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190.신화에는 끝이 존재하는 법(7)
* * *
“...이런...!”
제우스는 갑작스레 몸이 무거워지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서, 불길한 붉은빛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다. 제우스는 직감적으로 저 마법진이 그에게, 그리고 신들에게 좋지 않은 것임을 직감했다.
“처음 보는 마법진이군.”
저 뒤편에서 붉게 빛나는 마법진을 본 크롬 크루아하의 감상이었다. 그가 마법에 정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오랜 세월을 존재해 왔기에 웬만한 마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처음 보는 마법이라는 건, 새롭게 만들어진 마법이라는 거겠지.
크롬 크루아하는 마법을 막아야 하나 고민하다, 눈앞의 제우스를 상대하기로 했다. 제우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아하니 딱히 제우스에게 이득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이기도 했다.
“힘이...빠져나가다니!”
제우스는 경악하며 힘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정기를 한데 뭉치려 했다, 하지만 제우스의 시도가 허망하게도 밑 빠진 독처럼 정기는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정기를 채워줘야 할 비석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전쟁에서 최고신이 도망쳤다간 그의 무소불위를 자랑하는 권력에 흠집이 감은 물론이고, 적을 두고 도망친다면 그의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질 터였다. 제우스는 그런 상황을 절대 허락할 수 가 없었다.
권력에 대한 집념으로 살아온 제우스에게 권력을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승리자여야 했고, 최고의 신이어야 했다.
정기가 흘러나간다면, 다시 채우면 그만이었다.
제우스는 평소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선택지에 손을 뻗었다.
“헤르메스!”
“무슨 일이신가요 아버...!!!!”
그의 부름에 잽싸게 날아온 헤르메스는 돌연 그의 목을 한손으로 잡아채 조르기 시작하는 제우스의 행동에 눈을 부릅뜨고 제우스를 쳐다보았다. 제우스는 악귀와도 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헤르메스를 쳐다보았다. 헤르메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올림푸스의 최고신이다.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는 없다!”
제우스는 헤르메스의 정기를 뽑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들의 안위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잔혹한 행동이었다.
헤르메스의 정기를 전부 흡수한 제우스는 모든 정기를 잃어 가사상태에 빠져버린 헤르메스를 집어던졌다. 헤르메스의 몸이 땅바닥을 굴러 피를 뿜어냈다. 신의 힘을 잃어버렸기에 그의 몸은 쇠약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헤르메스는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완전히 돌았군! 어떻게 자기 아들을!”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제우스의 행동을 보고 경악한 하데스와 포세이돈도 그를 말리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순식간에 모든 힘을 빼앗기도 땅으로 추락했다. 이성을 잃었어도 최고신답게 둘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충분할 만큼 힘을 얻었음에도, 제우스는 만족하지 못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에 땅위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신들이 보였다. 이제 그 신들이 자신의 아군이었다는 사실은 제우스의 머릿속에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부족하군...부족해.”
“...완전히 미쳐버렸군.”
크롬 크루아하는 미쳐버린 제우스의 행동에 혀를 찼다. 제우스는 반쯤 까뒤집은 눈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다가, 그의 근처에서 싸우고 있는 신을 발견했다. 제우스는 마치 천둥이 번쩍이는 듯 한 속도로 그 신에게 다가가 정기를 흡수했다.
이젠 절제 없이 닥치는 대로 정기를 흡수하는 제우스의 모습에 크롬 크루아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최고신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추한 행동이었다.
크루아하는 제우스가 알아서 같은 편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니 꽤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그의 힘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그래도 너무 많은 힘을 흡수하기 전에 제압해야겠군.”
크루아하는 입에 불을 머금고는 제우스를 향해 날아갔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제압이 가능할 거라고 크루아하는 생각했다. 지금의 제우스는 빈틈 투성이였으니까. 크루아하는 제우스를 향해 다시금 브레스를 내뿜었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수십 명이나 되는 신의 힘을 흡수한 제우스는 그의 예상보다 더 강력해져 있었다. 크루아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수 천 년만의 전투였기에 감이 무뎌져 있었던 탓이었다. 곧이어 그의 몸을 그의 몸집만한 빛의 기둥이 꿰뚫었다.
...개판이네.
