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167.전쟁에 상도덕 따위는 없다(6)
* * *
“자네는! 누구인가!”
“*너가 누구냐는데.”
나는 라쿤 박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번역해 포모르에게 전달했다. 포모르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질문에 답했다.
“*포모르. 인간이다. 판테아 대륙을 살릴 방법을 찾아 건너왔다.”
“*판테아?”
“*우리가 사는 대륙 이름이다. 바다는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땅은 바싹 말라 풀 한포기 자라지 않고, 강의 물은 증발해 바닥이 보이는 대륙이지.”
거 완전 방사능 낙진겜에서나 볼법한 풍경이로구만, 혹시 거기에 X하비 황무지라도 있수? 여튼 저번에 들었던 멸망이 확정된 세계라는 게 이런 건가. 끔찍하네. 더 이상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거잖아.
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를 납치하러 온 이세계인들, 그들을 배신한 이 남자, 그리고 상자속의 붉은 머리카락. 수많은 퍼즐조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짜 맞춰진다.
내가 저 세계를 살릴 열쇠다 이건가? 내가? 왜? 기껏해야 듀라한일 뿐이잖아. 여신의 화신이라지만 그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차원을 넘어서까지 나를 잡으려 할 정도로?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번역! 해주게!”
“그러니까요...”
나는 포모르가 말한 이야기를 번역해 라쿤박사님에게 들려주었다. 라쿤 박사님은 대충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개판난! 곳이로군!”
“그 말 그대로긴 한데. 못 알아듣는다고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에요?”
“사실이지! 않나!”
“그렇긴 한데요.”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좀 순화해서 말할 생각은 없으신가. 아무리 못 알아듣는다곤 하지만 이러면 뭔가 말 못 알아듣는다고 놀리는 것 같잖아. 나 그렇게 인성 글러먹은 년 아니라고. 나처럼 친절하고 착한 듀라한이 어디 있는데...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포모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포모르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눈을 다시 뜨곤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이곳에 그대의 협력을 받기 위해 왔다.”
“*협력?”
포모르는 고개를 끄덕이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나와 스승은 대륙을 떠돌며 대륙을 되살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스승은 먼저 이 땅에 와서 그대를 찾아 해결방법을 강구하려고 한 걸로 알고 있다.”
어...그 스승, 그 안개 퍼트린 할아버지 맞지? 정신 차려보니 죽어 있...었는데...이걸 말해야 하나? 말했다가 적으로 돌변하면 어떡하지?
“*,,,반응을 보아하니 죽은 모양이군. 그대를 탓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쇠약해져 얼마가지 않아 죽을 노인이었으니.”
“*...어...그러니까...미안.”
죄책감이 없을 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인과과정이 어떻게 되던 적어도 내 몸이 죽인 거는 맞잖아. 저지른 건 모리안이겠지만.
“*괜찮다.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그대가 나를 도와준다는 전제하에, 나는 모든 것에 답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게 뭔데? 나도 이세계로 가야한다거나 그런 거는 아니지?”
“*아주 잠깐 뿐이다. 그저 현재 이세계와 우리세계가 벌이고 있는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 잠시 힘을 빌려주면 된다.”
“*힘을? 전쟁? 막바지? 뭔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쪽 신들이 옛날 옛적에 저쪽으로 넘어가서 깽판치다 이쪽으로 다시 돌아 오려한다는 거랑, 내 존재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하다는 것 말곤 전혀 모르겠는데.
“*모르고 있나? 이쪽 세계와 우리세계는 신들 끼리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어...들은 것 같긴 한데. 마리아가 이야기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막바지란 건 뭐야?”
“*이쪽 세계는 이미 한계치에 도달해 있다. 아마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세 달을 넘지 못하겠지. 그 전에 이 쪽 세계의 신들은 총공세를 펼칠 거다. 그 전쟁이 끝나면...우리 세계에 잠깐 넘어와서 권능을 행사해 주기만 하면 된다.”
“*권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알겠어. 내 신변에 문제가 없다면 그 정도야...그런데 넌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애가 신 같아보이지는 않고, 일개 인간이 알고 있기엔 너무 방대하고 중요한 정보 아닌가? 이런 걸 이 놈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나와 협력하는 여신이 있다. 메티스라는 여신이지. 메티스님은 신들을 미워하고 대륙을 살리고자 하는 입장이라, 나에게 많은 정보들을 제공했다.”
아 메티스는 어쩔 수 없지. 제우스 하는 꼬라지 보면 신들 싫어하는 게 단번에 납득이 되는 수준인데. 단번에 나를 납득시킬만한 여신이라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신화에서 메티스가 제우스 머릿속에서 나오긴 했던가?
“*근데 그러면 차라리 나를 그 습겹자 들이랑 같이 납치하는 게 더 낫지 않나? 내가 협력 안 해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막말로 내가 안 해 준다고 하면 배신이고 뭐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데 무슨 깡으로 그랬대. 내가 밀어붙이는 거에 약한 찐따가 아니었으면 협상 성립조차 힘들었을 텐데. 나는 이 남자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그 상자를 전달하기만 해도 내 목적의 반은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상자? 나는 품에서 상자를 꺼내들곤 상자를 들어 올린 채로 흔들었다.
“*이거?”
“*그렇다. 메티스님이 말하기를, 그 것만 전달하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하시더군.”
