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188화 (188/352)

〈 188화 〉 166.전쟁에 상도덕 따위는 없다(5)

* * *

[정말! 할! 이야기가! 산더미! 같군!]

“그 말에 동의해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격하게 동의했다. 시간상으로는 한 시간 남짓이지만, 이런 미친 상황이 주택가에서 벌어졌다는 것에 나는 한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 평범하게 살게 해줘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수갑을 짤랑짤랑 거리던 배신자가 중얼거렸다. 애는 진짜 뭐지. 뜬금없이 배신하는 것도 그렇고, 순순히 잡혀주는 태도도 그렇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나는 그를 잠시 흘겨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저엉말 할 이야기가 많으시다는 데.”

나는 열심히 뒷수습을 하고 있는 기밀관리본부 요원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역한 거 참아가며 어떻게든 정리 하고 있었는데, 이런 쪽 전문인 기밀관리 본부 쪽에서 알아서 해준다고 하니 다행이지 뭐야.

진짜 막막했는데. 난 일반인인데 어떻게 피투성이 현장을 청소해? 차라리 숲 같은 곳이었으면 모를까 콘크리트로 된 건물 옥상을 나 혼자서 청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 어지럽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애초에 잘린 팔이나 반으로 갈려버린 시체 같은 걸 만질 깜냥도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 정신 나갈 것 같아서 어떻게 만져! 당장 지금 저기서 수습하고 있는 요원들도 창백해져서 토하기 직전이잖아. 내가 자른 건 아니지만 좀 미안한데.

나는 끔찍한 광경에게서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일단 저 몰린 인파를 좀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슬쩍 옥상 아래쪽의 길가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레 폭발로 일어난 소란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웅성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건물 옥상이 기본적으로 우리 집보다 낮은 2층 건물이었기에 필연적으로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사건은 수습할 수 있는 거야? 이걸 수습하려면 그 흔하디흔한 설정인 단체 암시 같은 게 필요할 수준인데. 존나게 편의주의적인 마법 같은 게 있어야 그나마 수습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든! 할! 걸세!...]

반쯤 해탈한 목소리로 말하는 라쿤박사를 보면 아마 이번 건은 라쿤 박사로서도 처리하기 굉장히 난감한 사건인 것 같았다. 나 같아도 그럴만하다 생각하는 게, 목격자가 최소 두 자릿수, 상황에 따라선 세 자릿수다.

영화 촬영이라고 속이기엔 마법과 선혈이 난무하는 화려하고 난폭한 싸움이었고, 얼버무리기엔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일부러 협력하는 척 하면서 인적 드문 곳으로 갔어야 했나. 하지만 저쪽이 선빵을 갈겼는데 어떡하라고. 나는 요원들에 의해 철저하게 포박당한 습격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두명은 집중 치료 받을 것 같고. 여성쪽은 그냥 기절한 거고, 한명은...어쨌든 우리는 일단 수습을 요원들에게 맡기고 기밀관리본부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 처참한 살해현장에서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었으니까. 내 멘탈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도 내 얼굴에 드러난 건지 은하는 나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사람이 없으면 그냥 창문으로 타고 들어가면 그만인데, 밑의 인파 때문에 그렇게 하긴 힘들었다. 지금 나 맨발에 피투성이라 좀 그런데. 그 부분은 어떻게 하려고...

“제가 적당히 사람들을 물릴 테니 유진씨는 들어가서 외출 준비를 해주실래요?”

...역시 겜창에 X수긴 해도 여신이라 그런 능력 정도는 있나보네. 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마리아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마리아는 먼저 현관문 앞에 나오더니, 문자 그대로 눈을 빛내더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마리아가 군중을 훑어보자마자 점점 흩어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자, 돌아가요.”

“...그거 나도 할 수 있어?”

