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159.세 명이 모이면 뭐라도 된다(1)
* * *
리온, 아니 이제는 이나리가 된 엘프 꼬마의 일도 적당히 해결되고 나름 무난하게 방송을 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그럭저럭 그동안 밀린 채신 게임들 하니까 며칠 동안 방송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어서 좋더라.
역시 X아블로2는...전설이야...쉬펄 거기 앉아서 들어봐라. 내가 과거에 개쩌는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라떼는 말이야...바바가 오양검들고 휠윈드 돌면 다 죽었어...어? 오브도 쿨타임 같은 거 없었다고...에잉 쯧쯧.
듀또죽 듀또죽 신나는 노래~모두 함께 불러보자~
듀라야 또 죽냐!
또 죽었죠? 죽었죠?
“아 저 새끼 뭔데? 죽이면 폭발하는 원주민 해골이라니 이거 근접혐오야! 내가 체력에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데 무슨 맞을 때마다 죽창이라도 맞은 것 마냥 피가 3분의 1씩 까이는 건데?”
그런 주제에 단체로 달려드네? 근데 다른 몹 들도 같이 달려드네? 누가 옛날 게임 아니랄까봐 더럽게 불합리하다. 눈보라사는 근딜을 살려라! 시공에서 전살자 소리 듣는 X냐는 강한데 왜 여기 대머리 바바는 약한 전사냐!
이거 대머리 혐오야! 눈보라사는 당장 대머리 혐오를 중단하라! 밀리도 살고 싶다! 근본 밀리 바바를 살려내라! 아 거기 지금 성희롱 사건으로 아직도 소송 진행 중이던가. 씁...사랑했다 시발년아! 그 왕년에 잘나가던 눈보라사는 어디가고 추억능욕 전문 회사가 되어버렸을까. 씁쓸하네.
“후. 여러분은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암걸려요...”
ㄱㅊㄱㅊ 어차피 다 소서 팔라임 ㅋㅋㅋㅋㅋ
ㄹㅇㅋㅋ 8인방 가면 다른 직업이 하나 있을까 말까임 ㅋㅋㅋㅋ
그 와중에 맨땅 야만용사라니, 당신은 혹시 변태입니까?
“니들이 소용돌이를 알아? 아냐고! 소용돌이는 로망이야! 거대한 무기를 들고 빙빙 도는 게 전사들의 로망이라고! 봐! 지금도 X아블로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전사들은 다 빙빙 돈다고! 빙빙 도는 건 전사들의 기본 소양이야! 돌지 않는 전사는 전사가 아니라고!”
구라 같지? X아블로 이후로 전사들은 이름은 달라도 다 팽이마냥 빙빙 돌고 있다고! 이제 소용돌이는 모든 전사들의 국룰이 되었다 이 말이야!
기본 소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묘하게 말이 되는 것 같은 말이네 ㅋㅋㅋㅋㅋ
ㄹㅇ 국룰이긴 함 ㅋㅋㅋㅋㅋ 전사 캐릭터는 꼭 도는 기술 하나씩은 있음 ㅋㅋㅋㅋㅋ
씁. 나도 그냥 소서할걸...쓸데없이 방송각 뽑아보겠다고 바바 했는데 어릴 때 했을 때는 어렵고 쉽고 그런 걸 몰라서 그냥 했었는데 맨땅 바바가 이렇게 괴로울 줄은 몰랐지! 내 추억속의 바바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 오른쪽 키에 소용돌이 갖다놓고 돌기만 하면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다 쓰러졌단 말이야!
몹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아서 마나 포션 빨아야 하는 조루전사가 아니라! 나는 지옥난이도에 와서 눕방전사가 되어버린 바바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 RPG에서 비주류 직업은 하지 마세요 제발...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현실은 차라리 누가 몰래 꿀이라도 빨기라도 하지 게임은 그냥 구리면 구린거에요!
“으...템은 템대로 안 나오고, 몸은 몸대로 약하니까 할 맛이 안 나네. 어차피 시간도 끝날 시간 다 됐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벌써 그렇게 됨?
내일은 방송해요? 요즘 방송 며칠 쉬어서 다시보기만 줄창 보고 있어요 ㅠㅠ
ㄹㅇ...아 매일 방송 해달라고 ㅋㅋㅋㅋ
“아니 저도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니라서...제가 인생에 마가 꼈는지 온갖 사건에 휘말린다니까요? 저라고 방송 안하고 싶어서 안하는 게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돈미새인 제가 굳이 방송을 띄엄띄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까놓고 말해서 인터넷 방송인은 매일 방송하는 게 돈을 제일 많이 벌 수 있는데.”
