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169.나와 나의 이야기(1)
* * *
“리온, 밥은 어때?”
“마시써요!”
나는 입가에 햄버그 소스를 잔뜩 묻힌 리온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냈다. 햄버그 스테이크 참 야무지게 먹네. 활발하고, 고기도 잘 먹고. 일반적인 엘프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이라, 엘프라고는 믿지 못할 모습이다. 애초에 ‘현실에 엘프가 어딨음?’이 보통이겠지만.
“주인님! 나도 스테이크!”
“옛다.”
나는 당근과 고기를 잘게 썰어 만든 햄버그를 집게로 집어 에포나의 입 안에 통째로 넣어주었다. 에포나는 입안에 넣어진 햄버거를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귀를 힘차게 펄럭이는 걸 보니 햄버그 스테이크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유진씨 완전히 엄마 다 됐는데요? 앞치마도 그렇고...”
“언니 앞치마 두르고 있는 모습이 어울려! 진짜 엄마 같아!”
유라의 칭찬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내 몫의 햄버그 스테이크를 입에 집어넣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구만. 씹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육즙에 달콤하면서도 살짝 새콤한 햄버그 소스가 입안을 가득 뒤덮는다.
며칠 먹을 분량 만들어 뒀으니 한동안은 귀찮으면 햄버그 구워서 밥이랑 먹어야지. 햄버그 위에 김치 올려서 밥이랑 같이 먹으면 그게 밥도둑이지. 만들기는 귀찮지만 한번에 대량으로 만들어 놓으면 며칠 반찬을 날로 먹을 수 있다고.
“햄버그가 유진씨 피랑 찰떡궁합이네요! 햄버그 특유의 기름기를 유진씨 피의 상큼한 맛으로 씻어내면서 상쾌한 기분이네요.”
내 피가...상큼해? 피가 상큼하다고? 내가 피를 토할 때 자주 맛보지만 그냥 비리기만 한데. 흡혈귀는 피에서 조차 색다른 맛을 찾아내는 건가. 하긴 영화 같은 거 보면 처녀의 피가 더 맛있다느니 하면서 쓸데없이 가려먹는 놈들이 자주 등장하기는 하는 구나.
특히 처녀한테 환장하더라. 흡혈귀들은 처녀충이 기본소양인건가? 니들이 유니콘이야?
“유진씨, 피 좀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리온이 놀라니까 안 돼.”
저번에도 한솔이한테 줄 피 모아놓는다고 방에서 피 토하다가 리온이 발견하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내가 진정시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알아? 그러니까 리온 앞에서 피를 토하거나 뱉거나 하는 건 금지다.
애들 정서에 안 좋아.
“밥이나 먹어.”
“씁...”
아쉬워하면서 입맛 다시지 마라. 내 피를 5리터나 받아 간지 얼마나 됐다고. 적당히 좀 마셔. 내가 혈액 디스펜서도 아니고 매번 피 뽑아내느라 얼마나 고생인데. 방송용 게임에서 고통 받으면 금새 양동이를 꽉 채우긴 하지만. 어쨌든 힘든건 힘든거다.
“햄버그를 직접 만들 생각을 한 게 대단한데...햄버그 직접 만들기 힘들다고 들었어요.”
“그런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다진 고기를 뭉치는 과정이 힘이 많이 들어서 그런 건데, 내 근력은 악력만으로 아무렇지 않게 철판을 찢어버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마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철판을 손가락으로 뚫어버리는 짓거리도 가능하고.
현실에서 X건을 쓸 수 있게 된 셈이다. 생각보다 쓸데는 없지만. 나는 햄버그를 만드느라 엉망진창이 된 주방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치우기 엄청 귀찮네. 치우는 건 유라랑 한솔이한테 짬 때리자.
솔직히 내가 개고생을 하면서 이런 스페셜한 메뉴까지 준비했는데 뒷정리 맡기는 것 정도는 할만 하잖아. 손님이라기 보단 친구나 가족에 가깝기도 하고. 이제 유라랑 한솔이 본지도 거의 반년이 다 됐는데.
“주방정리는 너희들이 해 줘. 나는 방송하러 가야하니까.”
“알았어요! 제가 이래 뵈도 집에서 설거지는 도맡아 했었다고요! 어릴 적엔 제가 배달음식 그릇을...”
“유라야, 저번에 다친거 아직도 기억하거든? 잘 할 수 있지? 저번처럼 접시 깨먹는 거 아니지? 접시 깨먹는 건 상관없는데 저번처럼 손 베여서 피 철철 흘리면 안된다? 맨손으로 설거지하면 손 부르트니까 꼭 고무장갑 끼고 하고...”
“아아 잔소리 그만! 저 잘 할 수 있거든요!”
“알았어 알았어. 한솔아 너는...옆에서 거들어 주고.”
“뭐에요? 왜 그렇게 못 미더운 눈으로 보시는 거에요?”
“네 집 꼬라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평소에 정리 좀 하고 살면 내가 이렇게 쳐다보지도 않지. 내가 불안해서 너한테 주방정리를 맡길 수가 없어. 집안일하곤 완전히 담 쌓았으면서 용케 자취생활을 하고 있단 말이야.
