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181.폭풍전야(1)
* * *
“...신들이여, 모두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저들이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려는 것 같습니다.”
경계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여신인 헤카테가 한데 모인 뿌리세계의 신들에게 말했다. 오랜 세월동안 세계의 경계에 머물며 가지세계의 신들이 뿌리세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하던 신들이었다.
헤카테의 말에 신들은 경계 너머를 꿰뚫어보였다. 그들의 눈에도, 수백의 신들이 경계 너머에 무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 눈에 보였다. 단순히 숫자로만 본다면, 압도적인 전력차였다. 질적으로도 저쪽이 더 유리했기에, 전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의무를 져버리고 도망친 자들이 다시 돌아왔군.”
켈트의 주신인, 크롬 크루아하는 고요한 눈빛으로 곧 전장이 될 경계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에 띄는 황금빛의 갑옷을 입은 신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우스였다. 신화가 살아 숨 쉬던 시절에는 천둥을 손에 쥐고 집어던지는 그리스의 주신을 모르는 자가 없었으니, 그가 수 천년 만에 다시 보았음에도 그를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손에 번개를 쥐고 다니는 신이 제우스 말고는 존재할 리가 없었으니까.
“바이브.”
“네. 크루아하님.”
“마하는 어떻게 되었나?”
“...스스로를 자각하기는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머리색이 반 정도 붉어진 것을 보면...”
모리안의 작전이 실패하면서 꼬이기는 했지만, 바이브 카흐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있을지 모를 변수를 제거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자신의 언니가 먼 옛날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유진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이 나았다.
다른 신들도 모리안의 성격을 알고 있었으니, 음험한 여신보다는 좀 괴짜스럽긴 해도 정의감은 있는 유진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가. 바이브, 너는 그 아이에게 가보거라. 이쪽은 우리들만으로 버틸 수 있으니.”
바이브 카흐는 크롬 크루아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큰 요소는 마하의 능력이었으니, 마하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바이브 카흐는 크롬 크루아하와 다른 신들에게 조용히 목례하고는, 날개를 펼쳐 경계를 빠져나갔다.
“...며칠 만 버텨도 되겠군.”
“어떻게 할 생각이오? 저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 같소만.”
염라대왕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언제라도 경계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은 가지세계의 신들을 노려보았다.
“일단 기선제압을 해두는 게 좋겠군. 루, 누아다. 우리는 먼저 저들의 선두를 공격한다.”
“알겠습니다.”
루와 누아다는 각자의 무기를 들고 크롬 크루아하의 양옆에 나란히 섰다. 팔짱을 끼고 전장을 바라보던 크롬 크루아하는 인간 형태를 버리고, 본래의 모습인 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묵색의 용이 신들을 향해 적의를 담은 포효를 내질렀다.
개전의 시작을 알리는 포효와 함께, 양측의 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영하 4도?”
아직 10월인데? 이게 뭔 개떡 같은 소리야.
나는 추운 날씨에 벌벌 떨며 일어나 폰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이게 말 이 돼? 어제 25도였는데? 아무리 지구 온난화니 뭐니 해서 날씨가 변덕스럽다고는 했지만, 하루 만에 날씨가 이렇게 격렬하게 바뀐다고?
언제부터 한국이 사하라 사막이 됐지? 아무리 요 몇 년간 날씨가 봄여어어어어어어름가을겨어어어어어어울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나 겨울옷은 따로 안사 뒀는데.”
나는 이제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하얀색 붉은색으로 완벽하게 나뉜 머리카락을 움직여 창문을 닫고, 보일러를 켰다.
진짜 조온나 춥네. 이정도면 얼어 죽을 거 같아서 휴방한다고 해도 인정할만한 사유 아니야?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자본주의의 노예답게 발가락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자리에 앉았다.
아침 7시네. 방송하기 전에 뭔 소식이라도 있나 좀 알아봐야지.
포털 사이트를 키고 뉴스란을 뒤적인다. 폰으로 보는 게 편하긴 하지만, 어차피 일도 해야할 겸 컴퓨터로 봐야지. 평소처럼 무슨 사고가 터졌느니, 건설사가 비리를 저질렀다느니, 연예인의 사생활 논란이라든지, 으레 있는 이야기들이 뉴스라는 이름으로 쏟아진다.
역시나 급격하게 바뀐 날씨를 나만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뉴스란을 뒤적이니 급격한 날씨 변화를 분석한 뉴스들도 몇 개 보였다. 대부분은 원인을 알 수 없다 정도로 끝나서, 이 급격한 날씨변화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겨울 옷 좀 사러가야겠네. 느긋하게 살 요량으로 가을 옷만 좀 사뒀었는데, 겨울용 코트랑 따뜻한 스웨터 같은 거 좀 사야겠다. 두꺼운 실내용 양말도 몇 켤레 사고. 여자가 되고나서 남자 옷을 못 입게 되니 옷 사러 갈 일이 많아지네.