니들이 내 좌충우돌 인생사를 들으면 미친년 보듯이 쳐다보겠지. 나도 그걸 아니까 내 인생사 썰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처녀귀신이랑 동거하고, 내 몸에 여신이 들어있고, 최근에 엘프 수양딸이 생겼다는 걸 어떻게 말해?
하나하나 말할 때마다 꺼라위키에 박제될만한 주옥같은 것들밖에 없건만. 나는 허언증 걸린 스트리머 취급을 받고 싶지 않다. 내 이미지에 타격이 갈 텐데 어떻게 그래. 나는 그냥 건물주가 장래희망인 돈미새로 남을 거다!
...생각해보니까 돈미새도 그렇게 좋은 이미지도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미새는 나름 정상인에 속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오늘도 빡세게 누웠네요. 진짜 법사 했어야 됨. X아블로2는 너무 전사 혐오야. ”
그러게 X수들이 소서 추천했을 때 소서 하지...
ㄹㅇ...괜히 소서 하는 게 아님. 게임이 불편함과 불합리함의 결정체라 소서 아니면 정상적인 플레이가 안 되는 수준임...
ㄹㅇㅋㅋ 고전겜 그 자체
“뭐 이제 지옥난이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좀만 더 고생하면 되겠지. 저는 슬슬 방송 끄고 자러 갈 테니까 X수들도 어서 빨리 가서 자라. 늦게 자면 키 안 커.”
아 이미 안 컸다고 ㅋㅋㅋㅋ
ㄹㅇㅋㅋ
여기 다 학식 아님 백수임 ㅋㅋㅋㅋㅋ
“백수면 취직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취직은 해야 먹고 살지.”
[AAAA님이 1000원 후원하셧습니다!]
왜 여기서 익숙한 잔소리가...?
갑자기 심장에 죽창을 꽃아버리네
듀라눈나의 잔소리...헤으응
또 이상한 놈 끼어있네. 나는 머리카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헤으응거리는 놈에게 밴을 먹여주었다. 그래봐야 내일 풀릴 밴이긴 한데.
“그럼 난 자러 갈테니까 다들 방송 끄고 일봐~ 듀바~”
ㄷㅂ
듀바~
들어가세요~
오늘도 방송이 끝났구만. 시끌벅적했던 방송이 끝나고 나니 방안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진다. 나는 방송을 위해 길게 늘였던 머리카락을 적당히 어깨에 닿을 정도로 줄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너무 길면 그건 그것대로 귀찮더라. 안 쓸 때는 줄이다가 쓸 때는 늘리는 게 합리적이지. 머리카락 늘이고 줄이는데 1초도 걸리지 않으니까.
버튜버짓 하면서 몸뚱아리를 따로 놓을 수 없게 된 건 참 아쉽단 말이야. 어차피 일은 머리카락이 다하는데. 팔 쓰는 건 귀찮기만 하단 말이야. 훨씬 더 쉽고 편한 머리카락이 있는데 굳이 팔을 써야 해?
사실 몸뚱이도 굳이 데리고 다닐 필요 없는 거 아닐까? 머리로 이족, 아니 사족보행도 가능한데 내 몸뚱이의 존재의의는 일코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게 아닐까. 덕분에 몸뚱이는 리온이나 에포나나 거진 쿠션처럼 쓰고 있는 느낌이긴 하지만.
“...신님, 일 끝나셨나요?”
“으..그래. 끝났지. 오늘은 뭐 하고 있었어?”
“어...에포나랑 같이 밤잠? 자고...간식으로 쿠키...먹고...한굴? 연습했어요.”
나는 리온의 어눌한 한국어를 들으며 머리 위치를 조정했다. 뭔가 좀 삐뚤어진 것 같아. 크게 상관은 없지만 기분 탓인가? 뭔가 뒷목이 좀 간지러운 것 같은데.
“밤잠이 아니고 낮잠이고, 한굴은 한.글. 따라해봐. 한.글.”
“한,글?”
“잘했어.”
리온은 내 말을 따라하며 나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나는 리온이 들고 있던 노트를 받아들었다. 노트를 펼쳐 확인해보니, 아직 익숙하지 않아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 있는 글자들이 보였다.
