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184화 (184/352)

〈 184화 〉 162.전쟁에 상도덕 따위는 없다(1)

* * *

“아테나님. 부름을 명받아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알현을 허락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들어오도록 하거라.”

테이블에 올려진 진상된 탱글탱글한 포도알을 입에 집어넣으며, 아테나는 알현실로 들어온 5명의 인물들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린 후에 뽑은 정예들이었다. 이번 작전은 향후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도 있는 중요한 작전이었기에, 각 신들 아래에서 내로라 하는 부하들을 추려낸 끝에 선발된 인물들이었다.

단 한명, 포모르라는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추천된 사내를 빼고. 그녀는 일행의 가장 뒤에서 말없이 예법을 취하고 있는 포모르에게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가, 이내 일행의 가장 앞에서 개를 숙이고 있던 인물의 이름을 불렀다.

“이발디...라고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아테나 여신님.”

“고개를 들라.”

아테나는 냉정한 눈빛으로 이발디를 훑어보았다. 묠니르를 만들었다는 대장장이의 이름을 가진 토르가 자랑하는 전사답게, 그의 몸은 바늘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조각 같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근육이 장식이 아닌 듯, 큰 흉터가 얼굴을 가로지르는 험상궃은 외모는 노련미를 풍겼다.

매번 전사 타령만 하는 토르가 보낸 전사이니 실력하나는 확실하겠군. 평소에 대립각을 자주 세우던 토르라 버림 패로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꽤나 쓸 만한 자를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아테나는 생각했다.

언제나 대립각을 세우긴 했지만, 이번 임무는 정말 중요했으니까. 신들의 존망이 걸린 일이었다. 이 세계를 버리고 뿌리세계로 돌아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선 두 세계를 가르는 경계를 넘어야 했고, 그 경계를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부수는 방법은 내부에서 부수는 것이었으니까.

어떤 것이든지 바깥보단 안에서 부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법이다. 아테나는 전략의 신이었고, 지혜롭기로는 이 만신전에서도 손꼽히는 신이었다. 다른 신들의 견제만 없었다면 이미 신들은 뿌리세계에 도달했겠지.

그렇기에 아테나는 이번 작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 수많은 견제 속에 겨우 잡은 기회인데,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그녀는 실각당하고 뒤편으로 물러나 손가락이나 빨아야 할 처지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녀가 판단하기에는 확실했다. 수십 년 동안 뿌리세계의 경계를 뚫는 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고, 아테나는 능력을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신들은 큰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제는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는 신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것보단 그녀와 헤스티아, 헤라와 데메테르를 제외한 다른 신들이 잦은 사고를 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이 친 사고로 인해 제국의 멸망이 가속화 되고, 대륙이 황폐화 되는 속도가 빨라졌으니까.

같은 12신이 아니었다면 아테나는 12신이고 뭐고 아폴론의 머리에 창을 꽂아버렸을 것이다. 자기 사랑을 안받아준다고 권능을 남용해서 흉년을 일으키는 미친 짓을 저지른 신을 그녀는 같은 신이라 인정하기가 싫었다.

다른 신들은 최소한 잘못을 저질렀으면 눈치라도 보는데 그 치는 눈치를 보지조차 않으니, 아테나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었다. 당장 그녀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그녀의 뒷배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오래전에 지휘권을 상실했을 것이다.

“...이발디. 그대는 천둥의 신이 선택한 전사로서 이 임무를 성공시켜야 한다. 그대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아는가?”

“외람되지만, 저는 아테나 여신님을 뵈어 가르침을 청하란 소리만을 들었사옵니다.”

“흠...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알았느니라. 그대들은 이제부터 이세계에 가 어떤 여신을 찾아야 한다..”

“이세계, 그건 책에서나 나오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놀랍네요.”

아테나의 말에 4명이 동요하며 술렁였다. 아테나는 유일하게 혼자서 동요하지 않은 남자, 포모르를 잠시 의심스러운 듯 쳐다보고는, 다시 이발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세계 말입니까?”

“그렇다. 그대들은 이세계로 건너가 한 여신을 찾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 여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하느니라.”

“...여신을 말입니까?”