“주인님...나 아침밥...”
애도 깼구나. 내 침대 발치에 놓은 방석 위에서 자고 있던 에포나가 내 옆에 앉아서 칭얼거렸다. 나는 거실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고 에포나의 입에 당근을 물려주었다. 거실을 쓰윽 훎어보니 갑작스런 날씨 변화 때문인지 뿌옇게 변한 유리창을 닦고 있는 세연이가 보였다.
확실히 날아다니니까 저런 건 편하네.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까 청소할 때는 진짜 편해 보인단 말이야. 나도 머리카락으로 비슷하게 따라할 수는 있지만, 머리카락으로 걸레 집는 건 좀 그래...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 하는 것도 웃기지만.
“세연아, 너도 햄버거 ?”
세연이는 내 말에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개...나는 냉장고에서 인스턴트 햄버거 두개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집어넣고 돌렸다.
리온은 아직 자고 있나? 인기척 때문에 깼을 것 같은데. 나는 당장이라도 산책을 격렬하게 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에포나의 눈빛을 무시하곤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날씨에 산책은 에바야. 나 겨울옷도 없어서 가을 옷 입고 옷 사러 나가야 할 판인데.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니, 리온은 침대에서 아직 잠꼬대를 하며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베개를 껴안고 세상모르게 자는 모습이 귀엽네. 나는 리온의 부드러운 볼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방송하기 전에 이것저것 준비할게 많았다. 오늘 할 게임이 잘 돌아가는 지, 방송 장비에 문제가 없는지, 요즘 유행하는 밈 같은 것도 좀 찾아보고, 뭔가 인방 관련 이슈가 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인터넷 방송이란 게 막상 방송만 켜서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애들 보이는데, 방송시간 만큼이나 뒤처리나 준비시간도 긴게 방송인이라고. 머기업되면 방송 편집은 외주 넣든가 편집자 고용하든가 하면 되니까 좀 더 여유로워 지긴 하지만.
“오늘은 별거 없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공이나 한 두 판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나는 책상을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에 폰을 머리카락으로 끌어와 집어 들었다. 전화네. 마리아였다.
이 시간부터 무슨 일이래. 애가 이렇게 일찍 일어날 애는 아닌데. 나는 리온이 깨지 않도록 거실로 나와 통화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혹시 시간되시나요? 아니, 시간이 없으셔도 일단 만나죠.]
뭐? 애가 왜이래. 나 방송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뭐 심각한 일이라도 터진 건가? 그 가지세계인가 그거 관련으로? 저번에 경계 다녀온 거랑 이세계에서 이상한 놈들 습격해온 거 빼고는 조용했는데, 올 것이 왔나보네.
“어디서 만나게?”
[기밀관리본부로 와주세요. 되도록 빨리요.]
뭐? 기밀관리본부가 거기서 왜 나와? 마리아는 변이자도 아닌데 기밀관리본부랑 어떻게 알고있...아니 재 여신이기도 하고 라쿤박사님이 신들이랑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으니 알고 있는 게 당연한가.
근데 거기까지 가려면 두 시간, 이것저것 준비하면 세 시간 정도는 걸릴 텐데.
“근데 좀 오래 걸릴 텐데...”
[에포나 타고 오시면 되잖아요?]
“난 대낮부터 말 타고 다니는 정신 나간 인간으로 찍히고 싶지는 않은데?”
[저승사자한테서 받은 두루마기는 어디에 두셧나요.]
아. 그게 있었지. 그거 쓰고 달리면 되겠구나. 나는 옷장 구석에 쳐박아 놓은 두루마기를 꺼냈다. 세연이가 정성껏 빨은 덕분인지 옷은 구김살 없이 깨끗했다. 이런 재질의 옷이 구김살이 생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았어. 그럼 기밀관리본부로 가면 되는 거지?”
[네. 그럼 있다 봐요.]
쿨하게 할 말만 하고 끊는구만. 나는 옷장에서 그나마 따뜻할 것 같은 옷을 꺼내곤, 리온을 깨웠다. 애도 데리고 가야지. 혼자 놔둘 수는 없으니, 기밀관리본부에 데려가야겠다.
“리온? 일어나볼래? 지금 우리가 어딜 가야되거든?”
“5분만 더...”
“감자칩 사줄게.”
“...진짜?”
“그럼.”
역시 애는 먹을 걸로 꾀어야 말을 잘 듣지. 나는 감자칩이란 말에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비는 리온을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의 외출이 되겠네. 저번에 집구하러 간 뒤로 일주일 넘게 다시 집콕 했으니...
무슨 일이든 간에 평화롭게 끝났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을 생각하면 그런 소망 따위는 가볍게 짓밟힐 거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부디 큰 일이 아니길 바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