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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203화 (203/352)

〈 203화 〉 180.신들의 세상, 인간의 세상(4)

* * *

“제우스, 오랜만이네요.”

“오, 메티스. 오랜만이오.”

옥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던 제우스는 기쁜 얼굴로 그의 전처, 메티스를 바라보았다. 요즘 따라 메티스 생각이 많이 났는데, 정말 타이밍 좋게 나타났구먼. 안 그래도 상당히 귀찮은 상황이라 제우스에게는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간 잘 지냈소?”

“저야 서재에서 책만 읽으면서 보내니까요. 잘 지내고 있답니다.”

메티스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참아가며, 제우스에게 다가갔다. 제우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메티스를 보며 흡족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맛을 즐겨볼 수 있겠군.

얼마 뒤에 도착할 새로운 여자들도 꽤 즐길만한 거리겠지만, 때때로 아주 오래전에 즐겼던 익숙한 맛도 그리워지는 법이었다. 메티스는 조용히 제우스의 옥좌 팔걸이에 앉아. 제우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둘이서 있는 것도 오랜만이군.”

제우스는 자연스럽게 메티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제우스의 우악스러운 팔이 허리를 감싸자 메티스는 움찔했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렇네요. 벌써 천년은 지난 것 같아요.”

제우스의 머릿속에서 나온 뒤로 얼굴을 보질 않았으니, 그 정도는 됐겠지. 메티스는 제우스를 증오했다. 스스로의 왕좌를 유지하겠단 이유로 머릿속에 자신을 수 천년동안 가두고 이용해 먹었으니까.

메티스는 자신의 감정을 속으로 갈무리하며, 얼굴에 깨지지 않을 가면을 씌웠다. 아직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지금은 수천 년에 걸친 원한보다 대업을 성공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어차피 대업이 성공한다면 복수도 이룰 수 있으리라.

“그래서,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시나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들어도 될까요?”

“아테나가 총사령관직을 그만두고 사라졌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그 아이도 무슨 생각인지...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통수권자가 바뀐 상황이 얼마나 골치 아프군. 통수권자가 바뀐다고 해서 우리의 승리가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전력은 이쪽이 압도적이었다. 단지 단합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을 뿐. 저쪽의 전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으니, 그저 돌격만 해도 무난하게 이길 것이라고 제우스는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신들이 이곳에 이주하기로 결정했을 때, 남아있는 신들은 극소수였다. 순수하게 신들의 숫자만 대여섯 배 이상 차이가 날 테니, 전력차이도 압도적. 심지어 뿌리세계에 남은 신들은 전부 육체를 포기했기에, 가지세계로 이주한 신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경계를 뚫고 뿌리세계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이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암묵적인 견제로 협력이 일루어지지 않아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을 뿐.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들이 경계에 몰려들어 철저하게 수비를 하고 있던 탓에 아직까지 뚫지 못한 것뿐이었다. 자신이 나선다면, 그 때는...제우스가 다시 고민에 빠질 때였다. 메티스는 그가 상념에서 깨어나도록 말을 걸었다.

“어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래도 머리 아픈 일이 많아서 말이야. 토르 녀석이 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군. 오딘 녀석은 어떻게든 실각 시켰지만...”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만신전의 수장 자리를 놓고 오딘과의 경쟁 끝에 이긴 것이. 오딘은 수장자리를 놓고 패배한 뒤 사실상 은퇴했고, 그 뒤를 토르가 이어받아 북유럽 신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마땅히 대체할 인재가 없어 토르를 일단 올려놓았지만, 토르는 얼마 안 되는 그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는 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오딘만 못하다지만, 그건 오딘이 제우스와 맞먹는 신격을 가진 신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우스는 아주 오래전의 예언을 떠올렸다.

‘네 아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너도 네 아들에 의해 옥좌에서 끌어내려 지리라.’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제우스는 누구보다 최고신의 자리에 집착하는 자였다. 그걸 위해 메티스를 머릿속에 가두고, 그 지혜를 이용하지 않았던가. 이 세계에 와서는 메티스를 놓아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결코 메티스와 결별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전쟁은 어떤가요? 잘 진행되고 있나요?”