여신을 잡아오라니. 상상조차 못한 임무의 내용에 이발디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토르를 섬기는 자로서 그는 수많은 신들을 본 적이 있었기에, 신들의 힘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토르만 해도 무기를 들고 전력으로 달려드는 자신을 맨손으로 어린애 다루듯이 제압하지 않았던가. 이발디는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경외감과 함께 미약한 공포심을 느꼈다.

이발디의 표정이 워낙 투명했기에, 아테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여신은 아직 제대로 자신을 자각하지 조차 못했을 터이니. 그 힘은 미약할 것이니라. 그대들은 그 여신의 ‘머리’만을 가져오면 된다. 그 머리가 있어야 경계를 허물 수 있을 테니...”

“머리, 말입니까? 살아있는 여신이 아니란 말입니까?”

머리만을 가져오란 이야기에 이발디가 의문을 표했다. 혹시, 살아있는 여신이 아닌 여신의 유해를 가져오라는 건가? 적어도 그의 상식에선 아무리 연약해 보이는 여신이라도 인간정도는 가볍게 다룰 수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살아있는 여신이니라. 다만, 그 여신의 몸과 머리는 붙어있지 않으니, 머리만을 강탈하기만 하면 되느니라.”

“아, 알았습니다.”

이발디는 여신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아테나가 잠시 숨을 돌리려는 듯 넥타르가 담긴 잔을 들어 올리자, 학자 같은 차림새의 남성은 궁금한 것이 있는 듯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한 가지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것이냐?”

엔키의 신도로군. 그는 남성의 옷에 그려진 엔키의 문양을 보며 생각했다. 그의 신도로서 방대한 지식을 이유로 선발된 자였던 것을 아테나는 기억 속에서 떠올렸다.

“그 여신에게 특별한 특징이 있습니까? 저희가 그 여신을 찾기 위해선 눈에 띄는 특징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테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한 켠에 놓여있던 상자를 이발디의 앞에 밀어냈다.

“열어보거라.”

“예. 여신님.”

이발디는 아테나의 말에 따라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이것은...”

“그 여신의 머리카락이다. 이 머리카락을 매개체로 사용하면 위치를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니라.”

피처럼 강렬한 붉은색을 자랑하는 머리카락이 이발디의 시선을 빼앗았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홀린 것처럼 쳐다보던 이발디는, 여신의 헛기침에 정신을 차리고 머리카락에서 눈을 뗐다.

“역시 아테나님. 아테나님의 지혜에 탄복하였사옵니다.”

이발디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닫곤 품에 집어넣었다. 뒤에서 작게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발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신의 머리카락 뭉치라니, 이보다 더 귀한 물건을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겠군.

뒤에서 조용히 여신과 남성의 대화를 관망하던 포모르가 생각했다. 신의 신체 일부는 호사가 들에게, 그리고 종교인들에게는 성 몇 채 값을 내서라도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었다. 적어도 그는 파르사드에게 그렇게들은 적이 있었다.

제국의 저장고에는 그런 신들의 유해가 한가득 쌓여있다고.

“그 머리카락을 이용해 그 여신을 찾아 내거라. 그리고 그 여신의 머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하면...남은 머리카락을 그 여신의 입에 집어넣으면 된다. 그리고...갔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돌아오면 되느니라.”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그대들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내일 아침, 이른 동이 틀 때에 출발하거라. 자 가거라. 마지막을 떠나기 전에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럼 저희는 물러나겠습니다.”

이발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머지 인원도 일어나 아테나에게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막중한 임무로군.”

“정말 흥미로운 임무로군요. 이세계의 존재에, 이세계의 여신을 납치하는 임무라니...”

“어떤 임무이든 신이 내리신 임무이니 필히 완수해야 할 걸세.”

엔키 신의 신도, 아트라하시스가 이발디에게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몇 번 정도는 말을 섞은 사이였다. 그 둘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포모르는 그이 어깨를 건드리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조용히 아테나의 말을 듣기만 하던 여성이었다. 갈색피부를 한 온화한 인상의 여성은 웃는 낯으로 포모르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당신은 어떤 신의 신도신가요?”

“메티스님의 신도다.”

