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182.폭풍전야(2)
* * *
“혁명도 막바지에 이르렀군요.”
“그렇습니다. 아테나님.”
베네딕틴은 자신이 섬기던 여신의 딸이라는, 메티스가 자리를 비워둔 동안 자신들을 뒤에서 도와주는 아테나 여신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를 자식처럼 키워준 메티스가 믿어도 된다고 했으니, 그는 아테나가 배신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애초에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그들에게 위병들이 있는 장소의 우회로나 보급창고를 일러주지는 않았을 터였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보급이고, 보급이 끊긴다는 것은 곧 패배와 직결되는 부분이니.
베네딕틴은 여신의 말만을 기다리며, 임시 지휘실로 쓰고 있는 건물의 창문을 통해 점점 수가 불어나 이젠 삼천 명이나 모인 반란군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2백 남짓했던 반란군은 기세를 타고 삼천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으로 변해 낙원을 휩쓸고 있었다.
아무리 신들에게 발탁된 위병이라지만 그들은 결국 낙원 밖으론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전투경험이라곤 훈련밖에 없는 미숙한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밖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여행자들이 선두에 뛰어들고 전쟁과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가 지원하는 반란군의 공세를 막을 능력은 없었다.
신들의 위병은 속절없이 반란군의 공격에 패주를 반복했다. 이제는 만신전 하나를 두고 농성을 하는 상황에 이르자, 신들도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반란군이 도착 했을 때는 만신전 주변은 꽤 삼엄한 요새가 되어 뚫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 있었다.
전투를 지휘하던 베네딕틴과 선두에서 싸우던 포모르가 허탈함을 느낄 정도로, 위병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지휘관은 먼저 도망쳐 버리고, 남아있는 위병들도 반란군을 보고 전의를 상실해 곧바로 항복하거나, 심지어 반란군에 합류하는 위병들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순식간에 낙원의 반을 점령했다. 이상하리 만큼 반격이 없었기에 베네딕틴은 불안감을 느꼈지만, 메티스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답을 건네주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신들은 전부 전쟁터에 갔을 테니, 지휘할 신조차 없는 위병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만신전 쪽은 경계가 삼엄하니 쉽게 뚫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아직 지휘를 할 수 있는 신이 남아있기는 한 것 같구나.”
아테나는 만신전 앞마당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만신전 안에서 난폭하고 거침없는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반란군들이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던 또 다른 이유였다.
“아레스...”
아테나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아레스를 생각했다. 성격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단순무식하고 폭력적인 성격은 같은 신들도 그를 경원시 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그를 만신전에 남겨둔 것은 혹시 그가 혼자서 날뛸까봐 만신전의 수비란 명목으로 남겨둔 것이라는 것을 아테나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뒷끝이 긴 녀석이라, 데려갔으면 아마 사고를 쳤겠지. 썩어도 권력욕의 화신인 제우스라, 책 잡힐 일을 굳이 만들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테나는 마법으로 주변을 더 수색했지만, 전신은 아레스 말고는 더 존재하지 않았다. 아테나는 이 사실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레스와 기꺼이 싸워 이기면 그만이었지만, 이 싸움은 인간의 것이었다. 반란군의 명분을 위해, 아테나는 나설 수 없었다. 신이 신을 이기면 승리의 의미가 퇴색되어버릴 테니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오래전 트로이 전쟁에서 그랬듯이, 티나지 않을 만큼의 축복을 내리는 것 뿐이었다. 아테나의 시선이 만신전에서 저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저항군들에게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한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 반란에서 선두에서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자였다. 뛰어난 검술로 순식간에 위병들을 베어 넘기고 대장을 잡아오는 솜씨가 여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기에, 아테나는 그를 자신 대신 내보낼 전사로 점찍어두었다.
“베네딕틴. 포모르에게 알리거라. 저 만신전에 있는 전신 아레스와 일기토를 할 준비를 하라고.”
“이, 일기토를 말입니까?”
“그렇다. 인간의 승리는 오로지 인간의 승리로 끝을 맺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만 너희들에게도 확실한 의미부여가 가능하니, 가장 적합한 전사가 나서야 하느니라.”
베네딕틴은 아테나 여신에 말에 놀란 눈으로 여신을 쳐다보았지만, 여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납득했다.
온전한 인간의 승리를 위해선 신이 앞에 나서서는 안 된다. 베네딕틴이 메티스와 아테나의 존재를 일부 인원 빼고는 알리지 않은 이유였다. 지금도 당장 아테나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베네딕틴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검을 손질하고 있던 포모르를 불렀다. 포모르는 그의 부름에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그에게 다가갔다.
“잘 쉬었는가?”
“그래.”
