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186.신화에는 끝이 존재하는 법(3)
* * *
첫 공격은 급소인 심장이었다.
포모르는 거침없이 아레스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구경꾼들도 감탄할 법한, 신속하고 절도있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바로 신이었다.
그것도 전쟁의 신. 아레스는 코웃음을 치며 포모르의 공격을 가볍게 검으로 흘려냈다.
포모르는 여유 만만한 아레스의 모습에 이를 갈며,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몸을 튕겨 거리를 벌렸다.
“꽤 날카로운 동작이군. 아주 아까운 재주야.”
“...”
포모르는 말없이 검을 고쳐 잡았다. 아레스 입장에서는 단순이 공격을 흘려낸 것뿐이었지만, 포모르의 손에는 적지 않은 충격이 전해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포모르는 아레스가 여전히 공격할 생각이 없자, 다시 한 번 아레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소극적인 공격이었다. 본격적으로 싸우기에 앞서 상대의 실력과 버릇, 약점을 파악하는 것은 일기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검과 검이 부딪히는 원초적인 전투라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매우 컸다.
아레스는 한손으로 포모르의 검격을 모두 쳐냈다. 포모르의 검격은 하나하나가 매섭고 날카로워 사람이라면 받아낼 수 있는 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겠지만, 아레스는 썩어도 신이었다. 그것도 수천 년을 전장에서 구른.
지략이 모자라긴 했지만, 순수한 무력은 여느 신에게도 뒤지지 않는 신이었다. 단순무식하고 과하게 저돌적이지만 않았다면 제우스도 그거 총사령관에 앉히는 것을 고려했을 정도로.
“이길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이기길 바라는 것뿐이지.”
인파들 사이에 섞여 포모르와 아레스의 일기토를 지켜보던 테테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네딕틴은 테테의 말에 대답하며, 로브를 입고 인파 속에서 대결을 지켜보고 있는 아테나 여신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신과 인간의 대결을 지켜보며 가슴을 졸이는 사이, 수십 합을 오간 둘은 열기를 띈 시선을 교환했다. 두 열기의 의미는 달랐지만, 둘이 이 싸움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좋아! 오랜만에 만나는 전사로군! 요즘 전사라고 입을 나불대는 것들은 하나 같이 시시했단 말이지! 이젠 내 차례다!”
아레스는 결투를 하면서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포모르는 마치 거대한 맹수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덮치기 위해 몸을 숙이는 것처럼 보였다. 포모르는 본능적으로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들었다.
쾅!
검과 검이 부딪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소리가 투기장에 울려 퍼졌다. 포모르는 당장이라도 굽혀질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고 일격을 받아냈다. 아레스의 검은 그의 것보다 짧고 가벼웠지만, 포모르는 사자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흠! 꽤 버티는 군.”
더 이상 버티는 건 불가능 하다 생각한 포모르는 잽싸게 몸을 옆으로 굴러 검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갈 곳을 잃은 아레스의 검이 바닥에 매다 꽂혔다. 마치 젤리를 베는 것 마냥 땅을 반쯤 파고든 검을 본 포모르는 잽싸게 몸을 날려 아레스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전쟁의 신이라는 직책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아레스는 발로 포모르의 검면을 걷어차 튕겨내고, 땅에 박힌 검을 뽑아내 포모르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아레스의 괴력에 검이 걷어차인 탓에 자세가 무너진 포모르는 그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포모르는 최대한 몸을 틀어 검의 궤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가 늦게 들릴 정도의 속도로 날아오는 검격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바닥에 피가 튀었다.
결투를 시작한 이래 최초의 선혈이었다. 사람들은 숨 막힐 듯한 전투에서 처음 터져나온 피에 안타까움의 탄성을 흘렸다.
포모르는 어깨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며 아레스에게서 멀어졌다. 다행히도 갑옷으로 둘러싼 부위에 맞았기에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얕은 상처도 아니었기에 포모르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다행히도 상처가 깊지는 않았으니 어떻게든 팔을 쓸 수는 있었다.
아레스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포모르가 검을 고쳐잡고 다시 자세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알기에 나오는 여유였다. 아레스는 포모르의 검을 보곤 혀를 찼다.
