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178.신들의 세상, 인간의 세상(2)
* * *
“오! 자네 왔는가! 그래, 일은 잘 끝났는가?”
“모르겠군. 임무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의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포모르는 베네딕틴의 말에 대답하며, 좌중을 훎어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갑옷을 입은 중년의 남성과 비교적 젊은 청년 둘, 그리고 엘프로 보이는 젊은 여성. 그리고 수십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로 방안에 빼곡히 서 있었다.
예상외의 숫자에 포모르와 테테는 놀랐지만, 금세 놀람을 감추고 조용히 그들의 앞에 섰다.
“베네딕틴님. 이분은...”
“소개하지! 그는 이번에 새로이 들어온 동지로, 우리의 일에 아주 관심이 많은 친구라네! 여신님께서도 능력을 높이 사 개인적으로 임무를 내리실 정도의 실력자이기도 하지! 자! 포모르군! 여기 이 친구는 살라만 왕국 출신의 기사였던 카트바라고 하네. 이쪽은 혈기 넘치는 청년은 빅터와 길리엄이고! 마지막으로 이쪽의 하프엘프는 서쪽에 있던 수르만 대삼림 출신의 일리나라고 하네. 젊어보여도 실은 세자릿 수를 바라보는 최연장자라네!...그리고 이쪽은...”
“나이는 굳이 말할 필요가 있던가요?”
하프엘프는 불쾌한 듯이 베네딕틴을 쏘아보았다. 확실히 여성에게 있어서 나이문제는 민감한 것이니 언급에 주의를 하라고 했던가. 포모르는 그의 스승이 가르쳐 주었던 지식을 속으로 되새김질 했다.
“하하, 기분 상했다면 미안허이. 내가 입이 가벼워서 주책을 부리고야 말았군!”
베네딕틴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의 자리로 보이는 곳에 앉았다. 포모르와 테테는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그들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동지가 많군.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일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사상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반 낙원 적이어서, 그와 함께할 동지는 거의 없을 거라고 포모르는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보다 인원이 많았다.
“허허, 생각보다 내 사상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지!”
베네딕틴은 진심으로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신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인원이 많았기에, 포모르는 새삼 그를 다시봤다. 베네딕틴은 미묘한 포모르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여긴 제임스, 여긴 케빈, 여긴 해리, 여긴 피리우스, 여긴...”
“뭔가 익숙하다 했더니, 저기 대장간에서 일하는 피리우스 잖아?”
“아는 사람인가?”
“내가 뒷골목에서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 걸?”
테테는 자신 있게 포모르의 말에 대답하곤 팔짱을 꼈다. 베네딕틴이 동지라고 데려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테테와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사람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테테를 쳐다보았다.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왔군. 그들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테테도 이 일에 참여하는 건가?”
“의외인데...”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뒷골목에서도 꽤 유명한 테테는 위험한 일을 꺼리는 경향이 강했기에, 그들은 왠 처음 보는 남성 뒤에서 나타난 테테를 보고 놀라워했다. 그들 대부분은 남성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이 모습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여신님께서 자네를 보내실 때까지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네.”
“작전이라...설명해 줄 수 있겠나?”
저쪽 세계에 파견을 나갔던 포모르는 작전이 뭔지에 대해들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테나의 추궁에서 겨우 빠져나와 바로 이곳으로 향했기에, 작전에 대해들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개개인은 신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네. 신들의 손짓 한 번이면 우리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걸세. 하지만, 우리들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지성체인 인간일세!”
베네딕틴은 스스로의 말에 심취한 듯, 팔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인간은 인간만의 방법으로 싸워야 하는 법! 이곳에 모인 동지들 말고도 수많은 동지들이 이 세계를 인간만의 세계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기다리고 있네! 우리는 수적 우위를 앞세워서 먼저 저 가증스러운 신의 부하들을 제압해야 하네!”
“...말은 쉽군. 제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포모르는 좌중을 둘러보곤 베네딕틴에게 물었다. 포모르가 보기에 이중에서 싸울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채 10명이 넘지 못해보였다. 단순히 무기를 쥐어 주고 싸우라고 하는 것은 자살특공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포모르는 베네딕틴이 무슨 근거로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물론! 우리가 노리는 것은 밤을 틈탄 기습일세! 수십 명 정도는 되는 여성들을 강제로 데려가는 위병들을 기습해 그들을 제압할 걸세. 저들의 숫자는 서른 정도이니 밤을 틈탄 기습이라면 충분히 제압해낼 수 있을 걸세.”
“그 30명이 훈련된 위병이라는 건 잊은 건가?”
“나는 일부러 그들에게 몇 번 씩이나 잡혀가면서 그들의 상태를 확인했네. 저들 중에 정말로 위병이라 자칭할만한 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저 신자라는 이유로 특권을 부여받은 멍청이들뿐이라네. 우리 쪽에서 스파이를 집어넣었는데도 눈치조차 못 채더군!”
“...무기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무기는 미리 준비해 두었다네.”
베네딕틴은 침대에 놓여있던 마대자루를 열고 그 안에서 검을 하나 꺼냈다. 한손으로 쓰기 좋은 아밍소드였다. 포모르는 장식이 없어 단순하지만 잘 단련된 검을 보며 흥미를 보였다.
“좋은 검이군.”
“이 뒷골목에서 내로라하는 대장장이가 만든 물건이지. 특별한 금속으로 만든 무기는 아니지만, 전쟁에서 쓰기에는 이정도면 충분하네.”
포모르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베네딕틴에게서 검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살폈다. 확실히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만든 물건이군. 그는 검을 다시 베네딕틴에게 건네주었다. 테테는 뒤에서 검에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건드려 하지는 않았다.
