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183.폭풍전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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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용과 번개가 충돌했다. 신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듯 한 화려한 부딪힘을 보며, 제우스는 혀를 찼다. 번개에 직격 당했음에도 크롬 크루아하는 멀쩡했다. 단순한 공격으로는 그의 몸에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5분간의 싸움동안, 제우스와 크롬 크루아하는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제우스와 크롬 크루아하의 싸움은 어느 한쪽이 밀리는 일 없이 팽팽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힘 자체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제우스가 더 강하지만, 이곳은 세계의 경계, 영혼도 힘만 있다면 어느 정도 육체를 구현할 수 있었다.
켈트 신앙이 아직 융성하던 시절의 힘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반쯤 제약을 벗어던진 크롬 크루아하는 켈트의 최고신답게 노련하게 제우스를 상대로 맞서고 있었다.
제우스는 네 번이나 연달아 번개를 던졌지만, 번번히 공격이 실패하자 공격을 하는 대신 크루아하를 노려보았다.
“날파리 같은 녀석!”
“난봉꾼이 말이 많군.”
제우스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솟았다. 비록 사실이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거론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는 모욕적인 말에 화를 내며 번개를 손에 끌어 모아 창의 형태로 가공한 후, 집어던졌다. 이번에는 그를 향해서가 아닌, 경계 앞에서 검을 휘두르던 누아다를 향해서였다.
누아다는 갑작스레 날아온 번개에 몸을 굴려 가까스로 피해냈다. 하지만 번개의 무서운 점은 절연체로 이루어진 물체가 아닌 이상 물체를 타고 전류가 흐른다는 점이었다. 누아다는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달려든 신이 휘두른 검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주신이라는 자가 그런 행동을 할줄은 몰랐군.”
“때로는 명예보다 승리를 택해야 하는 법이네.”
제우스는 크루아하의 의표를 찌른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비아냥거렸다.
경계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두 세력의 전투는 하늘을 나는 크루아하를 제외하면 대치전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누아다와 루 라바다 두 신이 그와 함께 앞으로 나와 경계의 틈을 막아서고 있지만, 상대도 신이니,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선두에 선 북유럽 신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기에, 이대로 계속가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대로 계속한다면 말이다.
뿌리 세계 측의 신들도 이런 상황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치감치 지원군을 요청한 상태였다. 지원군들이 온다면, 적어도 북유럽 쪽 신들은 옴짝달싹 못하리라. 그들이 뿌리세계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게 했던 종말이 지원군에 합류했으니.
“겨우 저런 허수아비들로 우릴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제우스는 그의 압도적인 군세를 보여주며 으스댔다. 뿌리세계의 10명 남짓한 신과 2백여 명의 저승사자 따위와는 다르게, 수백이나 되는 신들의 군세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그들이 경계를 뚫는 것은 누가 보아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종말이 받아들이기 싫어 쥐새끼처럼 도망쳤던 놈들이 말이 많군.”
크롬 크루아하는 제우스의 도발에 넘어가기는커녕, 담담하게 그를 비웃으며 목구멍에서 불꽃을 모으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의 트레이드마크이자 필살기나 다름없는 브레스의 전조였다. 제우스는 그에 맞춰 번개를 손에 모으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메티스는 그녀의 옆에 누워 있는 가슴 한가운데 칼이 꽃힌 싸늘하게 식은 여신의 눈을 감겨주며 중얼거렸다. 여신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이 서려있었다.
“종말이 시작되었구나...스틱스. 미안하구나. 하지만 수천 년 동안 미뤄두었던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니 너무 원망하지는 말려무나.”
스틱스 강의 맹세를 증명할 여신 스틱스가 죽었으니, 이제 제우스의 맹세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메티스는 스틱스 여신의 시체를 마법으로 원래 세계의 황무지에 떨어트리고는, 전장으로 향했다.
미뤄두었던 종말을 위해 그녀의 지혜를 발휘할 시간이었다.
라쿤 박사의 선언을 시작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내 몫의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라쿤 박사의 발언을 경청했다.
“지금! 상황은! 폭풍전야! 나! 다름없네! 하늘에! 균열이! 관측되었네! 아직!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겠지만! 균열이! 더! 심해진다면! 일반인들도! 알게! 될 걸세!”
“...일반인들이 알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슴다. 그 부분은 각 나라에 맡길 수밖에 없슴다...전력적으로 우리 쪽이 열세라 현세까지 저희가 신경써줄 여력이 없슴다. 당장 잠들어 있던 신들까지 깨워서 합류시키는 상황임다.”