검이 구부러졌군. 인간의 기술로 주조한 검이 신의 괴력을 계속해서 버텨낼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기에, 아레스는 군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검, 이젠 제대로 쓰지도 못하겠군. 여봐라! 누가 이자에게 새로운 무기를 건네주도록!”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웅성웅성 대기만 할뿐, 무기를 건네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죽는다면 싸워야 하는 것은 그들이었으니, 무기를 건네주는 것에 망설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라도 신과 맨몸으로 대적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도 무기를 건네주지 않자, 포모르는 검을 다시 아레스에게 겨누었다. 망가진 검이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때였다.
돌연 그의 앞에 은색의 창과 상체를 가릴 수 있는 둥그런 방패가 던져졌다. 포모르는 던져진 방향을 쳐다보았지만, 무기를 던져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힘내!”
테테의 목소리였다. 포모르는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잡았다. 포모르는 구부러져 버린 검을 뒤편에 던져놓았다.
포모르가 검을 허리춤에 걸어놓고 방패와 창을 집자, 그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벅지를 노리세요. 아레스의 약점은 허벅지입니다.’
포모르는 무기를 고쳐 쥐고, 다시 한 번 싸우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저것들은 귀신이다, 귀신이다, 세연이 친척이다...
아, 이건 아니지.
나는 필사적으로 내 뇌내에 최면을 걸며 지옥참마도를 군용 삽으로 바꿔 들고 다녔다. 내가 군 시절에 배수로 공사할 때 애용했던 물건이었다. 보통 삽이 더 많이 풀 순 있겠지만, 그건 너무 컸다.
나는 주머니 속의 흙을 퍼서 도망치는 신들에게 마구 잡이로 뿌렸다. 귀에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대략 열댓 명의 신들에게 삽으로 흙을 흩뿌렸을 즈음이었다.
“그 붉은 머리, 낯익은 색이로구나.”
“어...누구세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냐?”
제가 당연히 알 리가 없죠? 왠지 말을 계속 들어주면 밑도 끝도 없이 뭐라고 해댈 것 같은데. 나는 지원군을 부르기로 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전장에 나가기 전에 준비해둔 게 있었다.
“에포나! 몸통박치기!”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것이냐? 이 년...꾸엑!”
나는 에포나의 몸통박치기(WITH 오토바이)에 날아간 여신에게 흙을 뿌렸다. 이 짓도 계속 하다보니까 익숙해져서 할만 했다. 전장의 시끄러운 소리에 비명소리가 금세 묻히기도 했고.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앞으로도 한참 흙을 뿌려야 할 텐데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는 게 좋으니까 나쁠 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신들과 사고방식이 비슷해지는 것 같아 탈 인간화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급한 불부터 끌 때였다.
“에포나, 이리와.”
“나 잘했지?”
“그래그래. 그러니까 좀만 더 하자. 알았지?”
“알았어!”
“그럼 에포나, 저기 보이지?”
나는 손으로 멀리서 활을 쏘는 여신을 가리켰다. 저승사자 수십 명을 말 그대로 화살받이로 만든 여신이었다. 어떤 여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신은 혼자서 화살을 기관총마냥 쏴재끼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막아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신이나 저승사자가 해결하기엔 여유가 없었다. 당장 하늘에서 제우스로 보이는 금발 아저씨와 싸우는 용은 이쪽에 신경 써줄 여유가 없어 보이고, 빛나는 검을 든 신과 빛나는 창을 든 신은 경계를 부수기 위해 달려드는 신들을 막는 데에만 급급해 보였다.
“응!”
“저번에 보여줬던 거 기억하지?”
“응!”
“자, 그걸로 변신하렴.”
에포나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참 기묘하단 말이야. 나는 슬라임처럼 변해 점점 형태를 갖춰가는 에포나의 주변에서 다른 신들이 오지 못하게 흙을 던져대며 시간을 벌었다.
“변했어! 주인님! 헤으으으응!”
“와, 이게 되네.”
솔직히 영화에서나 나오던 거라서 정말로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공중에 살짝 떠 있는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승차감 좋고, 안정감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나는 에포나가 센스 있게 만들어 놓은 좌석 옆 수납함에 지옥참마도를 집어넣고, 손잡이를 잡았다.
“에포나! 달려! 목표는 저 실...아니 활잡이 여신이야!”
“아라써!”
에포나는 내 말이 들리자마자 매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계의 탈을 쓴 유령오토바이가 미친 듯 한 속도로 전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소리가 워낙 우렁찼던지라 신들이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신들을 죄다 무시하고 활을 든 여신을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
“으랴!”
