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202화 (202/352)

〈 202화 〉 179.신들의 세상, 인간의 세상(3)

* * *

“모두들 준비 됐는가?”

베네딕틴의 말에 여관의 뒷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에 큰 소리를 낼 순 없으니 그들이 택한 방법이었다. 포모르는 품안의 검을 어루만지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 안절부절 못하는 테테를 쳐다보았다.

“괜찮나?”

“으, 내가 잘 선택한 게 맞는 걸까...”

테테는 자신이 맞는 선택을 한 건지 자신이 없었다. 작전은 어떻게 보면 정석적이었지만, 잘 보면 엉성했다. 기습이라는 것이 확실히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는 있었지만, 이중에서 전투경험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테테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는 포모르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듬직해 보여서, 테테는 조용히 그의 옆에 서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무기를 나눠 주는 사람들, 긴장한 듯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사람들. 창밖을 쳐다보며 동태를 살피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목적으로 모여 있다는 사실이 테테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그것도 신들에게 저항하기 위해서라니.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들을 보지 못했다면 테테는 그저 농담거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뒷골목은 각자도생이 기본인 곳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까.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이 일에 동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니, 나도 참여 할 거야.”

포모르는 테테를 배려해주는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권유했지만, 테테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주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뒷골목 바깥으로, 이 낙원 바깥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테테는 말로만 듣던 낙원 바깥이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야라도, 넓지만 좁은 뒷골목에서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테테는 그렇게 생각했다.

“...검은 쓸 줄 아나?”

“...쓰, 쓸 줄 알아!”

포모르는 테테의 대답에 말없이 검을 쥐어 주었다. 테테는 얼떨결에 받아든 검을 어설프게 붙잡은 채, 포모르를 올려다보았다.

“...네 몸은 그걸로 지켜라. 아마 이제부터 일어날 싸움은 목숨이 오가는 전쟁이 될 거다.”

“내 걱정은 말고 너나 걱정하라구. 이 몸은 이 험한 뒷골목에서 17년 동안이나 살아왔다 이 말씀이야. 오히려 네 걱정을 하는 게 나을 걸?”

테테는 자신 있게 말을 받아치며, 받아든 검을 허리춤에 걸었다. 검을 만져본 적은 처음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쓰는 걸 본 적이 있으니 테테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다들 준비됐는가?”

“네. 준비 됐습니다.”

베네딕틴은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엄숙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그의 사상에 감화되어, 혹은 신들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이 한 저항군이라는 이름 아래 한자리에 모인 모습은 그의 가슴이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모두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몫의 지팡이를 부러져라 꽉 쥔 채, 조용히 말을 골랐다. 그의 신념을 담은, 올곧은 시선이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향했다.

몇 년 동안 계속해온 포교가 이렇게 결실을 맺는가!

베네딕틴은 벅찬 가슴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뜨거운 감성보단 차가운 이성으로 말을 해야 할 때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지금, 그는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어야 하고, 침착해야 했다.

“동지들이여, 우린 지금부터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하러 갈 걸세.”

아주 오래전, 국가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기도 전에 생겨난 낙원은 신들이 세운이래 신성불가침의 도시로서 존재해왔다. 전쟁으로 수많은 나라가 멸망하고 세워져도, 자연재해로 대륙이 혼란에 휩싸여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언제나 같은 모습을 유지해왔다.

신들은 향락을 즐기고, 인간들은 신을 섬기며 복종하는 체제가 유지 된지 까마득한 세월동안, 낙원안의 인간들은 신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져 있었으니까. 아무도 그 벽을 깨려하지 않았다.

“ 우리가 신들의 억압에 맞서 일어난 것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함이 아니네. 신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뭉친 것도 아니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야할 세상을 위해서 무기를 쥐고 일어선 것이라네.”

메티스 여신에게 신들이 이 세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로 이주할 예정이라고 들었을 때, 베네딕틴은 참을 수 없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마치 그들을 지켜줄 것처럼 굴며 온갖 것을 요구하던 신들이,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이주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말에 베네딕틴은 신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가 섬기던 메티스 여신이 분노하는 그를 위로하며 뭐라고 말했던가,

‘신들의 세계가 저물고 있으니 이제는 인간의 시대가 올 때가 왔느니라.’

