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후일담:엔딩 이후의 세계
* * *
“...놀랍군.”
포모르는 낙원 바깥에 우거진 나무를 보며 감탄했다. 신들이 사라져가면서 생긴 변화였다. 모두가 낙원 밖의 광경을 바라보며 놀라움의 탄성을 자아냈다.
신들이 뽑아갔던 정기가 제자리를 되찾으면서 땅이 급속도로 복원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야 끄트머리는 아직 황야로 가득했지만, 일부나마 땅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 길조였다.
“낙원 바깥을 한번 쭉 둘러보고 싶은걸.”
테테가 제 키의 두 배쯤 자란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테테에게 있어 잘 정리된 공원에 있는 나무가 아닌 자연 속에서 자라난 나무는 태어나서 난생 처음이었다. 낙원은 철저하게 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성된 곳이었으니.
뒷골목조차 괴짜 신들의 장난감으로 굴려지다 버려진 곳이 아니던가. 테테에게 있어 낙원 바깥은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자, 흥미로 가득한 세계였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모험가들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까. 테테는 셀 수조차 없는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남몰래 품어오던 꿈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감동을 받은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젊었을 적 보았던 풍경을 다시 보게 된 모험가들은 눈물을 흘렸고, 테테처럼 처음 바깥의 풍경을 본 사람들은 감탄의 탄성을 내뱉었다.
“이게 신들이 빼앗아간 것들인가.”
“그렇다네. 신들이 자기 목숨을 위해 빼앗은 대륙의 정기가 돌아오고 있는 것일세. 대륙 전부는 무리라도, 잃어버린 정기는 차차 회복 될 걸세...”
베네딕틴은 포모르의 옆에서 감회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로서도 아주 희미한 기억으로밖에 없었던 풍경이 펼쳐지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포모르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바닥의 흙을 손으로 퍼냈다. 물기를 머금은 흙의 촉촉함이 그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물기 없이 바싹 말라 갈라진 땅과 닿는 것만으로도 수분을 뺏어가는 모래가 가득한 땅을 10년 가까이 밞아온 그로서는 낯선 감촉이었다.
...나쁘지 않군.
손바닥이 진흙으로 더러워졌지만, 포모르는 개의치 않았다. 생명을 머금은 흙이란 어쩌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니까.
그것이 설령 신들이 만든 보물이라도 말이다.
포모르는 흙의 내음을 맡았다. 아무런 냄새조차 나지 않는 죽은 흙의 냄새가 아닌, 생명을 잔뜩 머금은 흙 특유의 냄새가 후각세포를 자극했다. 포모르의 행동을 지켜보던 테테와 베네딕틴도 포모르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많은 사람들이 흙을 만지작거리는 기묘한 광경이 곳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네, 정말 떠날 생각인가?”
“...그래.”
포모르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낙원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동이 트는 아침부터 짐을 챙기곤 떠나려는 포모르를 정문에서 붙잡은 베네딕틴과 그를 보러온 사람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도, 인간도, 위에 서면 달라지는 법이었다. 신들이 힘을 잃고 사라져버린 이후, 낙원은 아주 조금씩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가담한 자들이었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섞이면서 난장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신들을 믿던 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자들, 신들의 보물을 약탈하는 자들. 그리고 서로 영역을 가르고 파벌을 나누어 싸우는 자들. 질서를 잃어버린 자들이 혼돈 속에서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었다.
신이 없다면 누가 꼭대기에 서는가?
신이 없다면 누가 질서를 유지하는가?
인간들은 자유를 되찾았지만, 여전히 이끌어줄 자가 필요했다.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지도자가 인간들에겐 필요했다. 베네딕틴은 스스로가 그럴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리고 그의 바로 앞에 모두를 이끌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자가 존재했기에, 베네딕틴은 그를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포모르는 권력에 집착하는 이가 아니었다. 당장 그는 신들이 사라진 이래 최고의 권력을 거저 거머쥘 기회가 생겼음에도 무심하게 그 기회를 버리고 떠나려 하지 않는가. 권력으로 붙잡을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붙잡아야 하는가?
베네딕틴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고민이 많은 얼굴이군.”
“그렇다네. 신들이 사라졌지만 혼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그런가.”
