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191.신화에는 끝이 존재하는 법(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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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이 다시 한 번 번쩍였다.
맞지 않더라도 바로 앞에서 밝게 빛나는 빛줄기를 보는 것은 플래시 라이트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눈을 반쯤 뜬 상태로 제우스를 노려보았다.
이성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우스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더라고 상대는 수천 년을 살아온 신들의 수장이다. 나와는 경험치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이렇게 싸움을 질질 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아마 그가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지 않았다면 진작 용아저씨 꼴이 났을 게 뻔했다. 내가 싸움을 배운 건 기껏해야 군대에서 휴가 따려고 태권도 1단 연습한 것 밖에 없단 말이다!
“건방진 년! 어서 몸을 바치지 못할까!”
“시끄러! 나이도 처먹을 만큼 처먹은 할배가 여자만 밝혀서는!”
말 한번 소름 돋게 하네. 하필이면 저런 놈이 최고신이라니, 타락이니 뭐니 해도 애초에 타락할 거리도 없는 놈이었잖아. 나는 몸을 숙여 천둥을 피하면서 생각했다.
거리가 좁혀지질 않아.
몇 초마다 날아오는 번개는 너무나도 위협적이었고, 제우스는 노련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히게 놔두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의 돌격을 노련한 움직임으로 피한 제우스는 이내 돌진을 하려고만 하면 번개를 던져 내 돌진을 사전에 차단했다.
이대로 가면 내 쪽이 불리했다. 저 망할 신이 이성을 찾는다면 내 승기는 거의 제로에 수렴할 테니까. 아득할 정도의 경험 차이를 제우스가 이성을 잃으면서 겨우 좁힌 게 지금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금 천둥을 손에 모으며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제우스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200미터,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지만 제우스라고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우스는 그 큰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구름위에 서 있으니, 저 구름을 어떻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내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무기는 이 작살 하나 뿐이었다.
던질 수 있는 기회는 딱 한번 뿐이었다. 맨몸으로는 보기만 해도 조각 같은 근육이 온몸을 뒤덮은 제우스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못할 것은 확실했다. 내 신체능력이 탈 인간 수준이기는 해도, 그게 진짜 신에게 먹힐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제우스에게 한방 먹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이 싸움은 서로 한 번의 유효타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싸움이었기에, 한순간의 방심만 일으킬 수 있다면 내가 이길 수 있었다.
한번만...한번만 접근할 수 있다면...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 불현 듯 작전이 떠올랐다. 위험부담이 정말 큰 작전이었지만, 성공한다면 내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작전을 실행하기에 나는 이 작전이 정말 성공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실패하면 나도 무조건 죽는다.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작전을 망설임 없이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시간을 끌기만 해도 다른 신들이 지원을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이 기대어서 무작정 버티는 게 맞는 방법일까?
지금까지는 한 번도 맞지 않았지만, 한 번의 실수로 번개에 맞아버린다면? 제우스가 정신을 차리고 내가 아닌 다른 신들에게 시선을 돌린다면? 수많은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전부다 있을법한 가능성이었기에, 그 많고 많은 가능성들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기다려, 도망쳐, 그냥 버티기만 해. 도움을 요청해. 수많은 가능성들이 내 귀에 속삭였다. 아주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편한 방법은 많았다. 그저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된다. 기다리면 지원이 올 테고, 나는 버티다 그들과 함께 싸우든, 빠지든 하면 된다. 나는 이 전쟁의 당사자이기도 했지만, 피해자이기도 했다. 전장을 호령하는 장군마냥 전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었다.
내가 이 싸움에서 도망친다고 해서 나를 욕할 사람은 없었다. 나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니까. 소시민에게 전쟁이란 갑작스레 들이닥친 폭풍이나 다름없어서, 그저 폭풍이 나를, 내 주변을 휩쓸며 지나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는 싸움이라면 진작 떠넘겼겠지. 하지만 난 이 싸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스스로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든, 결국 똑같이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도망치면 다음 표적은 저승사자들과 저 신일 테고, 경계가 무너지면 그때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다칠 테니까.
나는 작살을 고쳐 쥐었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선택의 시간은 짧았다. 승리할 방법이 있다면, 위험하더라도 뛰어들어야만 했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게 이 싸움의 정해진 결말이었다.
“에포나, 내 말 잘 들어. 저 번개 맞아도 버틸 수 있니? 한 번만, 한 번만 버티면 돼.”
“할 수 있어! 난 주인님의 유령마니까!”
“잘 들어. 최대한 저 번개를 뚫고 바로 앞까지만 가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나는 온몸에 힘을 주고 마지막 도박수를 준비했다. 에포나는 내 행동에 호응하듯 점점 속도를 높이며 제우스의 주변을 크게 선회하더니, 급발진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에포나의 등받이에 발을 올려놓고 머리카락을 에포나의 몸에 살며시 묶어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어림없다!”
제우스는 가까이 다가온 나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번개를 피할 수 없는 위치다.