전장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분명 같은 편인 것 같은 놈들끼리 갑자기 쌈박질을 하더니, 이제는 갑자기 픽픽 쓰러지더니 잠들어 버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인님! 힘이 없나봐!”
“그런 건가...”
나는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신들의 위에 흙을 뿌렸다. 쓰러진 신들은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대지에 녹아들었다. 뭐야 이거. 도대체 뭔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나는 에포나 위에 탄 채로 전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장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저승사자들도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서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이송 중이었고, 다른 신들도 숨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빨빨거리며 돌아다닌 덕에 신들의 숫자가 많이 줄은 것도 있지만, 갑자기 서로 싸우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왜 지들끼리 싸우는 건데.
나는 계속 이렇게 신들을 하나하나 땅으로 돌려보내면 되는 건가? 그러면 일이 좀 쉽게 돌아가겠...
쿵!
땅을 흔드는 진동에 나는 기겁하며 원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용아저씨가...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격추 당한 모양이었다.
“네년의 힘도 빼앗으면...나는 신들의 정점이 되리라!”
“에포나! 달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포나는 급발진해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서있었던 자리에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저게 천둥이라고? 저 정도면 그냥 에너지포를 쏘는 거랑 차이가 없잖아!
심지어 보약이라도 잡수셨는지 빛의 기둥은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쳐서 연속으로 꽃히지까지 했다. 조금만 느렸으면 난 지금쯤 저 빛기둥을 맞고 산화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늘에서 나를 향해 번개를 연거푸 던져대는 제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랑은 인상이 좀 다른데. 눈이 맛이 갔잖아.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는지, 목소리도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도망갈 수 있을...까? 나는 경계 쪽을 곁눈질 했다.
아직 이송도 끝나지 않았고, 어수선해진 상황이라고는 하나 전장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지원군을 기다리기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고, 나도 도망치면 이 미친 신이 그대로 경계 쪽으로 달려가겠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에포나, 지그재그로 달리면서 최대한 경계에서 멀어질 거야. 알았지?”
“응! 맡겨줘 주인님!”
에포나는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마치 레이싱카가 전력으로 달리는 듯 한 속도에 나는 다리로 에포나의 몸통에 몸을 고정시키고, 제우스를 향해 소리쳤다.
“야! 금발양아치! 여기야! 조루! 강간마! 할 줄 아는 거라곤 여자 후리는 것밖에 없는 놈!”
도발의 효과는 굉장했다! 멀리서도 금발 양아치, 아니 제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숙였다. 온 몸이 따갑다. 나는 내 몸을 스쳐지나간 천둥에 기겁하며 에포나를 재촉했다.
“빨리! 좀 더 빨리!”
“헤으응!”
“유진아! 조심해!”
나는 세연이의 말에 나는 몸을 숙이고 머리를 품에 안았다. 내 머리가 있었던 자리에 빛의 기둥이 지나갔다.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끝장이라는 점이 내 공포심을 자극했다.
무서워.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도망가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미끼역할을 포기하고 도망친다면, 천둥은 내가 아닌 저승사자들과 경계를 지키는 신들에게 향하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제우스가 힘을 다 소진할 때까지 버티던가, 아니면 쓰러트리거나. 나는 천둥이 꽂히거나 스쳐지나간 땅을 떠올렸다. 제우스가 얼마나 더 천둥을 던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언제 나한테서 관심을 끌지는 알 수 없었다.
미끼가 되기 위해서는 도망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떠올렸다.
나는 지옥참마도를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작살로 변형시켰다. 오른손에는 작살을 든 채로, 나는 주머니에서 흙을 꺼내 작살에 골고루 묻혔다. 흙 특유의 축축하고 까끌까끌한 감촉이 불쾌했지만, 이게 내 비장의 수단이었다.
“에포나, 다시 날 수 있지?”
“응!”
“그러면 하나 둘 셋 하면 다시 나는 거야. 그리고 제우스 저 놈한테 돌격하는 거야.알았지?”
회피는 에포나에게 일임하고, 나는 제우스를 직접 노린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나는 주머니를 허리춤에 다시 걸고 작살을 고쳐 잡았다.
둘.
심호흡을 하며 거칠게 뛰는 심장을 고요히 가라앉힌다.
셋!
“에포나!돌겨어어어억!”
에포나가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나는 에포나의 방향을 틀어 제우스를 향해 작살을 들고 돌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