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170.나와 나의 이야기(3)
* * *
“여긴 어디야? 넌 왜 여기에 있고?”
대충 짐작은 가지만 확실히 하자. 내가 요 반년동안 너무 판타스틱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어서 확실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신경쓰여서 더 진행할 수가 없어.
“이미 눈치챈거 아니었어? 여긴 네 무의식이고, 나는 아시다시피 네 전생의 전생의 전생의 전생의 전생의 전생의 전생의 전생의 전생쯤 되는 여신 마하의 파편쯤 되는 존재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영혼의 일부를 떼어내서 만들어낸 백업용 디스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돼.”
뭔가 현대적인 설명이시네. 대충 내 먼 전~생이었던 여신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남겨놓은 백업용 데이터라는 건가.
“그런 게 왜 필요한 건데? 그리고 왜 가지세계쪽 사람이 그걸 가지고 있는데?”
“너 생각보다 멍청하구나? 그거야 당연히 예정된 계획이 어긋났을 때 그걸 바로잡기 위해 준비한 대비책이지. 그리고 가지세계 쪽에 있던 건...그런 상황을 이미 예상했었으니까.”
“어떻게?”
“원래 그런 물건은 적들의 손에 맡기는 게 가장 안전한 법이야. 언제 무기로 쓸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적들도 함부로 다루지 않거든.”
그런...가?
뭐 그 부분은 넘어가고, 대비책이라,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그거 꼭 내가 모르는 계획이 이미 있다는 것 같은 소리잖아. 도대체 무슨 계획이 있길래 백업용 사념체까지 필요한 건데?
“나는 계획이고 뭐고 하나도 모르겠는데.”
“뭐,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원래대로라면 각성하면서 저절로 알게 됐을 건데 말이야. 언제나 그래왔고. 근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지 뭐야.”
“문제?”
“듀라한이 된 것 말이야. 원래는 최적화를 위해 몸만 변하는 선에서 끝나야 했을 텐데, 내 망할 언니가 사고를 쳐버려서...자기 마음대로 네 몸을 개조를 해버려서 그 모양 그 꼴이 되버렸단 말이야! 원래는 그냥 성별만 바뀌고 머리색만 붉게 바뀌는 선에서 끝날게 더 복잡해져 버렸어!”
그래서 내가 듀라한이 된 거라고? 결국 모리안이 모리안 했다 이 말이구나. 그 할아버지가 모리안을 봉인해버린 게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네. 속이 검은 년이니 언제 통수를 칠지 모르잖아. 차라리 영원히 봉인해 버리는게...
“...그래서 내가 기억을 인계받고 얼마나 어이가 없없는데. 이 언니년이 옛날에도 허구헌날 사고를 쳐대서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는데 아직도 그 버릇 남 못주고 내 몸을 뺏으려 했단 말이야!”
“내 몸인데.”
“그게 그거지! 나도 너고 너도 나니까!”
그럼 이건 자문자답이냐. 나는 어이가 없어 짭유진을 흘겨보았다. 화내야 할 사람은 나 같은데 왜 이녀석이 화 내는 거지? 마치 맡아둔 것 마냥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좀 기분이 나쁘거든?
결국 좋든 싫든 나는 TS당할 운명이었다는 거잖아. 듀라한이 아니니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진짜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한순간이네.
“덕분에 이제야 내가 깨어나려고 하고 있는 거야. 점점 붉어지고 있는 머리가 그 증거지. 아직은 마개조한 부분이 덮어씌워지지 않아서 진행도는 느리지만...우리가 ‘마하’인 이상 한번쯤 거쳐가야 하는 일이니 그러려니 해.”
“그 ‘마하’로 덮어 씌워진다는 게 무슨 뜻인데?”
덮어씌운다는 말 조온나 불길하거든? 혹시 인격개조도 포함된 거냐? 나는 그런 하드코어한 취향 없는데...이 글러먹은 짭유진새끼야.
“별거 아니야. 너라는 자신은 남은채로 필요한 지식이랑 기억이 업로드 되는 정도니까, 다소의 성격변화는 있을 수 있어도 너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진 않아.”
