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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212화 (212/352)

〈 212화 〉 189.신화에는 끝이 존재하는 법(6)

* * *

“...화려하군.”

“이게 네 글자만으로 끝날 만한 감상이야?”

짤막하고 무미건조한 포모르의 감상에 테테는 딴죽을 걸었다. 아레스가 결투에서 패배한 후에, 반란군은 만신전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아레스의 패배로 위병들이 전부 항복했기에 그들이 입은 피해는 포모르를 제외하면 아예 없는 수준이었다.

반란군은 아레스를 쇠사슬로 포박해 만신전 입구를 받치는 기둥에 묶어두고 감시자를 붙였다. 아레스가 입은 상처는 상당히 위험한 상처였지만, 신이라는 족속을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었기에 베네딕틴이 내린 판단이었다.

그렇게 아레스와 위병들을 제압한 반란군들은 만신전 내부에 들어서며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반란군에게 만신전은 미지의 공간이자, 그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공간이었다.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건물을 장식한 황금과 값비싼 보석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길, 코끼리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문.

“이 정도면 여기 기둥 하나만 팔아먹어도 평생 놀고먹을 돈이 생기겠는데?”

테테는 반짝이는 눈으로 만신전의 로비를 받치는 기둥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반란군들도 테테와 비슷한 감상이었다. 뒷골목의 주민치고 부유하게 산 사람이 거의 없었던 탓에, 반란군들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만신전 내부를 감상했다.

몇몇은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우리가 뒷골목에서 죽기살기로 버티는 동안 신들은 이런 곳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단 말이지? 분노한 반란군들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만신전의 물건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베네딕틴의 명령을 떠올리곤 건드리지 않았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장식이 넘치는 만신전이지만, 무언가 수작을 부려놓았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뒷골목 출신들은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일에 민감했기 때문에, 베네딕틴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너무 넓군.”

“예전에 듣기로는 만신전이 거의 작은 마을 수준으로 크기라던데? 후, 이런 곳에서 물건을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메티스 여신님의 말에 의하면 만신전의 가운데에 있는 광장에 신들이 정기를 모아놓는 돌이 있다고 하더군.”

포모르는 메티스 여신이 떠나기 전 일러둔 말을 떠올렸다. 그와 베네딕틴을 불러 조용히 일러둔 말이었다.

‘신들의 정기 공급을 도와주는 장치가 광장 한 가운데에 존재하니, 파괴하거라. 그것만 파괴한다면, 신들은 더 이상 정기를 공급받을 수 없어 제 힘을 내지 못한단다.’

그렇기에 포모르는 온갖 사치품들이 나열되어 있는 복도에도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스승이 간절하게 바란 소원이 저 앞에 있었다. 포모르는 저도 모르게 벅차오르는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의 스승이, 그가 바래왔던 이 세계의 재생이 머지않았다. 테테는 사치품들을 구경하며 눈을 빛내다, 포모르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자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사치품들은 충분히 눈을 즐겁게 했지만, 테테는 포모르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궁금했다.

그를 따라가면 진귀한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테테는 직감했다. 나름대로 뒷골목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다져진 감이었다.

“포모르, 어디로 가?”

“...광장으로 간다. 그곳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말하곤, 포모르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그의 당당하면서도 절도 있는 걸음에, 사치품과 장식에 정신이 팔려있던 반란군들이 정신을 차리고 그의 뒤에 하나 둘 따라붙었다.

아레스와의 일기토에서 승리한 그는 반란군들의 우상이자 영웅,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그들을 위해 신들과 싸워 이긴 영웅, 한때 대륙을 호령했다던 제국의 후계자, 용맹하고 정의로운 전사!

반란군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산만하게 흩어져있던 반란군들은 어느 샌가 대열을 갖추고 포모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일찍이 꽉 찬 적이 없었던 만신전이 인파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저 돌이로군.”

광장에 도착한 포모르는 새하얀 돌과 푸르른 덤불이 가득한 광장의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비석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인간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썩 돌아가지 못할까!”

3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포모르에게 들려왔다. 포모르는 등에 맨 창의 창대에 손을 얹은 채,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했다.

하늘하늘거리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보기만 해도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여신인가.’

이곳엔 신들과 소수의 인간 시종들만이 살기에 나올 수 있는 추측이었다. 그리고 포모르의 추측을 확인시켜주듯, 붉은 옷의 귀부인은 노기가 서린 얼굴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 헤라의 이름을 걸고, 건방진 인간 놈들에게 저주를 내리겠노라! 저주에 걸리고 싶지 않다면 당장 돌아가라! 그렇다면 저주에 걸려 죽지는 않게 될 테니.”

헤라의 외침에, 반란군들이 주춤했다. 아무리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 기세등등한 상황이라지만, 신들의 저주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들의 걸음이 전부 멈춰 섰다.

