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후일담:이사를 했다면 집들이는 국룰이지?(2)
* * *
[여보세요? 유진씨, 잠시 만요. 지금 레이드 뛰는 중이라...]
언제 풀려날지 모를 모리안을 감시한다는 이유로 아직 현세에서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마리아는 오늘도 열심히 게임을 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보니까 아주 고여서 토끼공주가 되셧드만.
순수하게 노가다로 엔드스펙까지 올라갔다는 거에서 마리아의 겜창력에 감탄해야 되나 싶지만, 한심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모리안 감시한다는 건 핑계고 그냥 게임하고 싶어서 남은 거 같은데. 그쪽 부모님과는 어찌어찌 타협을 본 모양이었다. 아직도 거기 살고 있는 걸 보니.
어쩌면 아직 겉껍데기뿐이지만 마리아의 모습을 계속 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고.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을 겉모습으로나마 보고 싶은 부모의 심정은 나도 이해를 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걸리는데?”
[아, 잠시 만요. 이제 거의 막페...야이 X년아! 장판 그만 쳐 밞으라고요!]
속까지 김치게이머가 되셧구만. 바로 욕부터 박는 것 보소... 나는 수화기를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분명 전쟁 전까지만 해도 나름 듬직한 편이었는데 어쩌다가 애가 이렇게 망가졌을까. 나는 극대노하며 타자를 미친 듯이 두들기는 마리아의 분노를 느끼며, 누구를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
마리아랑, 저승사자랑, 라쿤 박사님이랑, 곰닥터 아저씨랑, 은하랑, 그리고...다른 신들은 모르겠고. 부모님한테는 있다 연락드리고, 버튜버 동료들이랑...부르려고 하니 밑도 끝도 없이 늘어나네. 심지어 대부분은 근 반년 만에 사귄 인연들이었다.
나 진짜 사람 많이 만났구나.
반년에 걸쳐 쌓아올린 인연이 내가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명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인맥 하나하나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뭐 상관없나. 이제 다른 세계에서 침략한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마리아에게서 들은 확답이었다. 가지세계는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완전히 떨어져 나가서 행방이 묘연해졌고, 가지세계의 신들은 전부 육체를 잃고 영혼까지 땅에 흡수되어 영양분이 되어버렸다고 했으니 이제는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란다.
...정말이지?
...또 뜬금없이 다른 세계에서 침략자가 오거나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나거나 외계인이 찾아와서 항복요구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면 여기 출신 신들이 뜬금없이 통수치고 신세계의 신이 되겠다고 발광을 하거나.
...솔직히 그럴 확률이 없다고 단언을 못하겠다.
당장 내 뺏어서 엔조이 하려던 모리안 같은 년도 있잖아. 나는 아직도 뒷목에 남아있는 봉인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전보다 덜 까끌까끌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마리아가 그리 쉽게 풀리는 봉인은 아니라고 했으니.
[후. 끝났다...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이번 주 토요일에 집들이 할 건데, 올래? 더 부를 사람 있으면 불러도 돼.”
[집들이요? 그건 인싸만 하는 이벤트라고 했는데...]
이년 이거 인터넷에 제대로 물들었나. 인싸 같은 소리하네.
“인싸고 뭐고 새집 장만 했으면 하는 게 집들이지. 그래서 더 부를 사람이나 신 있어?”
[제가 물어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아무래도 다른 분들이랑 이야기를 좀...]
“그럼 되는대로 연락 줘. 그리고 게임 좀 그만하고. NPC라고 해도 믿겠다.”
[헤헤...그럼 있다 연락드릴게요!]
도망쳤네.
저거 우리 집에 살았으면 등짝스매싱 한번 날려주는 건데.
“그 다음은...”
당연히 부모님이지. 내가 거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기자회견 직후에 전화가 걸려온 것 빼고는 건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잠시 손가락을 멈추고 연락처를 들여 보다가, 익숙하지만 낯선 번호를 눌렀다.
