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epilogue: 듀라한이 되어버렸다.
* * *
“으, 너무 떨리는데...”
나는 처음 입어본 고급스러운 여성용 정장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기밀관리본부에서 입으라고 보내준 거라 어쩔 수 없이 입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영원히 장롱 구석에 처박히지 않을까,
나는 편한 박스티에 돌핀팬츠가 편하다고. 이런 새로 산지 얼마 안 된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빳빳한 정장보다는 말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며칠 동안 연습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요...”
이번 발표를 위해 꽤 혹독한 레슨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본방 직전에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별과제 발표 이후로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처음이라고. 인터넷 방송은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까 괜찮지만 사람들, 그것도 오만가지 잡스러운 걸 기사에 싣는 기자들 앞에서 하는 발표라 긴장할 수밖에 없어!
뭐 하나 실수하면 그대로 박제된다고!
‘A’했다가 그대로 놀림거리가 되면 어떡해!
“준비 다 되셨습니까!”
“네!”
대기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날 데리러 온 건가.
“잘 다녀오십시오.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난 방구석 여포라 방 밖으로 나가면 쭈구리가 되는데. 슬프지만 말이야.
“후...”
난 모르겠다. 조지면 조진대로 방구석에 처박혀서 질질 짜면 되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입니다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은하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 바닥에서 나름 짬밥좀 먹은 은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수틀리면 방구석에 박혀서 방송만으로 먹고 사는 거야. 새로 장만한 집에서!
어차피 방송만으로도 평생 먹고 살만한 돈을 벌 수 있으니, 외부 이미지 좀 조져졌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냥 좀 슬플 뿐이지.
“...자, 자 따, 따, 따라오세요.”
나를 안내하러온 남성은 내 얼굴을 보고는 홍당무 마냥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곤 조급한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실은 이곳에서 2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거리에 있었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곳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확히는 보조 역할에 가깝긴 하지만, 내가 이젠 공인이 되다니, 세상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다니는 평범한 샐러리맨 그 자체였는데. 세상일이라는 건 정말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맞는 말이야.
하루아침에 미소녀가 되고, 듀라한이 되고,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고, 이제는 변이자들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기자들과 회견을 하게 되다니. 내가 변이자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라쿤 박사님 말마따나 나보다 기밀관리본부랑 긴밀한 관계를 가진 변이자가 없고, 그 누구보다 변이자라는 존재를 잘 보여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단다. 아름다운 외모로 플러스 점수를 따기 좋은 것은 덤이고. 그래서 내가 이 기자회견에 변이자 대표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에 변이자들의 대량발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이상 숨기지 못할 정도로 변이자의 존재가 사회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아마 좀 더 오래 비밀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내가 이런데 불려나올 이유도 없고.
“드, 들어가시면 됩니다.”
얼굴은 젠틀하게 생기신 분이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지셨을까. 나는 아마도 공무원일 남자에게 살포시 웃어주고는, 회견장으로 들어섰다.
아 눈부셔. 회견장에 들어선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수많은 플래시 라이트 들이었다. 누가 기자들 아니랄까봐 존재감 어필 열심히 하시네. 근데 몇 번을 찍는 거냐.
나는 긴장으로 얼룩진 마음을 다잡으며, 대통령 대변인의 안내를 받아 발언대 앞에 섰다. 수많은 기자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감탄, 경외, 질투, 기쁨, 환희...수많은 감정이 내 앞에서 휘몰아친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라고? 나는 대기실에서 죽어라 외웠던 대본을 떠올렸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유진아, 말해야지!”
나는 세연이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후, 대형사고 낼 뻔했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대본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자리에 변이자들을 대표하여 서게 된 이유진이라고 합니다. 제가 변이자들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는...”
나는 계속해서 대본의 내용을 떠올려가며 대사를 읊었다. 조금 어색하지만, 민간인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정도로 말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한테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는 처음부터 무리라고.
“...이상입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기나긴 연설이 끝나고, 질문타임이 다가왔다. 사실 그냥 내보내 줬으면 하지만, 기자들은 먹잇감을 찾은 맹수들 마냥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특종거리를 그냥 놓칠 생각은 없다는 거구나.
결국 나는 기자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나는 기자들 중에 가장 젊어 보이는 기자를 지목했다. 그 기자는 내가 지목하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이유진양, 외관상으로는 화려한 머리색 외에는 특별한 점은 없어 보이는 데, 어떤 종류의 변이자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 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낫겠네요.”
나는 조용히 목과 머리를 묶고 있던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기자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머리카락을 목에서 완전히 풀어내고, 평소처럼 조용히 헬멧을 잡듯이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머리를 목에서 떼어내 단상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머리를 발언대 위에 올려놓은 순간, 회견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서와, 듀라한은 처음이지?
“...어.”
나에게 질문을 던진 기자는 얼빠진 모습으로 내 머리와 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멍청한 얼굴이네. 침묵은 1분 정도 이어졌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기자들이라도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사람은 한 번도 본적이 없을 걸?
“노, 놀랍군요.”
1분만의 침묵을 깬 발언이었다.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기자는 겨우 표정을 수습하곤,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그, 그럼 이유진양. 다음 질문입니다. 현재 변이자들의 숫자는 약 1만명으로 매우 적은 수입니다만, 이유진양의 사례로 생각했을 때, 변이자들을 사회가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사회에...잘 섞일 수 있냐라.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기다려 왔던 질문일지도 몰랐다.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저는 변이자들 중에서도 전세계에서 유일한 사례입니다. 저처럼 생물학적인 인간의 구조를 무시하는 변이자는 저 하나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선이 따갑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는 것을 보니 좀 더 자유롭게 말해도 되는 거겠지. 나는 솔직한 심정을 담아서, 말을 이어갔다.
“제 사례는 변이자들에게 큰 의미가 없을 겁니다. 아직까진 유일무이한 사례니까요. 하지만 반년 동안 변이자로서 살아오면서 느낀 건...바뀐 건 겉모습 뿐이고, 결국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겁니다. 저희가 피부색에 따라 인종을 나누지만 결국 같은 인간이듯이, 변이자도 모습이 달라졌을 뿐인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니, 저는 사회가 충분히 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이자라고 하지만, 결국 인간이다. 아무리 외형이 인간과 멀어졌다고는 해서 그게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는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본질을 완전히 망각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인간이다.
“그렇군요.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유진양은 변이자가 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회견에서 이런 것도 물어보나? 처음이니 잘 모르겠네. 제대로 본 적도 없고. 그래도 대답은 해야겠지.
나는 잠시 마음속으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합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유도 없이요. 어느 날 갑자기 속 알맹이만 같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한 겁니다. 저는 어느 날 갑자기, 그레고르 처럼 자고 일어나니 듀라한이 되어버렸습니다.”
인생이란 건 정말 한치 앞도 모른다.
중소기업 사원이었던 나는 듀라한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처녀귀신과 친구를 먹고, 유령마를 기르고, 딸이 생기고, 알고 보니 한 여신의 환생이고, 세상을 구했다. 하나만 있어도 헛소리라 생각할만한 일들이 반년동안 내 삶에 스며들었고, 나는 내 자신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많이 당혹스러웠지만, 제 내면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여전히 이유진이구나, 하고.”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그게 상상도 못할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인간은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동물이니까. 하지만 인생에는 언제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게 인생이니까.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까지나 저는 저에요.”
그래, 나는 듀라한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이유진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듀라한이고, 이유진이며, 인간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하겠어?
나는 머리를 다시 목에 갖다 붙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