화장실에 줄 섰을 때 유용해 보이는데. 놀이공원 같은 데서도 좋아 보이고. 나도 그런 편의성 개쩌는 것 좀 배우고 싶어! 실제로 써먹어봄직한 걸로! 이 밖에서는 써먹지 못할 머리카락 촉수플레이 말고!

“어...하실 수는 있을 텐데, 배우는데 오래 걸리실 거예요...”

아니 생각해보니까 너 저번에 그런거 못한다며? 날 속인거야?

“야, 저번에 최면이나 암시같은 건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

“마법으로는 잠깐이나마 할 수 있기는 해요. 그냥 잠깐 주의를 돌리고 안면인식장애를 잠깐 거는 저주의 개념이라 최면이나 암시라 부를 만큼 거창한 것도 아니구요. 이거 한번 쓰면 한동안 마법도 못써요. 이 몸이 이런 마법이랑 상성이 나빠서.”

저주가 더 대단한 거 아닌가?

“잠깐, 그러면 기억은?”

“...아마 그대로 남겠죠? 근데 저희가 누구인지는 제대로 기억 못할거에요.”

다행인...건가?

“*나는 어떡하면 되나?”

“*어...일단 저기 차에 타면 되겠네.”

나는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차를 가리켰다. 일단 애는 이거 탈거고 나머지는 수배해온 호송차 탈것 같은데. 나는 둘을 내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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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나도 가면 안 돼?”

“놀러가는 거 아니니까 안 돼. 여기서 리온이랑 유라랑 놀고 있어. 알았지?”

“알았어!”

“그래그래, 착하다.”

나는 에포나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집을 나섰다. 곧장 계단을 내려가니 수습을 다 한 건지, 은하가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씨, 빨리 가시죠. 박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은하의 안내를 받아 뒷좌석에 탔다. 내 반대편 자리에는 그 배신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묘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세계인이라 길거리가 신기한 건가. 하긴 저쪽은 중세판타지 같아 보이니까 그럴 만도 했다.

기밀관리본부로 가는 동안 차안은 조용했다.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하필이면 뭐가 꼬인 건지, 길이 막혀서 시간이 지연되고 있었다.

“...은하야, 그 다른 습격자들은?”

“두 명은 부상이 심해 구급차로 먼저 보냈습니다. 여성 쪽은 다른 차로 호송중입니다.”

그런가. 하긴 그 두 명은 누가 봐도 치명상에 가까웠기에, 빨리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죽어서 나랑 대면하게 생겼으니. 살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내가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으니 오히려 그쪽이 더 효율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내가 듀라한이든 뭐든 간에 일단 현대식 교육을 받고 자란 현대인이다. 아무리 종족이 달라졌다고 한들 감성이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좀 폭력에 관대해진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어쨌든 그렇다.

나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배신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창밖을 흥미로운 듯이 보고 있는 모습이 화보 같아 보일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다. 판타지 소설 주인공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면상이로구만.

“*...할 말이 있나?”

“*...어, 음...이름이 뭐야?”

깜짝이야. 나는 깜짝 놀라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적당한 질문을 내뱉었다.

“*포모르. 성은 없다. 성이란 게 의미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포모르...포모르...왠지 낯설지만 익숙한 이름을 나는 입속에서 몇 번 굴려보다가, 다시 목안으로 집어넣었다. 뭔가 걸리는데, 그게 뭔지를 알 수 가 없어 나는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지만,

저 포모르라는 인간을 볼 때마다 마음이 뒤숭숭한 게 뭔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정작 모르니까 문제지.

“*내 이름은 이유진. 유진이라 불러.”

“*...생각한 것과 다르군.”

“*뭐가?”

“*나는 여신이라고 하기에 오만한 모습을 보여 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생각보다 평범하군.”

여신은 개뿔. 내가 여신이었으면 가장 먼저 사이비종교 세워서 십일조 명목으로 돈을 뜯어서 건물주가 되었을 거다.

“*여신이고 나발이고 난 하나도 몰라. 내가 왜 여신이야?”