어찌되었든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는 거네. 지금까지는 잘 숨겨왔지만, 이제 절대 숨길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는 거구나. 일이 잘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일이 꼬인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혼란이 발생할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지금 지구촌이 전염병 하나에 박살이 나고 있는 상황이니까. 거기에 이세계의 존재와 신들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어쨌든 이 평범해 보이는 세상이 사실 존나게 판타스틱한 세상이란 게 밝혀지면 코로나 보다 더한 혼란이 찾아올 거란 것은 확실했다.
“가지세계의 신들은 전력이란 전력을 모두 이끌고 왔어요. 힘든 싸움이 되겠죠... 저승사자의 말대로 저희는 인간세계를 지켜줄 여유가 없어요. 저희가 지면 뒷수습 이전에 이 세계가 끝장날 테니까요. 저 가지세계의 신들이 이 세계에 현현하는 순간, 이 세상은...”
왜 말을 하다 말어? 불안하게...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서 평소처럼 드립도 못 치겠네. 말끝을 흐린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지만. 한 마디로 세상이 잣된다는 거잖아.
세상이 진짜 요지경이네. 지구촌은 자기네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바쁜데, 이젠 이세계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그냥 거기서 멸망하면 안 되나. 아 그건 좀 그런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사태가 끝난 뒤에 저희가 수습을 도와줄 순 있어요. 그 전까지는...각 정부가 최대한 수습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신들을 대표해서 의견을 전달하건데, 변이자에 대해서 이제는 비밀을 지키지 않아도 좋아요. 두 세계가 충돌하는 지금, 변이자가 더 많이, 더 빠르게 늘어날 테니 이젠 숨길 수 없을 테니까요...”
“그건! 알겠네! 각국에! 전달하도록! 하지!”
결국 변이자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구나. 이제 길거리에서 목 들고 다녀도 되는 건가. 머리카락으로 마실 거 테이크아웃해서 들고 다니고.
“그리고 유진씨?”
“...왜?”
“유진씨는 마하의 기억에서 힘의 사용법을 배우셧나요?”
“어...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나 그런 거 배운 적 있나? 뭘 해야 한다 정도만 들었던 거 같아. 경계 보수하고 뭐 하면 알아서 해결 될 거라고 들었는데...삼겹살 여신은 신들을 전부 죽이면 된다고 했고.
“모르겠어. 생각해보니까 따로 들은 건 없었는데...”
“...방법이랄 것도 없어요. 손으로 흙을 퍼서 신들의 시체에 흙을 뿌리면 시체가 분해되어서 땅에 흡수될 거에요. 영혼은 에포나에게 먹이면 된답니다.”
거기서 에포나가 왜 나와?
“에포나는 영혼을 싣는 유령마랍니다. 괜히 제가 고생하면서 그 아이를 키워서 유진씨에게 보낸 게 아니에요. 몸이 분해된 직후의 영혼은 아주 연약해질 테니, 에포나라도 싣는 건 어렵지 않을거에요.”
그거 까진 나도 아는데...근데 저 헤으응 거리는 망아지가 정말 할 수 있는 거 맞아? 아니 그전에 그걸 도대체 왜 가르친 거야?
“근데 신은 어떻게 죽여?”
“그건 저희가 어떻게든 할 수 있슴다. 유진양은 뒤에서 수작 못 부리게 육체만 분해해주시면 됨다. 신들의 육체가 분해되는 것만으로도 저쪽 입장에선 아주 위협적임다.”
결국 나도 전쟁터에 나가야 하긴 한다는 건가. 그리고 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니. 내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내가 산전수전 다 겪어보긴 했지만, 전쟁터는 영화나 게임 말곤 실제로 본 적도 없단 말이야.
“하지만 내가 그러게 놔두지 않을 것 같은데?”
내 능력이 그렇게 위협적이면, 당연히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지 않을까?
“저희가 철저하게 지키겠슴다.”
나를 둘러싸고 방어전을 하겠다는 건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모리안의 봉인을 풀어서 모리안한테 맡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물론 썅년이긴 하지만 일단 오랫동안 산 신이고, 이것저것 아는 것도 많은 것 같고. 내가 잘하냐 못하냐에 이 세상이 망하냐 안 망하냐가 달려있다는 사실이 너무 부담스러워.
난 그냥 돈이나 많이 벌면서 살고 싶었을 뿐인데.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슴다. 여태까지 잘 해오셧지 않슴까?”
“문제가! 없던건! 아니었지만! 자네는 매번!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나! 나는! 자넬! 믿네!”
“...알았어요. 최선을 다할게요.”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하든 안하든 이 세상은 큰 위기에 놓였고, 나는 그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다. 어깨가 너무 무겁지만, 해야만 한다. 부모님, 한솔이, 유라, 세연이, 리온, 에포나....그리고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나에게 달려있었다.
"힘내. 네가 나를 구해준 것처럼, 세상을 구할 수 있을거라 믿어."
세연이는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까짓거 한 번 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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