번개가 날아온다. 기회는 한번뿐, 나는 제우스의 손이 휘둘러지는 것과 동시에 에포나의 등을 밞고 뛰어올랐다. 전력을 다해 뛴 점프였기에, 나는 천둥이 아슬아슬하게 내 운동화 밑창이 타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운동화 밑창이 고무라서 다행이야. 절연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전깃줄에 걸린 새처럼 감전되었을 테니까.
발바닥이 뜨겁다.
제우스의 놀란 얼굴을 보며 나는 내 작전이 충분히 먹혀 들어갔음을 직감했다. 작전이 성공했다면, 내가 할 행동은 단 하나였다.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건방진 년이! 네 년의 힘을 빼앗고 나면, 그 죄를 물어 타르타로스에 가둬 주마!”
전력으로 찔러 들어가는 창이 제우스의 얼굴을 향해 쏘아진다. 바로 코앞이었다. 채 2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공격이 빗나갈 리가 없었다.
“이런 얕은 수로 나에게 해를 입히려 하다니!”
내 손목은 어느 샌가 제우스의 손에 잡혀있었다. 창은 제우스의 미간에서 불과 미세한 거리를 남겨두고 붙들려 있었다. 나는 곧 이어 제우스에게 목을 붙잡혀 들어 올려졌다.
“네년의 힘은 잘 쓰도록 하지! 이 제우스님을 위해서 말이다!”
위기였다.
...하지만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내가 진짜로 실행하려고 했었던 작전. 그 작전을 위해선 제우스가 나를 붙잡아야만 했다. 나는 제우스에게 목을 잡힌 채로, 그를 비웃었다. 내 비웃음이 거슬렸던 건지, 제우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야, 금발 양아치. 너 그거 아냐?”
“이제 와서 용서를 빌어본들 소용없다!”
그럴 생각은 없어. 이 늙다리야.
용서는 니가 빌어야지!
“나 듀라한이야 이 새끼야!”
나는 곧장 목과 머리를 고정시키던 머리카락의 힘을 풀고 머리를 분리시켰다.
머리카락을 스프링처럼 사용해 머리를 목에서 완전히 분리시킨 나는 머리카락을 늘려 제우스의 온 몸을 휘감고, 허리춤에서 흙이 든 주머니를 집어 들어 경악한 얼굴로 내 머리를 쳐다보는 제우스의 얼굴에 흙을 쏟아냈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이이이이이이!”
“죽어! 죽으라고 이 새끼야!”
나는 제우스가 내 몸을 집어던지고 얼굴을 붙잡으며 비틀거렸다.
나는 잽싸게 제우스의 손에 매달려 있던 몸을 머리카락으로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곤 제우스와 연결된 머리카락을 줄여 내 몸을 다시 제우스에게 접근시켰다. 얼굴에 흙을 뒤집어 쓴 제우스는 얼굴이 실시간으로 녹아내리고 있었기에 내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안돼에에에에에에에! 이렇게 죽을 수는...”
내 손에 들린 작살이 제우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리고 제우스의 몸 곳곳에 가시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나와 제우스의 몸이 뜨거운 피로 물들었다. 신의 피도 뜨겁기는 매한가지구나.
제우스는 차마 말로 꺼내기 어려운 흉측한 몰골로 축 늘어졌다. 완벽하게 숨통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내 승리였다.
그리고 이제...
“에포나아아아아!”
“주인니이이이임!”
나는 아슬아슬하게 에포나의 등 위에 다시 안착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졸지에 논개가 될 뻔했네. 휴.
나는 땅바닥에 처박히는 제우스의 몸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젠 모두 끝이었다. 다른 신들은 제우스가 죽은 탓인지, 아니면 영문 모를 이유로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것인지 모두 무기를 놓고 사라져버린 제우스의 시체가 있던 곳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믿기지 않는 승리.
믿기지 않는 패배.
승리는 나의 몫이었다.
나는 에포나를 타고 공중에서 내려와 경계 바로 앞에 내렸다. 발바닥이 따갑네. 집에 돌아가면 약이라도 발라야지.
“해냈군요!”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기쁜 얼굴로 내 손을 붙잡고 정신없이 흔들었다.
“...우리들의 승리로군.”
빛나는 검을 들고 있던 신이었다.
이긴건가...?
승리의 기쁨 보다는, 그저 얼떨떨했다.
직접 겪었음에도, 믿겨지지 않는 승리였으니까.
“수고했어요. 마하...아니 유진씨. 당신은 저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서, 이 세상을 구했어요.”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는 좀 그래...”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그대는 그럴만한 일을 했으니.”
이름 모를 신이었다.
“신들의 시대였다면 새로운 신화의 시작이었겠지만...이 세계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시대였으니 그저 우리들만 아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헤카테는 어딘가 아쉬운 기색으로 말했다. 나는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 아니 듀라한으로 살아가고 싶으니까.
평소처럼 방송하고, 맛있는 거 해먹고, 때로는 어딘가로 놀러 가고. 그렇게 소소한 일상을 보내며 살고 싶다.
그러니까 이 일은 우리들만 알고 있으면 돼.
“자, 돌아가요.”
내가 껄끄러워 하는 것을 눈치 챈 건지, 마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붙잡았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