그는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냈다. 조용히 지혜의 여신의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로 여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대를 위해 몸을 불사르는 혁명가가 되기로.

“어쩌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모두 죽을지 모르네. 이 혁명은 실패로 끝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가 남긴 불씨는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장작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을 걸세. 우리는 싸워야 하네. 저들이, 저 가증스러운 이방인들이 우리들의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유린하게 놔둘 수는 없네.”

신들의 유희를 위해 가까운 이들이 희생당한 사람들이 무기를 부서져라 꽉 쥐었다. 신들이 두려워 보내고 말았지만, 돌아온 것은 모욕뿐, 어차피 버러지만도 못한 취급이라면, 싸우다 죽으리라.

“자, 진군하세. 저들은 나태하고 어리석어 무기조차 제대로 들고 있지 않네. 오늘의 싸움은 혁명을 위한 첫 발걸음이 될 걸세. 자, 무기를 들게, 오늘 우리는 우리가 신들의 노리개가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라네.”

그의 연설이 끝나자, 모두가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들의 가족이, 친구가, 연인이 잡혀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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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후후, 그래도 보기 좋지 않으냐?”

메티스는 호호 웃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밤중의 기습을 감행하는 뒷골목의 인간들을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데려와서 보여준 것이 이런 무의미한 저항이라니. 아테나는 메티스가 무슨 의도로 이런 장면을 보여주러 여기까지 데려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신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네 말대로, 신들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단다.”

“...그렇다면, 이런 무의미한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장 아레스 하나만 나타나도 모두 추풍낙엽처럼 쓸려갈 이들입니다.”

인간과 신들의 격차는 숫자로도 메꿀 수 없을 만큼 깊은 도랑이 있다는 것을 아테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무의미한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테나의 머릿속에서 온갖 가정이 스쳐지나갔지만,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테나가 고민에 빠져든 사이, 메티스는 만신전으로 압송할 사람들을 모아놓은 건물에 배치된 위병들이 꾸벅꾸벅 졸면서 보초를 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제 일을 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사이에,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굳게 잠겨놓은 문이 안에서부터 열리고 있었다.

베네딕틴이 미리 배치해 놓은 첩자였다. 첩자는 건물의 정문의 잠금을 몰래 풀어버리고, 동시에 하늘을 향해 준비해놓은 신호탄을 던졌다. 이내 하늘로 던져진 신호탄이 화려하게 터져나가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건물 안에서 쉬고 있던 위병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화들짝 놀라 무기를 급히 들고 건물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그들을 맞아준 것은 보초가 아니라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들 이었다.

“그 아이의 작전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구나.”

“이번 한번 뿐입니다. 두 번 먹히지는 않을...”

“후후, 아테나. 이 어미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니?”

아테나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절대 들어주어서는 안 될 것 같은...하지만 아테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입니까?”

“저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거라.”

“...축복 말입니까?”

“그렇단다. 저 아이들이 싸울 수 있게 축복을 내려주렴. 네가 오래전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에게 가호를 내려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테나는 메티스의 부탁을 거절하려다, 메티스와 눈이 마주쳤다. 메티스는 슬픈 눈빛으로 아테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직 뿌리세계에 있었을 적에는, 용맹하고 지혜로운 영웅들이 나타나곤 했었지.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오고 나서는...낙원에서는 그런 영웅이 나타나질 않았단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왜 그럴까 고민했단다.”

메티스의 시선이 선두에서 건물로 돌입하는 포모르에게 향했다. 그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위병들을 하나하나 제압하며 안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천년에 걸친 시간이 지나서 나는 깨달았단다.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기에, 우리가 차지한 이 땅에서는 영웅이라 부를 법한 필멸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침략자이기에, 우리를 물리치려는 자가 영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서야 깨닫고 말았단다.”

“그게 무슨...”

“그러니 아테나. 내 자랑스러운 딸아, 너는 영웅이 될 저 아이들을 축복해 주렴.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단다.”

메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만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아테나는 급하게 메티스를 불러 세웠다. 격렬하게 경고하는 직감 때문이었다. 지금 보내면 다시는 어머니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아테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오랜만에, 그이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란다.”

아테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메티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테나는 발밑에서 승리의 환호성이 들려올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메티스가 사라진 방향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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