“잔소리가 점점 늘어나네...진짜 엄마 보는 거 같아.”
멀쩡한 사람 미혼모로 만들지 마쇼. 나는 칭얼대며 달라붙는 에포나의 갈기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곤,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컴퓨터를 키고,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한번 누른다, 수많은 알림들을 훎어보다 10분 전쯤에 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익숙한 번호였다.
거진 일주일 만이네. 기다리고 있던 전화라, 나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라쿤박사님?”
[드디어! 연락을! 받았군!]
“아, 식사 중이었어요.”
[그렇군! 미안하지만! 내일! 올 수! 있겠나! 준비가! 끝났다네!]
“네. 내일 아침에 찾아가면 될까요?”
[그렇다네! 그럼! 내일! 보도록! 합세!]
올 것이 왔군. 나는 책상 옆에 놓고 방치해두었던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머리카락으로 본체 전원버튼을 눌렀다.
“어서! 오게! 밥은! 잘! 먹었는가!”
“네. 구내식당이 괜찮네요.”
내가 가본 구내식당이라곤 내가 옛~날에 다니던 좆소밖에 없어서 그런지 구내식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점심식사였다. 역시 직장을 잡으려면 맛있는 밥을 주는 곳으로 잡아야지.
밥 먹고 살자고 일하는 건데 밥이 맛없는 건 월급 밀리는 것 만큼 선넘는 거야. 먹을 걸로 장난치는 새끼들은 허리를 밧줄로 묶어가지고 에포나 허리에 끝을 묶어서 질질 끌려다니 게 해야 돼. 그럼 다시는 먹을 걸로 장난은 안치지 않을까?
아, 그러면 죽나?
“자네! 준비는! 됐나!”
“넵. 준비 됐어요.”
사실 준비할 거라곤 비교적 편한 옷이랑 갈아입을 옷 몇 벌, 속옷이랑 세면도구 정도 뿐이 엇으니까 조촐하다. 결국 비교적 안전한 장소가 필요해서 기밀관리본부의 방을 하나 빌리는 것뿐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좀 떨리는데. 나는 상자를 만지작거리면서 은하와 라쿤박사를 따라 방에 도착했다. 예의 내가 다치면 입원하는 병실이었다. 여기 말곤 딱히 괜찮은 곳이 없기도 하고. 라쿤 박사는 실험실에서 자는 게 어떻냐고 제안하긴 했지만, 내가 미쳤다고 내가자는 모습을 트루먼 쇼도 아닌데 수십 명 앞에서 생중계 하겠냐?
나는 그런 수치플 같은 거 할 생각이 없어! 안 그래도 요즘 길거리 돌아다니면 밑도 끝도 없는 시선 공격에 가슴이 따가울 지경인데 선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잠옷 입고 자면 퍽이나 좋겠다. 내가 얆게 입고 자는 게 아닌데도 가슴이 커진 후로 티가 나더라. 전에는 옷으로 적당히 감출 수 있었는데...
가슴 줄여줘...
“그럼! 건투를! 비네!”
라쿤박사와 은하는 나를 병실에 데려다주곤 사라졌다. 나는 병실 문을 닫고, 병실 구석에서 옷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본격적인 잠옷은 아니고 돌핀팬츠에 검은색 티셔츠다. 리온 옷 살 때 같이 사놨었지.
딴 건 몰라도 돌핀팬츠만큼 편한 게 없는데. 움직이기도 편하고, 거슬리지도 않고. 뭔가 사각팬티 입고 돌아다니는 느낌?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여기서 입어야 하나 고민하긴 했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편하게 있고 싶어서...나 잘 때 평소에 입던 옷 안 입고 다른 옷 입으면 잠 잘 못자는 타입이야.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지?”
“아마?”
내가 이렇게 된 후로 한 번도 조용하게 넘어간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이제는 뭔 일이 터져도 체념하게 된다고.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허공에 떠서 나를 내려다보는 세연이를 옆으로 치운 뒤,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이사 가면 침대 새로 사야지. 이왕이면 여기 침대랑 같은 브랜드 걸로...”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으니 따뜻하다.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침대 하나는 끝내주네. 병실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나는 옆에 내려놓았던 상자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열고, 안의 머리카락을 쥐어서 이리저리 살폈다.
새치를 조종해 내 가 포기 편하도록 띄워놓고 비교 해봐도, 새치랑 똑같은 머리카락 같았다. 누가 보면 새치를 통째로 뜯어다 넣어놓은 것 같네. 이제 도대체 뭔지 이제 알아볼 시간이다. 나는 잠시 입안에 머리카락을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 눈을 꼭 감고 조심스럽게 입에 집어넣었다.
“우웁...”
머리카락 느낌 존나 이상해...
입안에 집어넣은 것만으로 기분을 잡치게 하는 감각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곧이어 내 의식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면제를 먹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참았던 수마가 한 번에 밀려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다녀올게...”
“잘 다녀와! 옆은 내가 지키고 있을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의식은 완전히 암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