 정원을 보며 생각했다. 에포나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장갑까지 끼고 기대감에 가득찬 얼굴로 세연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진무구한 모습에 세연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나왔다.

“응! 주인님도 놀랄만한 눈사람을 만들거야!”

“그럼 만들어볼까?”

세연은 이제는 낡아빠져 색조차 빠진 기억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고아원에서 다 같이 눈사람을 만들던 때의 추억.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기억이지만, 세연은 과거를 곱씹는 유령이 된 탓에 그 기억을 아직도 떠올리곤 했다.

아이들이 모여서 다 같이 눈덩이를 굴리기만 해도 까르르 웃으며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부모가 없다는 사실도,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더라도 그때만큼은 그런 것들을 다 잊고 신나게 놀 수 있었으니까.

세연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덩이를 손으로 뭉쳤다. 비록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마치 환상통이 느껴지듯이 손이 시려왔다. 마치 없던 감각이 생겨난 것 마냥 느껴지는 손의 감각에, 세연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이후로 처음 느껴본 감각이었다. 미각과는 다른 감각. 세연은 눈덩이를 어루만지다, 천천히 굴려가기 시작했다. 정원을 가득 채운 눈이 눈덩이에 붙어 점점 눈 밑의 초록빛 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눈덩이가 불어나기 시작하자, 눈덩이를 어설프게나마 뭉쳐 굴리던 에포나는 세연과 함께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말은 없었지만,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둘 다 눈사람을 만든다는 목표는 같았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눈덩이를 굴린 세연과 에포나는 정원의 반 정도를 밀어버려 이제는 온 힘을 다해야 겨우 굴릴 수 있을 수준까지 눈덩이를 키웠다. 어제 굴렸던 눈덩이보다도 커다래서, 에포나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어제 만들었던 눈덩이의 옆까지 밀어놓곤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주인님도 놀라겠지?”

“그럴 거야.”

에포나의 순진무구한 미소를 보던 세연은 고아원 시절을 떠올렸다. 궁핍하지도 않았지만 여유롭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그때는 마냥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고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고 세연은 추억했다. 매일매일이 놀이의 연속이라, 그때만은 부모가 없던 것을 잊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생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죽기 전에 유진을 만났다면 달라졌을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할 질문을 세연은 떠올렸다.

“귀신언니! 머리도 만들자!”

“응? 아, 알았어.”

세연은 잡념을 멈추고 에포나와 함께 다시 눈덩이를 굴렸다.

이 눈덩이를 굴려서 올려놓으면 에포나는 열심히 눈코입을 붙이고 팔을 갖다 붙이겠지. 눈덩이에 불과한 물건이 사람이 되는 마법이다. 어릴 때는 이름도 붙여줬었던가? 세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느 샌가 정원의 눈을 죄다 먹어치운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에포나는 눈덩이를 번쩍 들곤 폴짝 뛰어 몸통 위에 눈덩이를 올려놓았다. 인간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곡예였다.

“헤헤, 이제 눈코입 만들자!”

“그래...”

에포나는 주저앉아 정원에 흩어져 있는는 조약돌을 줍기 시작했다. 세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자기도 같이 조약돌을 몇 개 주워 눈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본인이 직접 붙일 생각은 없었다.

본인은 그냥 눈사람 만드는 것을 도와준 것 뿐이고, 어디까지나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에포나였으니까.

“너무 높아~”

“그래? 그럼 내가 들어 올려 줄게.”

세연은 에포나의 옆구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에포나가 작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포나는 팔을 뻗어 머리에 눈코입을 붙이기 시작했다. 당근이 없어 코가 뭉툭하긴 했지만, 에포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눈코입이 완성되고, 둘은 정원 밖 나무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눈사람에게 팔을 달아주었다.

“됐다! 주인님이 놀라겠지?”

“그럼. 엄청~놀랄 거야.”

세연은 에포나의 말에 맞장구치곤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정원에 쌓인 눈을 거의 다 먹어치우고서야 만들어진 눈사람은 거대했다. 아마 2미터 가까이 되지 않을까, 세연은 눈으로 대충 크기를 가늠하며 생각했다.

“우리 이름 지어주자!”

“이름?”

“응! 주인님이 소중한 물건에는 이름을 붙여주는 거라고 했어!”

“그래?”

“그러니까 지어줘!”

“응?”

갑작스런 에포나의 말에 세연은 당황하며 에포나를 쳐다보았다. 에포나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세연은 기시감을 느끼며 온 몸을 떨었다. 과거의 추억이 봇물처럼 터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는 뭐라고 지었더라.

세연은 추억 한켠을 뒤적이다 오래전의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을 떠올렸다.

“...세라로 하자.”

세연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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