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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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
목적 바로 앞까지 드리워진 창날에, 포모르는 최대한 치밀어 오르는 본능적인 공포심을 억눌렀다. 겁먹은 모습을 보여주어선 안된다. 그는 당당해야 했다. 아테나를 직접적으로 속이든, 아니면 여신이 오기까지 시간을 벌든 해야했으니까.
“저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을 뿐입니다.”
힘겹게 말을 꺼낸 그의 말에 아테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찔러버리려는 듯이 팔에 힘을 주었다.
포모르는 아테나와 눈을 마주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번 일이 도박이었기에, ‘아테나’가 책임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시작한 도박이었다.
도박이 실패한다면 그는 죽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그의 목표를 이루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어차피 실패한다면 모두 다 죽은 목숨이니까. 그래서 메티스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을 구하려면 목숨정도는 기꺼이 바칠 자신이 있었다.
그의 스승이 남기고 간 유지를 이어받는 것이다. 그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아테나는 그녀의 위협에도 겁먹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눈에 옅은 흥미를 띄웠다. 처음부터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메티스의 신도였기에 눈 감아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그 만이 돌아왔지만, 아테나는 금세 그가 배신을 했음을 눈치 챘다. 지혜의 여신인 그녀가 이런 상황에 대한 예측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상황을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귀환에 쓸 목걸이에 걸어놓은 마법으로 세크헤트의 동의 없이 목걸이를 가져간 것을 알아낸 시점에서 그가 일행을 배신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놔둔 것은 그 외에는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죽일 땐 죽이더라도, 정보란 정보는 전부 알아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번 작전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게 될 것이었으니까.
“여봐라! 당장 이 배신자 놈을...!”
“어머, 진정하렴.”
“어머...님?”
아테나는 어깨를 잡아오는 손과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나타난 메티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아테나의 손을 잡고 창을 내리게 했다.
포모르는 자신의 목젖에 닿을랑 말랑 했던 아슬아슬 상황이 끝난 것에 안도하며, 목을 매만졌다.
“오랜만이구나, 아테나. 잘 지냈니?”
“...어머님이...시키신 일이었습니까?”
“그렇단다.”
“대체...왜 그런 짓을 하셧습니까!”
아테나는 격앙된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메티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메티스는 분노한 딸의 모습에 곤란한 듯이 미소를 짓다가, 아테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도 알지 않니? 이미 승산은 없다는 걸.”
“그건 해봐야 아는 일이지 않습니까!”
“네 아버지와 다른 신들을 보지 않았더냐? 저들은 이곳에서 호의호식 하느라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잖니. 이젠 저들에게 남은 건 허울만 좋은 신이라는 위치와, 오만함 뿐 이란다. 그들이 뿌리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단다. 그 곳도 결국 이곳처럼 변할 거란다.”
“꼭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저희는 이곳에 갇혀 말라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테나,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니?”
“방법이 있다면 이미 진작에 실행했을 겁니다.”
아테나는 메티스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냈다. 수백 년 동안 찾아내지 못한 방법을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걸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녀가 지혜의 여신이라고는 하지만, 지혜의 여신이 그녀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어머니라도, 그런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나도 이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오직 이주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메티스는 말을 끊고는, 포모르를 손짓으로 불렀다. 포모르는 메티스의 손짓에 그녀의 앞에 섰다. 포모르는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메티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포모르, 아가야. 너는 골목으로 가보렴. 신들이...일을 벌이기 시작했단다.”
“일...말입니까?”
“그래. 빨리 가지 않으면 네 친구들이 위험하지 않겠니? 겸사겸사 여관에 있을 내 사서에게도 전달하거라. 이제는 정말로 세상을 바꾸어야 할 때라고.”
“...알겠습니다.”
아테나는 포모르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메티스에 의해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아테나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메티스를 노려보았다.
“저한테, 어떻게...이러실 수가...있습니까?”
포모르가 있어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녀의 분노 섞인 질책이었다. 아무리 방법이 있다고 한들, 자신에게 한마디 없이 일을 벌이다니. 아테나는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메티스는 그녀의 분노어린 말에도 그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한 것 같구나. 하지만 내가 방법을 찾아낸 것은 너를 위해서였단다...”
“어째서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너는 거짓말을 잘 못하잖니.”
아테나는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메티스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성과 감성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것이 어머니인 메티스라면 더더욱.
“그래서,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 방법이 있다면 만신전에 먼저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럴 수 없는 방법이기 때문이란다.”
“도대체...무슨?”
“앉아서 이야기 하자꾸나.”
메티스는 그렇게 말하곤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손가락이 튕기는 것과 동시에, 고풍스러운 자식이 달린 목제의자 두 개와 테이블이 둘 사이에 놓였다. 메티스는 자리에 앉고는, 마법으로 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불러냈다.
“자, 앉으렴.”
아테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메티스를 쳐다보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테나는 어렸을 적부터 메티스의 분위기에 자주 휩쓸리곤 했다. 그녀를 낳고 기른 어머니이기도 했고, 결국 그녀의 지혜도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아테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그녀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방법 입니까?”
“아테나, 꺾꽂이라는 말을 아니?”
“나뭇가지를 잘라 땅에 심어 자라게 하는 방법이지 않습니까? 그걸 왜...”
아테나는 메티스에게 되묻는 와중에 답을 깨닫고 경악한 눈으로 메티스를 쳐다보았다. 메티스는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 세계를 완전히 뿌리세계와 분리시킬 생각이란다. 우리가 가지세계이기에 멸망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도 뿌리가 되면 되지 않겠니?”
“하지만,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있단다. 정말 쉽고도 간단한 방법이 말이야.”
쉽고 간단한 방법? 아테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두 세계를 분리하는 것은 정말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신들도 분리하려다 실패하지 않았는가. 이미 수백 년 전에 실패한 방법이었다.
그만한 에너지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세계를 완전히 별개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는 대륙 전체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긁어모아도 한참 모자랄 수준이었다.
결국 머리를 맞대던 신들도 그만한 에너지를 끌어올 방법이 없어 이미 폐기된 계획이었다. 그 정도의 에너지를 끌어올 방법이 존재한다고? 아테나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면 전쟁을 시작할 필요조차 없었을 테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메티스는 우아한 몸짓으로 찻잔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검지손가락을 피며 자신을 가리켰다.
“우리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