“여신님이 자네에게 부탁하셧네. 만신전에 있는 전신 아레스와 일기토를 벌여달라고 말일세.”
여신이 시킨 일의 내용에, 포모르는 놀랐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가, 자신이 잘 못 들은건가 싶어 그에게 다시 되물었다.
“...신과 결투를 하라는 건가?”
“그렇네.”
“...알겠다.”
“...나는 자네를 믿네. 승리를 기원하도록 하지. 내일 아침 동이 틀 때, 만신전의 입구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며 결투를 신청하면 되네.”
“...해가 지는 걸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자네라면 할 수 있네...건투를 빌겠네. 자네의 승리를 기원하지.”
포모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베네딕틴은 그의 뒷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며, 메티스 여신이 떠나기전 남겨준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날씨가 미쳤구만...”
이게 10월 날씨라는 게 안 믿겨지는데, 나는 에포나의 등위에 앉아 리온을 머리카락으로 들어올려 내 앞에 앉혔다. 그리곤 머리카락으로 리온의 몸뚱이를 감싸 나와 바싹 붙였다. 가슴사이에 뒤통수가 끼인 리온이 불편한 듯이 몸을 뒤척였지만,
위험한것보단 안전한게 더 나으니까.
“엄마, 불편해...”
이런 날씨에 존나 달리다가 추워 죽긴 싫잖아. 급한 대로 따뜻하게 입혔긴 했지만 겨울 차림이라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고. 나는 내가 준 당근을 열심히 씹어 먹고 있는 에포나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고삐를 슬쩍 잡아당겼다.
“에포나, 기밀관리본부 위치는 알지?”
“응! 나 길 다 알아!”
“오케이. 그러면 기밀관리본부 뒷문까지 사람들 피해서 달린다. 알았지?”
“헤으응!”
“아니야! 그럴 땐 헤으응이 아니라! 알았다고 대답하는 거야!”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누가 이거 들었으면 나 목매달고 자살할거야. 매달아도 자살은 못하겠지만. 나는 내 머리카락으로 만든 고삐를 힘차게 흔들었다.
“자, 그럼 출발!”
“가즈아!”
에포나는 준비자세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스포츠카 뺨치는 속도로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삐를 붙잡은 채로 정면을 쳐다보았다. 진짜 두루마기 기억 못했으면 두 시간이나 사람들 시선을 강탈하면서 기밀관리본부에 가야했겠네.
나는 아무도 우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기분 좋은 속도감을 즐겼다. 사실상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에포나가 알아서 목적지까지 달려가니까 운전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역풍 불어오는 것도 알아서 두루마기가 막아주기도 하고.
세연이는 내 어깨를 붙잡고 덜덜 떨고 있었지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떨어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지도 못하니 자석처럼 끌려올 뿐이다.
나는 바쁘게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는 몰라도 하늘을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 내가 잘 못 본건가? 나는 눈 여러 번 깜빡이며 다시 하늘을 응시했지만, 내가 발견한 위화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늘에...금이 가있어? 마치 유리에 금이 가기라도 한 듯이 하늘에는 실금이 여럿 생겨 있었다. 역시, 날씨가 급격하게 바뀐 건 단순히 지구온난화 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인님! 도착했어!”
“어, 어...”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 한 다음, 조용히 에포나에서 내려 리온을 풀어주었다. 리온은 내 머리카락 속이 따뜻했던 모양인지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리온은 반쯤 감은 눈으로 내 몸에 기대며 얼굴을 내 배에 파묻었다. 배에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리온 일어나. 자도 침대에서 자야지.”
애는 내가 입원하던 병실에 눕혀놔야겠네. 걸음걸이도 위태로워서 걷게 하기도 불안할 지경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리온을 안아 올리고, 다시 평소의 작은 미니어쳐 사이즈로 돌아온 에포나를 데리고 기밀관리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왔는가!”
“빠르게 왔네요...어머.”
“박사님, 이야기 전에 리온 좀 침대에 눕혀놓고 와도 될까요?”
“그러게!”
나는 내가 입원하던 병실 침대에 리온을 눕혀놓았다. 에포나도 여기에 같이 있게 해야겠네. 리온 혼자 있으면 깨어났을 때 불안해 할테니까.
“에포나, 넌 리온이랑 같이 있어. 알았지?”
“응!”
나는 에포나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병실을 나와 라쿤박사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돌아왔군! 자! 여기에! 앉게!”
나는 라쿤 박사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집무실에 앉아있는 인물들은 내가 익히 알던 존재들이었다.
저승사자, 마리아, 라쿤 박사.
이렇게 다 모여서 이야기를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그만큼 이번 일이 심각하단 이야기겠지? 나는 하늘에 생긴 실금을 떠올렸다. 마리아가 말했던 전쟁이 이제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 하겠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