“그럼, 구한 다음에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그건 말이네...”
“아테나, 분명 성공할거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제 불찰이었습니다.”
토르의 일갈에, 아테나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테나의 평소와는 다른 태도에 토르는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계속해서 아테나를 몰아붙이기로 했다.
“이것도 실패, 저것도 실패! 자네는 성공한 일이 뭔가!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란 이름이 아깝군!”
토르는 회의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였기에, 토르는 반 정도는 진심으로 아테나를 몰아붙였다. 지금이라면 총사령관이라는 자리에서 저 년을 쫒아낼 수도 있겠군.
토르의 계산이었다. 명분이 확실했으니, 제우스도 쉽사리 반대하지 못할 것이란 계산을 마친 토르는 이참에 그리스 신들의 영향력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들 사이의 파워 밸런스를 뒤집기 위함이었다.
벌써 아주 오랜 시간동안 그리스의 신들이 권력을 잡고 휘두르고 있었기에, 토르는 그런 상황을 뒤집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어중간한 2인자 위치에서 있기는 싫었으니까. 아주 실낱같은 기회라도 그는 잡아야 했다.
오딘이 사실상 잠정 은퇴한 뒤로 그가 실질적인 북유럽 신들의 수장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누구 밑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
제우스는 옥좌에 앉아 아테나가 추궁당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눈으로 자신의 딸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총사령관이 된 이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그의 눈에도 딸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제우스는 굳이 아테나를 도와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요 근래 어째서인지 메티스가 자주 생각나 신경이 쓰이는 제우스였지만 메티스가 그와의 만남을 계속 거절해 왔기에 답답했던 차였기에, 그는 아테나에게 신경 써줄 겨를이 없었다. 그의 직감이 메티스와 관련해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제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냥 오랜만에 메티스의 살결이 그리워 진 것일지도 모르겠군. 제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신이라도 수천 년 전의 일을 바로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수천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산처럼 쌓인 기억들 속에서 흙 한줌 정도의 기억을 잦아내야 한단 뜻이었으니까.
“많은 인재가 죽었네! 그리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지!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가!”
“...책임지고 사퇴하겠습니다.”
아테나는 미리 준비해왔던 대사를 꺼내곤 입을 다물었다. 아테나와 토르의 기싸움에서 아테나가 처음으로 패배를 선언하자, 신들은 화들짝 놀라 아테나와 토르, 제우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테나가 토르의 말을 매번 받아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테나가 순순히 패배를 선언한 것은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토르를 제외하면 조용하던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테나의 사퇴 선언은 그만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총사령관이 바뀌는 것은 신들에게 있어 민감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쌓여있었던 파워밸런스가 반대쪽으로 기울어 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일부는 아테나가 저렇게 순순히 ‘사퇴’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일부 신들은 그녀가 ‘사퇴’라는 카드를 꺼낸 것에 대해 머릿속으로 정치적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하, 사퇴? 사퇴! 겨우 그 정도로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토르는 의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아테나를 노려보았다. 평소처럼 자신에게 반격하기 위해 수를 쓰려는 줄 알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사퇴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토르 자신이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그도 눈치챌 수 밖에 없었다. 토르에게 있어 별로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아테나가 조금이라도 더 추하게 몰락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자신이 얻은 권력이 더 빛을 발할 수 있었고, 그리스 신들의 힘이 조금이나마 깎여나가기 때문이었다.
이 끝도 없는 권력 싸움에서, 약간의 차이는 큰 격차를 낳는 법이었으니까.
“못 담을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허어...총사령관이 그렇게 쉽게 말을 하면...”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말이 쉬워 보이십니까?”
아테나는 말을 마치고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토르를 한번 노려보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제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우스님. 허락을 해주십시오.”
“흠. 아테나의 총사령관 사퇴를...허가하마.”
제우스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곤, 마지못해 아테나의 말을 들어 주었다. 아테나가 대놓고 사퇴하겠다고 말한 이상 제우스가 아테나의 사퇴를 막을 명분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작전의 실패라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니 만큼, 제우스는 그리스 신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에 아쉬워하면서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직감이 경고를 보냈지만, 그는 직감을 머릿속에서 치워냈다. 그런 것보다 이 회의를 끝내고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가끔씩 들어오는 노리개들은 그의 가장 마음에드는 취미였으니까. 어차피 어떤 문제라도 그가 직접 벼락을 들고 나서면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 총사령관이 누구든 조금 거슬릴 뿐, 그가 신경쓸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면 총사령관직은 토르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혹시 불만 있는 신이 있으면 나오도록.”
“아버지! 제가,..”
“아레스.”
화를 참고 있었는지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아레스가 말하려고 했지만, 제우스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아레스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끊었다. 그에게 총사령관직을 줄 기회를 내주지 않겠단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레스에게 넘겨주기엔 총사령관직은 너무 무거운 직함이었으니까. 아레스는 총사령관의 재목이 아니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레스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아 넥타르를 거칠게 들이켰다. 그가 분노를 참는 방법이었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네. 내일부터 토르는 총사령관의 이름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네.”
제우스가 회의의 끝을 선언하자, 아테나는 조용히 회의실을 떠났다. 제우스의 직감이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 외쳤지만, 제우스는 굳이 아테나를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테나는 회의실을 빠져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티스와 합류했다.
“...사퇴는 문제없이 한 모양이구나.”
“네. 어머니.”
“...마음의 준비는 됐니?”
메티스의 상냥한 목소리에 아테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회의실의 신들을 떠올리고는, 한결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티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테나와 함께 만신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