“그것도 문제라오. 이 세계가 버틸 수 있는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서로 눈치만 보며 건성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은 호시탐탐 빈자리를 노리며 사리고 있지.”

그리스의 신들은 총사령관이 아테나였기에 그나마 말을 잘 듣는 축이었지만, 인재가 그리 만치 않아 전력 자체에 한계가 있었다. 전투 병력이 많은 북유럽 쪽이 적극적으로 협조 해줘야 일이 쉬울 텐데, 그 치들이 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상 순순히 병력을 내어줄 리가 없었다.

그나가 토르가 총사령관이 되었기에 이전보다는 적극적으로 싸우겠지만, 다른 신화권의 신들이 문제였다. 제우스로서는 그들을 움직일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수백 년 동안 권력다툼을 해온 자들이라 어지간한 술수에는 넘어가지도 않을 테고.

그래서 메티스를 찾고 있었던 차에, 마치 하늘이 도운 것처럼 메티스가 직접 나타나자 제우스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한에서는 메티스보다 지혜로운 여신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권력이든 뭐든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니, 메티스. 혹 그대는 저 말썽쟁이들을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방법을 알고 있소?”

“신들을 이번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싶다...는 말입니까?”

메티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우스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제우스는 메티스의 미소에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가장 쉬운 방법은 누구나 혹할 만한 미끼를 내거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어떤 미끼를 내건다 해도 믿지 않을 거요.”

까마득한 시간동안 서로 권력다툼을 해온 자들이 서로를 믿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 속을 것을 알고도 물만한 미끼가 아니라면...

“잘 생각해보세요 제우스. 아주 매력적인 미끼를 던져두면 될 뿐이에요.”

“매력적인 미끼라...무엇을 말이오?”

턱을 쓰다듬으며 메티스가 말한 미끼에 대해 생각하던 제우스가 물었다. 메티스는 그의 가슴을 손으로 훑으며, 대답했다.

“우리들은 왜 이곳에 왔죠?”

“그거야,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잖소? 뿌리세계에서는 신들이 육체를 가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니...”

그들이 가지세계로 넘어왔고, 뿌리세계로 넘어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뿌리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신들을 전부 처리하면, 그 조약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법이 있다 한들 지키는 사람이 사라지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요. 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영혼만 남으면 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죠. 이세계에서는 이 대륙의 정기를 전부 흡수해서 살아남았지만...저 세계에서는 훨씬 많은 정기를 얻을 수 있어요. 그들에게 더 많은 정기를 배분해주시면 된답니다.”

“그렇게 말한들, 저들이 믿겠소?”

“스틱스 강에 맹세를 잊으셨나요?”

“그건...”

제우스는 당혹스러운 눈길로 메티스를 내려다보았다. 스틱스강의 맹세라. 이 세계에 넘어온 이후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맹세가 다시 언급되니 그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절대 어길 수 없는 맹세를 하라니, 만약에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려고?

“영광의 신들이 서약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도 가장 무서운 서약인 스틱스강의 맹세라면 믿지 않을 수 없겠죠.”

“으음...”

제우스는 스틱스강의 맹세를 이용하라는 말에 거부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 맹세 때문에 연인을 잃은 적이 있었으니까. 제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였던 세멜레를 떠올렸다.

그가 망설임을 버리지 못하고 생각에 잠기자, 메티스는 그를 좀 더 부추 키기로 했다.

“당신은 최고신이에요. 제우스. 당신이 권위를 보여주며 스틱스강의 맹세를 한다면 아주 쉽게 일을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최고신이 직접하는 맹세라니, 누구라도 넘어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권유하는 뱀처럼, 메티스는 계속해서 제우스에게 속삭였다. 성욕과 권력욕을 자극하는 메티스의 발언에, 제우스는 그녀의 말을 수긍하고야 말았다.

“...어떤 맹세를 하면 되겠소?”

