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화 〉 외전:넌 내가 용사로 보이냐
* * *
“그대가 용사인가!”
“용...뭐?”
이게 뭔 상황이야. 나는 쓸데없이 화려한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할아범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군중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거 용사소환 맞지?
도대체 언제 적 유행이야 이게. 뭐 날 소환한건 마왕이라도 물리쳐줍쇼~하고 부른 거지? 그렇지? 참 주옥 같네 진짜. 장보러 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야. 세연아, 넌 왜 내 등짝에 붙어서 숨어있냐?
너 귀신이잖아. 날 쳐다보는 건데 왜 널 쳐다보는 것처럼 행동해.
“유진아, 사, 사람이 엄청 많아...”
그건 나도 알거든. 근데 진짜 곤란하네. 살다살다 이세계에 소환되다니 예상 못 했는데. 이건 뭐 무슨 삼류 양판소에서나 나올법한 전개야. 이거 뭐 마왕 쓰러트릴 때까지 집 못 간다 그런 거지?
아닌가? 최근 트렌드 생각하면 마왕 잡으면 통수치고 죽이려 들 수도 있지 않나? 아니면 가스라이팅 오지게 당하다가 나 안 해! 때려치워! 하고 튀는 전개거나. 아니면 뭐 그냥 처음부터 막나가던가 튀던가...
“용사여? 내 말을 듣고 있는가?”
“무슨 말 했어요?”
“무엄하다!”
아니 시발 납치해놓고 뭐 어쩌라고. 애들 저녁밥 해주러 가야하는데 납치해놓고 대접이 영 아니네. 너네 수준이 그거밖에 안 돼? 진짜 다 엎어버릴까. 애내들 해봐야 그렇게 쎌 것 같지도 않은데.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피냄새가 진동해서 짜증나는데 말이야.
도대체 여기서 뭔 짓을 한거야.
기둥 하나 뽑아서 휘둘러주면 알아서 그 뻣뻣한 고개를 좀 숙이지 않으려나.
“물러나라! 크흠...용사여, 우리가 그대를 부른 것은 이 세계에 위험이 닥쳤기 때문이다. 그 위협은...”
“마왕이 나타나서 전쟁을 시작한 거 맞죠?”
“그, 그걸 어떻게!”
“그리고 그걸 죽여 달라는 거고.”
뻔 하지 뭐. 용사가 하는 일이 마왕 족치는 건데. 옛날 옛적부터 용사는 마왕 죽이라고 소환되는 열정페이 노동자라 이 말이야. 나는 웅성웅성 대는 군중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곤 왕을 쳐다보았다. 거 할아버지 살이 피둥피둥 찐거 보니 잘 먹고 잘 살았나 보네. 통수 잘치게 생긴 상이다.
근데 이쯤에서 왕자든 공주든 튀어나올 때 되지 않았나? 원래 이런 건 왕자나 공주가 주도해가지고 튀어나와서 가장 먼저 동료가 되든 말든 하던데.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누군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왕자...인가? 귀티 나는 옷에 잘생긴걸 보면 아마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거 참 느끼하게 생기셨네.
“용사시여, 많은 것을 알고 계신 것 같으니 단독 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이 세상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 마왕의 준동으로 몇 개의 나라가 멸망했고, 남은 나라들은 힘을 합쳐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를 도와 마왕을 무찌르거라. 마왕을 쓰러트리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 주겠다.”
그게 부탁하는 놈의 표정이냐. 거만한 표정으로 네가 내 말을 무시할 수 있겠냐? 하는 표정을 지으면 제가 빡쳐요? 빡이 안쳐요? 거 그랜절하면서 부탁해도 모자를 판에 지금 건방진 표정으로 하대하는 걸 보니 짜증나는데.
리온이 내가 오늘 돈가스를 직접 튀겨준다고 해서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 이 세계 따위 알게 뭐야! 니들 일은 니들이 알아서 해야지! 날 소환한 건 좀 놀랐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왕자가 뭐라 앞에서 찌껄이든 말든 무시하고 왕에게 다가갔다. 내 앞에 경비병들의 창이 드리워졌지만, 니들이 제우스 번개 눈앞에서 본 적 있냐? 그 변태새끼 번개 한방이면 궁전이 한방에 날아갈 텐데.
애초에 신들이랑 싸우다보면 이정도 날붙이에는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판타지 세계답게 좀 초인 같은 놈들이 있으면 모를까, 눈대중으로 살펴본 바로는 그런 인간이 딱히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고.
“그 뭐냐, 마왕은 알아서 잡으시고~다른 세계에서 함부로 누구 소환하지 맙시다. 예? 막말로 지금 꼬라지 보면 마왕 잡아서 돌아오면 뭐 위협이니 뭐니 하면서 통수칠 것 같은데 굳이 내가 도와줄 필요도 못 느끼겠고~세상엔 순리라는 게 있는데 멸망하는 게 순리라면 받아들이는 게 맞지 않나 싶고~그러니 그냥 알아서 싸워 이기든 포기하고 집구석에 박히기라도 하든지 하시던가 하세요.”
“무, 무엄한!”
“무엄? 네가 지금 누굴 소환했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세상을 구한 이후 거의 쓰지 않았던 신의 힘을 조금씩 끌어올린다. 갑작스레 변한 내 분위기에 사람들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여기 인간들은 나약하구만. 나는 안색이 새파래져 의자에 앉아 숨을 몰아쉬는 왕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아 됐다.
어차피 죽을 놈들인데 괴롭혀서 뭐하냐.
“그럼 난 간다? 마왕은 니들이 알아서 잡아.”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다, 당신은 누구십니”
“나? 듀라한인데?”
나는 몇 달 전에 저승사자에게 배운 경계로 향하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오, 이곳엔 어쩐 일이더냐?”
“아, 누아다씨. 오랜만이네요. 어쩌다보니 제가 소환을 당해서요...”
오랜만에 만난 누아다씨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조각 같은 근육질 몸매를 드러낸 채로 내게 다가왔다. 몸매 개쩌네. 남자라도 보고 ‘오’소리가 나올법한 몸이다.
“흠? 그렇군...아무래도 가지세계측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마법을 발동한 모양이야. 허나 그런 마법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반은 신이나 다름없는 그대를 부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지 모르겠군.”
“그래요?”
“아마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면 1000명분...정도는 되겠군. ”
무시하고 오길 잘했네. 거 뒤구린 것처럼 생겨가지고 내가 외모지상주의에 물들었나 생각했는데 그 정도면 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와, 미쳤네요. 그럴 정성으로 나라 살릴 방법이나 강구하지. 근성이 없어 근성이. 지들이 해결해야지 짬을 때리려고 하네.”
“하하, 가지세계가 괜히 가지세계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네. 운명 뿐만이 아닌 의지조차도 모자라다는 것일세.”
“아 넵. 근데 헤카테씨는요?”
“자네가 준 그 네모난 물건을 가지고 뭔가 하고 있더군.”
공기계로 연구라도 하는 모양이다.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음에 인사드려야지.
“그럼 저는 가볼게요. 저녁도 해야 해서...”
“아, 그럼 가보게. 바이브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네, 수고하세요~”
나는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해 집으로 돌아왔다.
“아. 장 보러 다시 가야되네.”
망할 놈들. 덕분에 시간만 날려먹었잖아. 나는 문앞에서 노을진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