뭔가 농락당하는 느낌인데. 이 머리카락이 도대체 뭔데? 내 새치랑 색이 똑같은 건 알겠지만, 그것 말곤 잘 모르겠는데. 뭔가 끌리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나는 상자를 대충 책상위에 올려놓고, 상자를 열어보려 하는 라쿤박사의 앞발을 손가락으로 쳐냈다.
“*근데 그 총공세라는 거, 그 쪽 신들이 져야만 내가 그 땅을 살리니 마니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때론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아니, 너 돌아가면 배신자로 찍혀서 죽는 거 아니야?”
“*저 쪽이 내가 배신자라는 걸 눈치 챈다면 그렇게 되겠지.”
“*자신만만하네...”
“*뒤가 없으니까. 앞으로 묵묵히 전진할 뿐이다.”
“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 주게!”
아차, 둘이서 대화를 너무 오래했나. 라쿤 박사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성을 내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한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라쿤 박사에게 전달했다.
“복잡하군! 그래서! 어쨌든! 대충은! 이해했네! 흥미롭군! 자네! 혹시! 이세계에! 가거든! 사진 좀! 찍어오게!”
“아니, 가는 거 확정 아닌데...”
나도 생각할 시간 좀 가집시다 이 이세계라면 사족을 못 쓰는 라쿤아.
“사진! 하나당! 1억! 1억 어떤가!”
“제가 사진 하나는 기깔나게 잘 찍죠! 학교 다닐 땐 제가 애들 사진 찍어주는 담당이었다니까요?”
파노라마 촬영 각이지? 연속 촬영으로 예산을 거덜내주면 되는 거지?
“...우리도! 예산이! 부족하니! 한도는! 10억일세!”
“10억! 나중에 모른척 하기 없는 거 알죠?”
“나를! 뭘로! 보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변변찮은 대화인 것은 알겠군.”
“*크흠...그냥 일 관련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 뿐이야.”
정말 중요한 일이지. 원래 세상에 돈이 오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몇 없다고.
“*...더 물어볼 것이 있나?”
“*너 말고 다른 놈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신들이 뽑은 정예들이다. 각각 유명한 신들의 신도였지. 저들을 남겨두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 때를 봐서 뒤를 쳤다.”
다른 신들 끄나풀이니까 미리 싹을 잘라 버린 거라는 이야기구만. 다른 신들 귀에 내 눈 앞의 남자가 배신했다는 사실이 들어가면 아주 곤란해 질 테니까. 통수를 쳐서 다 죽여 버리든 아니면 이 세계에 고립시키려는 건가.
“*그럼 돌아 갈 때는 너 혼자서 돌아가?”
“*그렇다. 저들을 회유할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회유 할 수 없다면 그게 최선이다. 저 들의 처분은 그쪽에게 맡기고 싶군.”
“*뭐 우리 쪽에 정말 이세계인에 환장하는 축생이 있으니까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해 줄거야.”
“*...고맙다.”
“이보게! 내! 질문은! 번역! 안해주나!”
라쿤 박사는 아예 A4용지에 뭔가를 빼곡하게 적어 흔들고 있었다. 저게 다 질문이라고? A4용지를 수두룩 빽빽하게 채운 문자의 나열에 나는 정신이 어질어질해지고 말았다.
“이걸 다?”
“해주게!”
종이를 받아들고 확인하니, 질문만 무려 50개에 달했다. 아주 뽕을 뽑아 먹겠다 이거구만.
“*지금부터 이 라쿤이 물어보고 싶은 걸 하나 씩 물어볼 텐데, 곤란하면 넘어가도 돼.”
“*...잘 모르겠지만, 협력하도록 하지.”
그렇게 나는 포모르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가보도록 하겠다.”
“*어, 잘가...그런데 어떻게 돌아가는데?”
“*우리를 보냈던 여신이 복귀용으로 건네준 물건이 있었다. 그걸 사용해 복귀할 예정이다.”
“*아...그래. 잘 가고. 이왕이면 다시 만나지는 말자.”
“*...나도 그러길 바라지. 우리 둘이 다시 만난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 되었을 때 뿐이니.”
나는 실험실 한 가운데로 걸어가는 포모르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사다난한 하루가 이렇게 끝나는 구나. 쓸데없이 밀도가 높았던 하루라 당장이라도 집에가서 쉬고 싶었다. 육체야 팔팔하지만 정신이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 머리카락...을 한번 먹어보기도 해야 하긴 했다.
내가 생각을 마치고 포모르를 다시 쳐다보니, 포모르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중얼대고 있었다. 저게 차원이동용 도구 같은건가.
“정말! 흥미롭군!”
“아 예...그리고 라쿤 박사님.”
“무슨! 일인가!”
“며칠 후에 방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여기는! 여관이! 아닐세!”
“그, 저 남자가 건네준 상자에 있는 물건을 좀 써보려고요.”
“방은! 입원할때! 쓰던! 병실로! 주겠네!”
“감사합니다. 저는 가볼게요...”
“조심히! 들어가게!”
이제 진짜 끝이지? 나는 터벅터벅 걸으며 기밀관리본부를 빠져나와 택시를 불렀다. 편하게 가려면 택시가 최고지.
“OO시 OO동 OO사거리 앞으로 가주세요.”
나는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둡지만 사람이 사는 도시는 여전히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점점 감기는 눈꺼풀을 막지 않고 내려가게 내버려 두었다.
한 숨 자면 도착하겠지...애들은 저녁 잘 챙겨 먹었을까...
의식이 점점 흐려진다.
나는 택시기사가 틀어놓은 음악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빠져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