“그건 말이에요...”

메티스는 제우스의 귀에 맹세의 내용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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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시여, 저희를 불러 모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토르는 풍성한 금색의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제우스에게 물었다. 다른 신들도 의심 반, 호기심 반씩 담은 시선으로 제우스를 쳐다보았다. 각 신화의 수장들이었다. 제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잡고는,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이제는 서로의 은원을 잊고 일단 협력을 해야 할 때라네.”

“...그래서 병력을 내놓으라, 이 소리요?”

토르는 제우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가 북유럽 신들을 얼마나 견제하고 괴롭혔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라그나로크를 피해 이곳에 왔건만, 제우스의 견제에 오딘이 실각하고, 어쩔 수 없이 토르가 북유럽 신들을 이끌고 있는 처지였으니.

“아시다시피,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소.”

‘라’는 그렇게 대답하곤, 탁자위에 놓인 차를 마셧다. 그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렇게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서 더 찬밥신세로 만들지 않았던가. 회의에서도 이집트 측의 발언권은 적었다.

“으음...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다니, 최고신도 많이 급한가 보군.”

오메테오틀...제우스는 자신을 비꼬는 신을 바라보았다. 그도 권력싸움에서 패배해 낙원 구석으로 밀려난 신이었다. 그 외에도 그가 실각 시켰던, 혹은 권력 다툼에서 패배시켰던 각 신화의 주신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많은 신들의 쏟아졌지만, 제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내 그대들을 많이 고생시키긴 했소.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없소. 이대로 모두 죽고 싶소? 우리는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으니, 지금은 모두 협력할때요.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노릴때가 아니란 거요.”

그걸 니가 말하냐? 라는 눈총들이 제우스에게 향했지만, 제우스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 정도로 감정이 흔들릴 정도였다면 이곳에서도 최고신 노릇을 해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제우스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세계와는 달리, 저 쪽 세계에는 우리가 떠나고 2천년 가까이 쌓인 정기가 있소. 이곳처럼 한정된 정기를 가지고 권력다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요.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대들과 정기를 나누겠소. 서로 같은 양의 정기를 가진다면 싸울 일은 없을 것 아니오?”

생각보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기에, 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정말로 이행한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신들의 숫자가 많은 신화든 적은 신화든 적어도 그들이 있던 시절 훨씬 많았던 신들을 감당해냈던 뿌리세계라면, 나눠가지더라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정기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지금처럼 얼마 되지 않는 정기를 배분해서 살아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궁여지책으로 인간들의 정기까지 흡수하는 신까지 있을 지경이니, 적어도 지금 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많은 신들이 생각했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소? 그대는 전에도 우리를 속인 적이 있었잖소!”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스틱스강에 맹세를 하겠네.”

“...스틱스강에 맹세를 하겠단 말이오?”

제우스의 말에 놀란 토르가 무심코 그에게 되물었다. 제우스는 그의 말을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신들은 스틱스강에 맹세를 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로 제우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진심이냐는 의미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한 후에, 나는 뿌리세계의 정기를 모든 신들에게 공평하게 나누도록 스틱스 강에 걸고 맹세하겠소.”

“스틱스 강의 맹세를 하겠다면야...우리는 그대의 말에 따르겠소.”

‘라’는 머릿속으로 이득을 계산한 끝에 승낙했다. 그들로서는 절대 어길 수 없는 맹세를 한 시점에서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다른 약소 신화권의 신들도 한명씩 지원을 선언하기 시작하자, 비교적 큰 세력을 가진 신화권들도 눈치를 보며 참전 의사를 표명했다.

“...우리도 지원하겠소.”

토르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신화들이 동의했으니,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두 번째로 큰 신화권의 수장인 만큼, 충분히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일에 끼어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제우스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메티스의 지혜를 빌리니 이렇게 쉽게 끝나는 군.

“그럼, 다들 준비하게. 시간이 촉박하니, 3일후에 출정하도록 하지.”

모두가 제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년 만에 있는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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