아 이쪽 보지 말고 하던 일 하세요! 활 나한테 겨누지 마! 나는 몸 전체를 머리카락으로 감싼 채로 여신에게 돌격했다. 화살이 유일하게 보호하지 않은 내 머리를 노리고 쏟아졌지만, 애초에 내 머리는 보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아아, 이것은 듀라한이란 것이다.
나는 머리에 부딪힌 화살이 죄다 부러지는 것을 보며 당황하는 여신에게 오토바이를 몰고 코앞까지 도달했다.
아, 피했네...라고 할 줄 알았어?
“에포나! 드리프트!”
에포나는 레이싱 영화에서나 볼법한 화려한 드리프트로 180도 턴을 하며 다시 여신에게 달려들었다. 여신은 다시 한번 몸을 날려 피해냈지만,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나는 재빨리 수납함에서 지옥참마도(군용삽)을 꺼내 오토바이를 가까스로 피한 여신을 향해 휘둘렀다.
손에 느껴지는 충격과 함께, 피가 튀었다. 역시 오토바이의 가속도와 지옥참마도의 콜라보는 여신에게도 버거운 것이었는지, 머리를 얻어맞은 여신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땅을 굴렀다. 나는 곧바로 흙이든 주머니에서 흙을 뿌리기 위해 손을 집어넣었다.
“네년! 내 여동생을 건드리다니!”
“에포나! 다시 달려!”
왠지 일이 잘 풀린다 했어! 하늘에서 활 쏴대는 건 반칙 아니야? 저 망할 금발 양아치 새끼! 저 새끼 분명 아폴론일거야! 이 년은 그럼 아르테미스겠네!
아폴론의 화살은 정말 끝이 없었다. 이렇게 된거 제갈량 마냥 에포나를 배로 만들어서 화살 무한 루팅이라도 해봐? 아,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닌데.
그래도 신들의 어그로를 거하게 끈게 나름 우리 쪽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전장에서 부대끼던 신들은 대부분 나에게 다가오지 못했고, 좀 굵직한 신님들의 반 정도가 나를 잡으려고 하고 있으니 저승사자들은 숨통이 트였는지 다시 전열을 재정비 하며 방어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서 저 화살비는 어떻게 해야...아.
그러면 되겠구나.
“에포나, 다시 돌아가!”
“화살 쏘는데?”
“그냥 가!”
에포나는 180도 선회 다시 신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폴론은 내가 다시 달려오자 미친년 보듯이 눈을 부라리며 화살을 쏴재꼈지만, 신들의 화살로도 내 머리카락과 머리에 별다른 데미지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 입력된 후였다.
“화살 멈춰! 안 멈추면! 네 동생은 죽는다!”
“주인님 악당 같아!”
신경 쓰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내 머리카락에 묶여 고기방패가 된 아르테미스를 아폴론 쪽으로 내밀어 과시했다.
알지? 화살 쏘면 네 동생이 맞는 거야!
“유진아 그건 좀...”
세연아 너까지! 사람이 살려면 인질 좀 잡을 수 있지 왜 그래! 덕분에 지금 신들이 나 공격하던 거 다 멈췄잖아!
“이, 이런 비열한 년이...! 첩으로 삼아주려 했건만!”
...누가 그리스 신 아니랄까봐. 전쟁터에서 그런 생각하고 있었냐.
어쨌든 효과가 있으니 다행이네. 아르테미스 버리는 셈치고 계속 공격했으면 위험했다. 아무리 화살이 안통한다 쳐도 계속 맞다보면 다칠 수 도 있고, 다른 공격에 멀쩡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니까...
“주인님!”
야, 야! 왜 급발진해! 나는 갑작스레 달리는 에포나 떄문에 당황했지만, 내가 있던 자리에 떨어지는 천둥을 보며 에포나의 급발진을 납득했다.
“살다살다 내 딸을 인질로 잡는 여신이 나오다니, 나를 우습게 보는 모양이군.”
그냥 저기서 그 용이랑 싸우면 안 될까요? 용가리 아저씨는 어디가고 님이 여길 왜 와요? 보니까 용아저씨를 내버려두고 이쪽에 부리나케 달려온 것 같았다.
나는 저 하늘에서 나를 향해 천둥을 집어던진 제우스를 올려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건 진짜로 X된 것 같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