포모르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일찍이 예상한 일이었다. 신들이 억압하던 인간들이 자유를 되찾았으니, 이제 권력을 얻기 위한 각축장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추구한다. 파르사드가 그에게 가르친 것 중 하나였다.
“남아줄 순 없겠는가? 사람들은 자네를 필요로 하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에게는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걸어놓은 반으로 부러져 버린 검을 만지작거렸다. 사실상 파르사드에게 받은 것 중 유일하게 남아있다시피 한 것이었다. 그는 파르사드가 다스리던 제국의 황궁이 있었다던 곳에 갈 생각이었다.
파르사드의 말에 의하면, 황궁에는 역대 왕들이 묻힌 묘지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는 찾지 못하게 된 그의 시신 대신 반만 남은 그의 검이라도 놓고 올 생각이었다. 파르사드가 듣지는 못 할 테지만, 그게 그의 나름대로 10년간의 여정을 끝마치는 방법이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일축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포모르에게 있어서는 죽어가는 그를 살려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준 파르사드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헌사였기에, 포모르는 여정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베네딕틴은 여전히 떠날 생각 밖에 없는 포모르를 보며 마음을 굳혔다. 낙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을 가진 곳이었지만, 새로운 땅이야 개척하면 그만이었다.
“그럼 나도 따라가겠네. 신들의 축복이 사라진 땅보다는 생기를 되찾은 땅이 새롭게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이지 않겠는가?”
“뭐야, 나도 갈래! 나도 바깥세상이 보고 싶다고!”
이에 질세라 테테가 크게 외치며 포모르의 옆에 따라붙었다. 제 몸만한 가방을 맨 채였다. 이윽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왕궁까지는 험난한 길이다. 죽을 수도 있다. 식량조차도 충분하지 않지. 그런데도 따라올 생각인가?”
“여기에 있다고 뭐 안전한줄 알아? 벌써 부터 힘 꽤나 쓴다는 놈들이 서로 땅따먹기 한다고 단체로 모여서 칼부림이나 벌이고 있단 말이야. 차라리 아무것도 없어도 바깥세상이 나을 걸?”
“...그런가.”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포모르는 순순히 테테의 말에 수긍했다.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지, 하나 둘씩 짐을 챙기고 나타나 포모르의 뒤에 서기 시작했다.
한 사람으로 시작한 여정이 수십, 수백, 수천으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포모르는 조용히 왕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 낙원에서 권력싸움을 하던 자들도 조용히 그 대열을 지켜보았다.
새로운 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 여정을 우리는 새 제국의 시작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초대 황제인 포모르 1세는 그 뒤로 옛 제국으로 돌아가 그의 스승을 기리고, 나라를 세워 인간들이 사라진 제국을 다시 재건했죠.. 그리고 삼백 년이 지난 지금, 저희는 초대 황제이신 포모르 1세께서 설립하신 이 아카데미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알고 있군요. 아나트양. 역시 우등생 답게 잘 정리해 왔군요.그래요, 제국의 초대 황제가 폭정을 일삼는 신들을 물리치고, 옛 제국이 있던 곳에 새로운 제국을 세운 것은 아주 유명한 사실이에요. 조사를 잘 해왔군요.”
선생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학생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안경을 쓴 지적인 느낌의 소년이었다.
“케리군. 질문이 있나요?”
“선생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초대 황제는 정말로 신과 싸워서 이겼을까요? 신은 정말로 존재했을까요? 아직도 신을 모시는 종교가 존재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케리의 질문에, 교사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에요. 케리군.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 주류에 가까운 의견은 신들과 싸워 이겼다는 초대 황제의 이야기는 후대에 그의 업적에 살을 덧붙인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에요. 저명한 학자들은 신이 아니라 신을 모시던 나라의 지도자를 물리치고 옛 땅으로 돌아가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글쎄요. 아무도 신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누구도 그 존재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답니다.”
교사의 답변에, 아나트는 묘한 표정으로 교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제국의 초대 황제, 포모르의 동상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신들은 그 존재조차 의심받는 시대가 되었구나.’
아나트는 아주 오래 전의, 까마득한 옛날의 일을 떠올리며 입가에 씁슬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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