아니 그것도 충분히 문젠데. 하지만 이미 듀라한이 되고나서 성격이 바뀌긴 했으니, 이제와서 좀 더 바뀐다고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 넘어가자.
“그래서 짭...아니다. 어쨋든 두 번째 질문인데, 마리아도 그렇고 모리안도 그렇고 그 저승사자도 그렇고, 무슨 계획이 있길래 이딴 짓을 하고 있는지 나한테 설명 좀 해주지? 맨날 나만 내버려두고 진행해서 나만 바보 되는 느낌이 없잖아 있는데.”
내 말에 짭유진은 턱을 긁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시선을 다시 내게로 향하며 대답했다.
“쉽게 말하면 세계 안정화 계획이야. 알겠어?”
“몰라.”
“멍청하긴...”
“그거 네 얼굴에 침 뱉기인 거 알지?”
“앗.”
니가 남한테 멍청하다고 할 군번이 아니네, 이 빡대가리야. 나는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짭유진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설명할거면 좀 제대로 하던가. 무슨 X반게리온도 아니고. 설명 ㅈ같이하면 안 된다는 거 못 배웠니?
니만 아는 지식 피로하지 말고 하나하나 A TO Z식으로 깔끔하게 이야기 하라고. 답답해라. 나는 머리를 들어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거 안하면 안 돼? 보기에 좀 그런데...”
“니가 익숙해지던가.”
난 머리랑 몸이 분리되는 생활을 한지 반년이라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여전히 들키면 안되는 것 때문에 귀찮긴 하지만.
“흠흠, 그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 세계를 위한 백신이라고 하는 게 가장 알기 쉽겠네.”
“예방접종?”
“응. 예방접종. 이미 신들이 힘을 잃고 뒤편으로 물러나 인간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인 세상이지만, 그래도 터질 일은 터지거든? 우리는 그런 일이 터지거나 터지기 전에 매 인생마다 한번쯤은 각성해서 일을 처리하고 다음 생까지 휴면상태에 빠지는 사이클을 반복해.”
“근데 내가 듀라한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맞아맞아. 불순물이 끼어든 탓에 백신이 바이러스가 된 상황이라고 해야하나.”
그거 좆된 거 아니야? 뭔가 되게 중요한 일 같은데 일에 차질이 생겼다는 거잖아. 솔직히 아직도 실감은 전혀 안 나지만.
“그래서 뭘 해야 하는 건데?”
“뿌리세계를 좀 더 견고하게 다듬고, 문제 될 부분이 있으면 쳐내고...”
“쳐내고?”
“예를 들어서, 두 번째 전생쯤이었나? 그때는 고대 종교들을 싸그리 박살내서 기독교 아래로 편입 시켰었지.”
왠 기독교? 갑자기 거기서 기독교가 왜 튀어나와? 도대체 기독교랑 이 세계에 백신 투입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자기 권력을 버리기 싫었던 신들이 가지세계로 도망쳤지만 여전히 그 신들의 영향력이 남아있었거든. 그걸 기독교의 이름으로 전부 통합시켜서 완전히 없애버렸지. 덕분에 기독교가 지금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종교로 살아남은 거야.”
뭔가 야사를 들은 느낌인걸. 대충 내 전생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다. 어쨌든 뭔가 세상을 구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거지? 전생용사 같은 건가.
“그런 대형 트러블을 매 인생마다 한 번씩 처리하는 건가.”
“그렇지. 원래는 나 말고도 전생하는 신들이 몇 명 더 있었지만, 다 죽거나 사라져버려서...사실상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거지. 이 세계에 남은 신들도 손꼽을 만큼 밖에 없어서 도움 받을 신도 거의 없고.”
“왜?”
“우리 같은 전생신들은 대부분의 신들에게는 아무래도 질투의 대상이거든. 기본적으로 뿌리세계에선 신이 육체를 가질 순 없지만, 우리 같은 전생 신들은 제약이 있긴 해도 육체를 가질 수 있거든.”
뭔가 이것저것 제약이 많네. 신이 육체를 가질 수 없는 건...당연한 일이네. 나는 그리스 로마의 12신을 떠올렸다. 남혐인 여신에 희대의 강간마에 미친 얀데레 태양신에 불륜 좋아하는 미의 여신님에 제대로된 신이라곤 손 꼽힐 만큼 밖에 없는 곳이잖아.
