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 IF외전: 선을 넘다(1)
* * *
어두운 밤, 유진의 방에서 한쌍의 모녀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연이는 의미심장은 미소를 짓고는, 방 밖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방해자도 없는 방에서, 두사람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요즘 따라 어리광 부리는 일이 많구나.”
“...좀 힘들어서요.”
나리는 유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익숙한 냄새.
요 근래 나리는 부쩍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진 유진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같은 침대를 쓰곤 했다. 혼자 자기엔 사이즈가 큰 침대였으니 공간은 넉넉했지만, 유진은 이따금씩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에도 이렇게 달라붙은 적은 많지 않았는데. 유진은 곤히 잠든 나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작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로서는 꽤 젊은 나이에 입양한 아이였고,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봐온 아이였다. 그녀의 눈에 굳이 잠자리를 같이 하는 나리의 행동은 귀엽게만 보였다. 다 큰 나리의 모습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뒤돌아 볼만큼 아름다웠지만, 유진에게는 언제나 어린 시절의 모습이 겹쳐있었으므로.
“어머니...”
나리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간질였다. 유진은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니?”
“혹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지금이라도 고백하고 싶은데 고백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
나리도 벌써 그런 나이가 된 건가. 유진은 감회어린 얼굴로 나리의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면 나리가 이 세상에 넘어 온지도 50년이 넘었으니,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게 오히려 이상했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객관적으로도, 유진이 보기에도 나리는 미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엘프답게 아름다운 생김새와, 풍만하다고는 못하지만 슬렌더한 잘빠진 몸매를 가진 아이였다. 지금까지 남친 하나 생기지 않은 게 오히려 의아할 정도로.
몇 년 전에 물었을 때는 뭐였더라, “아직 생각이 없다.”고 했던가. 유진은 나리의 대답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지. 유진은 따뜻한 눈으로 나리를 바라보았다. 직장인이 되고나서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 조금 어색해진 둘이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미묘하게 멀어졌던 관계가 복구 된다면, 유진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생각했다.
“혹시 유부남이라거나, 이미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럼?”
나리는 잠시 머뭇거리며 유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말해도 될까. 아주 잠시 발칙한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나리는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말 못해요.”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이야기 해야지. 자, 말해봐.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까.”
“말하게 되면...어머니가 저를 싫어할지도 몰라요.”
“...왜?”
유진은 나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내가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나리를 싫어해야할 이유가 생각나질 않았기에,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자신을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성적으로 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나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차마 유진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었다.
두려웠으니까.
자신의 고백으로 사이좋은 모녀관계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리는 그냥 이렇게라도, 모녀관계로, 그럴 핑계로,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렇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을 맞대고, 잠깐의 행복을 즐길 수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채 100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에 비하면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갈 수 있으니, 언젠가는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참아야할 시간만큼 마음은 너덜너덜 해지겠지만, 언젠가 참지 못하고 고백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때라고 나리는 생각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렴.”
“요즘 고민이 많으신가봐요?”
“음, 뭐, 그렇지...”
그렇게 티가 났던 걸까.
나리는 부하직원이 걱정할 정도로 얼굴에 티가 낫나 생각하면서도, 손은 끈임 없이 타자를 치고 있었다.
“요 근래는 그래도 좀 조용하네요. 별다른 사고도 없고. 세 달 전에 범죄조직 검거 때는 진짜...”
“요즘 일어나는 사건은 잡범들이니까. 범죄조직이랑 비교할건 못 돼.”
“그건 그렇죠...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떨려요.”
나리는 세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희귀한 종족의 변이자를 인신매매하는 범죄조직을 체포하는 작전은 예상치 못한 총기다량 보유로 인해 적지 않은 희생을 냈지만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하는 데 성공했다. 범죄조직을 잡기 위해 두 달이라는 준비기간이 필요했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충분히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놈의 3D프린터. 성능이 너무 좋아져서 문제가 많아.”
“인터넷에서 설계도 하나만 다운 받으면 총이 뚝딱 완성된다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니까요.”
요즘은 재료와 설비만 충분하면 3D프린터로 총이든 총알이든 뽑아낼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탓에, 날로 극심해지는 범죄조직의 범죄로 사회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생명체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전부 총 앞에서 평등해지기에, 이제는 요원들도 대부분 방탄복을 안에 챙겨입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할 일은 다 끝났니?”
“네. 당연하죠. 이제 곧 퇴근할 시간이니까 곧...”
“먼저 퇴근해. 난 할 일이 있어서 늦게 돌아 갈 테니까.”
“넵!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쇼!”
말이 바뀔까 두려워 순식간에 사라진 부하직원을 보며, 나리는 한숨을 쉬었다.
“약삭빠르기는...”
나리는 턱을 괴곤 쉬는 시간에 사온 커피를 홀짝였다. 사실 일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당장이라도 퇴근할 수 있었다.
다만, 집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필사적이었기에 나리는 집에 바로 귀가 할 수 없었다.
실수라도 하게 되면, 참지 못하고 고백을 하게 된다면...
“...일이나 하자.”
나리는 애써 생각을 털어내고 다시금 키보드를 두들겼다.
이 일상이 계속 되기를 바라면서.
“다녀왔습니다.”
“어서와! 헤으응!”
“아, 에포나. 어머니는 어디계셔?”
밤늦게 귀가한 나리를 반겨준 것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이제는 인간으로 둔갑도 할 수 있게된 유령마, 에포나였다. 에포나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반가운 얼굴로 나리를 쳐다보았다.
“방에 계셔!”
“그래?”
“저녁 먹었어?”
“대충 떼웠어. 차려줄 필요는 없고...”
“알았어! 그럼 푹 쉬어! 나는 산책 다녀올게! 그리고 잘해봐! 화이팅!”
“뭐? 아, 아니...방금 뭐라고 했어? 에포나!”
나리가 급하게 에포나를 불러 세웠지만, 에포나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리는 한숨을 쉬곤, 어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어머니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지.
똑똑똑.
“어머니, 저 왔어요.”
“그래, 드, 들어올래?”
나리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자, 잘 다녀왔니?”
“...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리는 에포나가 왜 오밤중에 산책을 하러나간다고 말했는지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