규칙적인 발소리가 울려 퍼지던 광장은 이제 침묵으로 가득 찼다. 포모르는 그를 노기를 띈 시선으로 노려보는 헤라를 쳐다보다 다시 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멈춰 섰던 포모르의 선택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가 앞으로 발을 내딛자, 망설이던 반란군들도 다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저주가 두렵지 않느냐! 당장 네놈들에게 저주를­”

“할 수 있다면 해봐라. 기꺼이 당해주도록 하지.”

포모르의 발언에, 헤라는 미친놈을 보듯 포모르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남자는 신들 앞에서 왜 저리 당당할 수 있는지 헤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경외감이 서려 있었으므로.

헤라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헤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들도. 그들에게 인간은 그저 부려먹기 좋은 노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헤라는 당장이라도 포모르에게 저주를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모르에게 저주를 내릴 수 없었다. 그녀에게 할당된 정기는 저주를 내리면 더 이상 육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포모르는 멍하니 서있는 헤라의 옆을 지나쳐 비석 앞에 서서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푸른빛을 머금고 있는 비석은 일견 성스러워 보이기도, 혐오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이게 이 대륙의 정기를 빼앗아간다는 그 돌인가. 포모르는 등애 맨 창을 집어 들었다.

“네 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그 비석을 파괴하면­”

헤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모르는 온몸의 무게를 실어낸 일격을 비석 아랫부분에 꽂았다. 비석을 파고들어간 창날에 헤라는 기겁하며 포모르를 붙잡아서라도 멈추려고 했지만, 그녀의 어깨를 잡는 손길에 헤라는 포모르를 막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어깨를 잡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테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니?”

“어머니, 이제 저희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아테나의 선언에, 헤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헤라는 아테나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업었다.

끝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헤라는, 그리고 숨어서 사태를 지켜보던 신들은 아테나의 말에 납득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해 줄 수 있겠니?”

여신들, 그중에서도 온화한 성격을 가진 헤스티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타나 아테나에게 물었다. 이곳에 남아있는 신들 전부를 대변하는 질문이었다.

“저희는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 있었습니다. 저희가 살아있을 수 있는 시간을 아득히 넘겨서 말이에요. 그 탓에 이 대륙은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고, 이 세계의 미래는 망가져 버렸어요. 저희가 붙잡고 있었던 이 세계를 이젠 이 세계의 주인들에게 돌려줄 때가 온 겁니다.”

“...어차피 우리가 저 세계에 돌아가면 이 땅의 것들은 모두 저들의 것이 되잖니?”

“정말 그럴까요?”

헤스티아는 대답하지 못하곤 말없이 눈을 감았다. 당연히 그러지 않을 것이다. 헤스티아 같은 소수의 선량한 신들은 어쨋든, 다른 신들은 이곳의 정기를 남김없이 쓸어갈 테니까. 그들에게 이 세계의 멸망 따위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헤스티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세계가 저희에게 베풀었으니, 저희들도 마땅히 이 땅에 받은 것을 돌려줘야 겠죠.”

“이렇게 한다고 이세상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니? 그렇게 한다 해도­”

“그건 인간들의 몫입니다.”

헤라의 말을 끊은 아테나는 포모르의 계속된 창질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하는 비석을 쳐다보았다. 저 안에 갇힌 정기가 모두 풀리면 이 세계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리라.

아테나는 불현 듯 떠오른 아주 오래전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판도라.

신들에게 온갖 선물을 받은 소녀는 호기심에 열어서는 안될 상자를 열었다. 온갖 재앙이 상자를 빠져나와 세상에 혼란을 일으켰고, 판도라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희망을 상자 안에 다시 가두어 놓았다.

희망이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살아갈 힘이 되도록.

저 비석은 판도라의 상자나 다름없었으리라. 인간들의 희망은 저 커다란 비석 안에 갇혀 있었을 테니.

아테나는 무너져 내리는 비석을 보며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벗어던졌기에 가능한 미소였다.

그녀는 점점 힘이 빠져가는 몸을 힙겹게 움직여 광장 한 켠에 심어놓은 올리브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그녀가 막 이 세계에 이주해 만신전을 지었을 때 심은 나무였다. 아테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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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했구나. 너희들이 해낼거라고 믿고 있었단다...”

메티스는 자신의 피로 그려낸 마법진 가운데에 주저 앉아 중얼거렸다. 세계의 모든 정기를 끌어모으던 비석과 연결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 늦기 전에, 마지막 일을 끝마쳐야 했다.

마지막 마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하고, 화려하고, 강력하리라. 메티스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단검을 꺼내들고, 힘이 빠져나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심장에 단검을 꽂았다.

그녀의 심장에 단검이 꽂힘과 동시에,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세계와 세계를 분리하는, 적절한 제물을 찾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마법이었다.

그 제물이 신이었기에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마법이.

‘마지막으로 아테나의 얼굴이 보고 싶었는데.’

메티스는 점점 흐려지는 시선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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