포모르는 메티스가 건네준, 목걸이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어떤 신의 신도냐고 질문했을 때 보여주라고 메티스가 건네준 목걸이였다. 당장 신들의 파벌이 나누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 신도들 또한 그 파벌의 영향을 받아 믿는 신에 따라서 행동을 취하곤 했으니까.

다행히도 메티스는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신이라, 딱히 다른 신들이 적대하지 않는 다는 점이 포모르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다. 특정 파벌에 속한 신의 소속이었다면 시작부터 불협화음이 일어났을 테니까.

“메티스님이라면 오래전부터 은거중이시라던...”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은거했던 신이라, 그녀는 메티스라는 여신이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그렇다.”

“저는 세스헤트라고 해요. 토트신의 사제로서 마법을 배우고 있답니다.”

“...포모르. 메티스님의 신도다.”

무뚝뚝한 분이시로군요. 세스헤트는 그렇게 말하곤 나머지 한명, 이중에서도 유독 튀는 복장을 한 청년을 쳐다보았다.

“음, 뭐? 나한테 반하기라도 했어?”

“아니요. 혼자서 조용히 하고 계시기에 쳐다본 것뿐이랍니다. 그쪽 분은 헤르메스님의 신도이시죠?”

“역시 토트신의 사제답게 바로 알아보는구만. 맞아. 헤르메스신의 신도 아스칼라보스다. 보시다시피 염소 수인이야.”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의 다리로 향했다. 인간의 관절이 아닌 염소 수인 특유의 역관절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염소 수인은 처음 보는군.”

“그거야,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나마 여기서는 자주 볼 수 있는 편이라고.”

“이렇게 만난 거 한솥밥을 먹을 사이니 잘 해보도록 하지.”

“나도 이런데 와서 쓸데없이 파벌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그나저나 이세계라니, 신기한게 많겠지?”

“확실히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여신님의 임무가 우선입니다.”

“나도 안다고.”

엔키신의 신도, 아트라하시스가 아스칼라보스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렇게 5명이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건가.”

“별 탈 없이 성공했으면 좋겠군.”

“걱정말라고. 헤르메스님 신도중 최고의 재주꾼인 아스칼라보스가 있으니 말이야.”

“...그런 말 한 사람치고 실속있는 사람은 본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뭐?”

“그만! 일단 여기서 헤어지고 오늘 자정에 만신전 입구 앞에서 만나도록 하지!”

불협화음의 조짐이 보이자 이발디는 두 사람을 떼어내고, 강제로 해산을 명했다. 두 사람은 툴툴 거리면서도, 이발디의 말을 따라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포모르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메티스가 있는 도서관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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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어떻게 되었니?”

도서관으로 돌아온 그에게, 메티스가 물었다. 그는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문제없이 잘 진행되었다고 대답했다. 메티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그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첫 단추를 꿰었구나. 아이야. 이세계로 넘어가면 할 일이 아주 많단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선 그 여신의 힘이 필요해.”

“...도대체 어떤 여신이기에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강력한 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그 여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포모르는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일에 끼어든 이상 너도 알 권리가 있겠구나. 그 여신은 말이지...우리들 사이에서는 괴짜로 불리곤 했지. 자신의 자매들을 제외한 다른 신들과는 잘 어울리는 여신이 아니였단다. 아주 특이한 여신이었기 때문이었지.”

“특이한...?”

“그렇단다. 우리처럼 신의 육신을 가진 여신이 아니라, 신의 영혼으로 인간의 몸에 깃드는, 전생을 반복하는 여신이었단다.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를 자각할 때쯤이면 그녀의 상징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제 할 일을 하곤 했지.

...그녀의 이름은 마하였단다.”

메티스는 말을 끝맺고는 차로 목을 축였다. 마하...아주 재밌는 이야기로구나. 어쩌면 정말 얄궂은 인연이 될 수도 있겠구나.

“아이야, 너는 그 여신과 악연으로 얽혀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악연, 말입니까?”

포모르는 갑작스런 메티스의 말에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메티스는 조용히 그를 보며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명심하렴. 운명은 언제나 절대 부술 수 없는 족쇄처럼 보이지만,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틀어질 수 있단다. 운명으로 얽힌 악연이라도, 때로는 인연이 될 수 있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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