“*...마하, 라는 이름엔 짐작이 없나?”

마하...예전에 우리 삼겹살여신님이 말했던 것 같은데. 막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들어본 적은 있어. 그래서 그게 뭔데?”

“*흠...그 상자의 머리카락을 삼키면 알고 싶은 걸 전부 알 수 있을 거다.”

뭐? 나는 아까 챙겨놓았던 상자를 품에서 꺼냈다. 머리카락을 먹으라니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이젠 살다 살다 머리카락까지 먹으라고? 머리카락 먹는 건 잠꼬대하다 머리카락이 입에 들어가는 거 하나로 족하다고.

나는 상자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할 거라면 안전이 확보된 곳에서 해야겠지. 이 머리카락을 먹으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하는 게 좋았다. 되도록 그 병실 같은 곳에서 말이야.

“도착했습니다. 들어가시죠.”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나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폈다. 차안에 오래 있으면 몸이 뻐근하다니까. 포모르의 존재 때문에 더 긴장했던 것도 있는 것 같았다. 나와 포모르는 요원들을 따라 기밀관리본부로 진입했다.

이야기는...박사님 집무실인가.

“잘! 왔네! 여기에! 앉게!”

“*...저 동물은 뭐지?”

“*...머리가 아주 똑똑한 라쿤?”

근데 라쿤이란 동물이 저기에도 있나? 눈치가 빠른 건지 포모르는 내 말을 대충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비된 의자중 하나에 앉았다. 나도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폰을 책상위에 놓고 양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라쿤박사를 쳐다보았다.

“정말! 골치가! 아프군! 자네는! 정말! 사고를! 몰고! 다니는! 군! 조력자가! 없었다면! 우린! 아주! 곤란했을! 걸세!”

“마리아요?”

“그렇네!”

“아는 사이였어요?”

“우리가! 어떻게! 10년 가까이! 변이자들을! 숨길 수! 있었다고! 생각! 하나!”

듣고 보니 그렇네. 아무리 정부기관들이 전력으로 숨기려고 해도 뭐 하나 삐끗하면 SNS나 X튜브가 자리 잡은 요즘 세상에 공개되는 건 시간문제나 다음 없었을 텐데, 신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면 말이 된다.

기밀관리본부는 내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럼 이야기가 좀 더 쉬워지려나. 신들의 존재를 몰랐다면 설명할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우선! 자네는! 고생했네! 그래도! 자네가! 막은! 덕분에! 더! 위험한! 사태로!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네!”

정확히는 마리아랑 배신자 비중이 크긴 한데.

“그게 그렇게 되나요?”

“생각해보게! 그! 치들이! 도심에서! 그랬다면! 난리가! 났을! 걸세!”

확실히 그랬으면 전 세계적으로 혼란에 빠졌겠지. 안 그래도 요즘 세계가 개판인데 한층 더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을 거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각국! 정상들이! 논의하고! 있는! 사안이! 물거품이! 될! 뻔했네!”

“네?”

그거 국가 기밀 아냐? 나한테 말해도 돼? 이거 나까지 끌어 들이려는 빌드업 아니지? 귀찮은 일은 싫은데! 나를 그런 빌드업에 끼어들게 하려고 하면 10억만큼 화날 수 밖에 없어!

“잊어주게! 하여튼! 이번 건은! 자네가! 도와주어야! 하네! 우리! 쪽에선! 저쪽과! 대화! 할 수! 없으니!”

“심문이죠?”

“맞네! 그리고! 옆의 남성과도! 이야기를! 할! 테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번역! 해주게!”

아 옙, 라쿤 박사와의 대화를 끝마친 나는 고개를 돌려 포모르를 쳐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무뚝뚝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던 포모르는 내가 쳐다보자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보았다.

“*이야기는 끝났나?”

“*박사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데, 대답해 줄 수 있어?”

“*내가 대답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포모르를 향한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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