잠시 뚜뚜 하고 소리가 울리고, 대기음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것은 채 10초도 되지 않은 때였다.
“여보세요? 아, 엄마.”
[어유, 내가 평소에 전화 좀 자주하라고 하지 않았니?]
“하하...요즘 좀 바빠서...”
[맨날 집에서 방송만 하는 애가 전화할 시간도 없니? 내가 매일까진 아니더라도 며칠에 한번은 연락하라고 그랬니, 안 그랬니?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한 것도 아니잖니? 엄마나 네 아빠나 네가 그렇게 변해버려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연락은커녕 소식도 없고...갑자기 TV에 나와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니? 내가 평소에도 연락 좀 하고 살라고 몇 번을 이야기 했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날 잡아서 고향에도 내려오고 응? 추석에도 안내려오고...]
으아아아아악! 살려줘! 더 이상의 잔소리는 싫어! 나는 결국 시작된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몇 달 분의 잔소리를 한 번에 몰아 듣겠네!
“엄마, 엄마.”
“쉿.”
리온아,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까 옷자락 잡아당기면서 부르지 말아줄래? 너가 여기서 나타나면 내 상황이 더 꼬인...
[엄마? 유진아? 내가 지금 들은 게 맞니? 어머어머, 지금 엄마라고 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보렴! 지금 당장!]
으아아아악! 갑자기 떨어진 불호령에 나도 모르게 굳어버린 나는 두뇌를 풀가동하며 할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잘 못 말하면 진짜 나 죽어! 죽는다고!
근데 내가 말 안했던가?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나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해보면 이야기 한 적은 없는 거 같았다. 저 쪽 일이라 언급하길 꺼렸던 것도 있고, 일이 끝나면 이야기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말하는 걸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 내가 말 안했었나? 그, 연고 없는 애가 있는데 지인 부탁으로 내가 맡고 있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리온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어린애 앞에서 말 잘 못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미 겪어본 나는 머릿속으로 할 말을 못 할 말을 필사적으로 고르며 엄마에게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당연히 엄마한테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니? 다른 일도 아니고 청소도 제대로 못하는 너한테 애를...]
“아니, 내 이야기 좀 들어봐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집안일은 잘 했잖아! 귀찮아서 안한 거지 청소도 요리도 잘 한다니까?”
[그게 자랑이니? 평소에 집구석에서 귀찮다고 뒹굴거리는 걸 내가 뻔히 아는데 널 어떻게 믿니?]
어 음, 집에선 맨날 뒹굴 거리긴 했지. 엄마한테 맨날 등짝 스매싱 맞고 마지못해 집안일을 하긴 했지. 그래도 나 나름 빨래도 청소도 설거지도 다 잘 했는데...진짜 잘 했는데...
“진짠데...”
[뭘 억울해 하고 있니? 그러니 평소에 잘했어야지!]
맞는 말입니다요. 평소에 연락 안하고 살았던 내가 잘못했지. 나는 순순히 입을 다물고 어머니의 잔소리를 묵묵히 감내했다.
어찌되었건, 내가 한 달에 한번 연락할까 말까하는 불꽃 효녀인건 맞는 말이었으니까. 어머니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걱정과 서운함이 느껴진 것도 내가 가만히 있는 데에 큰 일조를 했다.
결국 어머니의 잔소리가 끝난 것은 30분이 지난 후였다. 그제서야 내가 전화를 걸었다는 것을 떠올리신 듯, 어머니는 나에게 용건을 물으셨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했니?]
“그, 집들이를 하려고 하는데...”
[집들이? 너 이사했니?]
“...응, 오늘 이사했어.”
[이번엔 어디로 갔니? 저번엔 작은 빌라로 이사했다고 했었는데...]
“저택 샀어.”
[...내가 지금 잘 못 들은 것 같구나. 어디를 샀다고?]