확실히 신들은 육체를 가지면 절대 안 되겠네. 생각해보면 고대 신화 치고 신들 성격이 정상적인 경우가 거의 없어.
“ 영혼 째로 살해당한 신도 있고, 현타가 너무 심하게 와서 아예 포기하고 가지세계로 넘어간 신도 있고...그래서 현역 전생신은 우리 하나 뿐이야.”
라스트 맨 스탠딩이냐. 뭔가 쓰잘데기 없이 있어 보이는 설정인데 개고생할거라고 돌려 말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네. 이정도 굴렀으면 됐지 또 굴러야 한다는 건가?
“그럼 마리아도 전생신이야?”
“마리아? 아...바이브 언니 말하는 거구나. 그건 그냥 지금 세계가 불안정해서 편법으로 눌러앉은 거지. 이 세계가 정상화 되면 현세에 남아있진 못 할거야.”
“그럼 나 편집자 다시 구해야 되는데.”
“그건 어쩔 수 없지.”
미리 알아봐야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 머리를 가슴위에 걸쳐놓았다. 가슴이 커지니까 푹신함이 확실히 달라. 이런 부분에서 가슴이 커진게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뭐, 어쨌든 그래서 우리 임무는 이 세계를 다시 정상화 시켜놓는 거지. 그걸 위해서 가지세계를 처리해야 하고. 원래는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가지세계를 쳐내는 작업을 했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지연되어버린 바람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혹시 저번처럼 백화점 무너지고 그런 거 아니지? 그건 좀 에바였는데.”
그런 거 한번 더 터지면 진짜 트라우마 생길 것 같으니까 되도록 피해 안가는 곳에서 터졌으면 좋겠는데.
“아마 경계에서 싸우게 될 테니 괜찮지 않을까? 우린 이 세계를 지키고 있는 신들의 도움을 받아서 경계를 보수하고 가지세계를 잘라내면 돼. 그것만 하면 우리가 할 일은 끝!”
“그 다음엔?”
“뭐, 우린 살던 대로 사는 거지. 신들은 전부 다시 뒤편에서 인간들을 지켜볼 테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인간들이 수습할 수 밖에 없을 거야.”
“벌어진 일?”
“변이자 말이야 변이자.”
변이자가 왜? 변이자는 그냥 돌연변이 같은 거 아니었나?
“변이자는 돌연변이 같은 게 아니야. 뿌리세계에 문제가 생긴 바람에 시스템이 혼란을 일으켜서 완전히 지우지 못한 전생의 정보가 뒤섞여서 변한 거야. 대부분은 보통 인간이었으니까 문제 없지만 아주 극소수는 아직 전생의 정보가 약간이라도 남아있어서...”
“그럼, 전생에는 다 저 종족들이었다는 뜻이야?”
“그러췌! 이제 말 좀 알아듣는구나!”
“또 맞을래?”
멀찍이 떨어지지 말고 이리 와라. 나는 뒷걸음질 치는 여신을 머리카락으로 묶어 다시 내 앞으로 끌고 왔다. 네 신체 능력이 저질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냐 이 짭유진아.
“이거 좀 풀고 이야기하면 안 돼? 원하는 대로 질문에 답도 해줬는데 이건 좀 너무한거 아니야?”
“그럼 나대지를 말던가.”
“우린...깐부잖아.”
“지랄하네.”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너랑 깐부이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마지못해 짭유진을 풀어주었다. 머리색만 달라서 내가 나를 묶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건 아니다. 진짜로.
“이제 세 번째 질문이지?”
“응.”
“뭔데?”
“세 번째 질문은...모리안이 굳이 우리 몸에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뭐야?”
내 질문에, 짭유진은 씁슬한 미소를 짓더니, 말없이 뒤돌아 서서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을 응시했다. 붉은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내가 말했지, 신들은 우리를 질투한다고...그건 자매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야.”
“...질투라니, 말이 너무 심하느니라. 나는 그저 예언을 이행하기 위해서 내려왔을 뿐이니라.”
“...언니.”
...어디에 봉인되있었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나는 정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상체가 쇠사슬로 묶인 모리안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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