나는 조용히 화면을 터치해 영상통화모드로 바꾸고는 어머니에게 거실을 보여주었다. 리온의 모습은 나오지 않게 조심하면서. 웬지 보여주면 더 혼날 것 같았다.
[...로또라도 당첨 됐니?]
“아냐! 정당하게 벌어서 산거야. 엄마 아들, 아니 딸이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세계를 구했으면 이정도 집 정도는 받을 수 있다 이거야. 정부에서 직접 뒤를 봐주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면 미친년 취급당하겠지? X지의 제왕에서나 볼법한 스케일인데 누가 그걸 믿어.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구나. 네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이번 건 좀 놀랐단다.]
여전히 반신반의 하는 듯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대답하셨다. 하긴 중소기업 다니던 아들이 딸이 된 것도 믿기 힘든데, 오랜만에 연락을 하니 뜬금없이 겉보기에도 수십억은 할 것 같은 고급진 저택을 샀다고 하면 어떻게 믿겠어.
“아무튼! 새 집을 구했으니까 집들이에 초대하려고 엄마한테 연락한 거야! 엄마, 혹시 아버지하고 이번 토요일에 올라올 수 있어? 아버지 요즘도 토요일에 친구 분들이랑 낚시하러 가시나?”
[네 아버지가 낚시를 빠질 리가 있니? 그래도 네가 집들이를 한다는데 당연히 가실 거란다.]
거절해도 강제로 데려오시겠다는 의지가 전화기 너머에서 느껴졌다. 아버지가 평소에는 좀 무뚝뚝해 보이시긴 해도 엄마한테 꼼짝 못하니까 의사는 어찌되었든 간에 끌려오시겠군. 엄마는 둘째 치고 아버지랑은 거의 1년 만에 얼굴 보는 것 같은데.
아주 어색한 재회가 되겠군. 아빠는 딸로 변한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으시니까...
“그럼 오는 걸로 알고 준비할게?”
[그럼. 그럼 토요일에 보자꾸나. 이사 잘 끝내고, 밥도 잘 먹고 다니고..귀찮다고 대충 먹지 마렴. 그리고 그 애는...가서 이야기 하자꾸나.]
“응, 알았어. 엄마 사랑해~”
나는 어머니가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생각 이상으로 피곤한 통화였어...
“엄마, 누구랑 전화했어?”
“어, 네 할머니?”
“할머니?”
내가 엄마면 엄마는 할머니지. 생각해보니까 부모님한테는 뜬금없이 엘프 손녀딸이 생기신 거로군. 아이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아니시니까 귀여워 해주시지 않을까. 아들, 아니 딸 혼삿길 막혔다고 슬퍼하시겠지만 난 결혼할 생각이 없다.
몸은 이래도 난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다고...
딩동~
아, 배달 왔나보다. 나는 리온과 함께 현관으로 걸어가 배달 음식을 받았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배달부는 내 얼굴을 보곤 잠시 버벅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철가방을 열고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따끈따끈한게 갓 만든 걸 가져왔나 보네. 일회용 용기에 담긴 음식들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으, 배고프다. 빨리 차려서 먹어야지.
“그럼 수고하세요~”
“네, 넵! 수, 수고하세요!”
얼굴이 잔뜩 붉어진 배달부는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나는 양손에 일회용 용기에 담긴 자장면 그릇 두 개를 든 채로 순식간에 사라진 배달부를 떠올리며 웃었다.
하긴 나라도 배달부 입장이었으면 저랬겠네.
리온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에 눈을 빛내며 탕수육 그릇을 집어 들곤 거실로 향했다. 둘이서 들기에 용기가 좀 많기는 했지만, 나한테는 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나머지 그릇들을 전부 머리카락으로 집어든 채로 거실로 들어와 임시로 펼쳐둔 상 위에 올려놓았다.
“애들아~! 밥 먹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고나서 다시 연락 마저 돌려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