한글 쓰는 법 연습하라는 의미에서 선물한 노트였는데, 정말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애가 착하네. 엘프 마을에 있을 때는 활발해 보여서 이런 거 싫어할 것 같아서 어쩌나 싶었는데, 내 기우인 모양이었다.
빨리 한국어를 다 익혀야 기초교육과정이고 뭐고 다 들을 수 있으니까 한동안은 한글 공부나 계속 시켜야지. 이제 어느 정도 기초적인 회화는 얼추 되기는 했는데, 아직 어려운 단어나 한글 자체에 익숙해지질 못해서 잘 읽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다.
그래도 일주일 만에 이 정도까지 온 걸 보면 리온은 머리가 꽤 좋은 게 아닐까? 당장 성인이 돼서도 한글 제대로 못 읽는 놈 넘치는 거 보면 리온은 천재 맞다. 아무튼 그래.
그럼 나도 씻고 잘 준비를 할까. 그 때였다.
갑작스럽게 들리는 진동소리에 나는 책상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X톡이었다. 나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잠금을 해제한 뒤에 톡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X톡을 열었다.
[혹시 지금 전화 가능하신가요?]
시아, 본명 송시영인 내 버튜머 마마였다. 흠? 뭐지? 또 합방인가? 내가 긍정의 답변을 보내자, 곧바로 시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리온을 먼저 화장실로 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저에요. 무슨 일로 전화를...?”
[언제나처럼 합방제의에요! 평소처럼 저희 둘만 하는 게 아니고, 한명을 더 껴서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한명 더? 나는 두 달 전쯤에 시아의 손을 거친 버튜버가 데뷔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그 사람이랑 하는 건가. 근데 나 그 사람 모르는데.
“저야 괜찮죠. 그런데 누구에요?”
[어, 아실 지는 모르겠지만, 수향이라는 버튜버에요.]
내가 생각한 그 버튜버 맞네. 방송을 본적이 없어서 어떤 캐릭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야 크게 상관없기는 한데, 시아는 아무래도 그 버튜버를 밀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 끄지 않은 컴퓨터로 X튜브에서 수향의 채널을 검색해 채널을 확인했다.
구독자 7천, 평균 조회수는 수백에서 천사이를 오가네...하꼬는 아니고 중소라고 부르기에는 살짝 애매한 라인에 걸쳐있는 느낌이었다. 근데 이거 내가 받아도 되나? 이런 말을 내가 꺼내기도 뭣하지만, 나랑 같이 방송하기엔 덩치가 너무 차이나서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는데.
내 시청자들은 대체로 얌전한 편이기는 한데, 그게 다른 버튜버들 한 테까지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내 시청자들 중에 한명은 내 방송에선 얌전한데 다른 방송인 방송에선 도네로 욕을 박더라고.
좀 소름돋더라. 여튼 나는 그 부분이 좀 걱정스러웠다. 시아야 체급이 어느 정도 있으니까 나랑 합방해도 방송 경력도 길어서 꿀을 잘 빨 수 있다지만, 이 수향이란 애는 괜찮을까...?
“제가 이렇게 말 꺼내면 좀 재수 없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서로 체급차이가 과도하게 커서 저랑 합방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 생각은 했는데 애가 듀라님 찐팬이라...]
시아가 말끝을 흐렸다. 아, 방송 그 자체보다는 나랑 합방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건가? 그런데 그러면 더 나랑 같이 방송하면 안 되겠는데. 나랑 방송하다 뇌절하면 오히려 내 방송에 상주하던 악질 시청자들한테 물려서 이미지만 박살날 가능성이 높다고.
자칫하면 빠돌이 이미지만 얻어서 기존 이미지가 묻혀 버릴 수도 있고. 버튜버 계에 그런 일이 은근히 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웬만해서 버튜버는 캐릭터 컨셉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토끼 버튜버 마냥 컨셉이 과하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아프긴 하지만.
“일단 저는 거절하는 쪽으로 갈...”
[잠시만요, 뭐라고? 직접 통화하겠다고?]
뭐? 잠시 휴대폰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어린 학생인지, 허스키한 목소리에 가까웠지만 어딘가 귀염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듀, 듀라님 맞으신가요?]
“아, 네. 그런데 누구신지...”
[저, 저는 X튜브에서 버튜버 활동을 하고 있는 버튜버 수향입니다! 오늘은 합방을 부탁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시아 집에 지금 같이 있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거절하지?
나 이런 거 잘 못한다고. 상처받지 않게 돌려보내는 법 같은 거 모른다고. 찐따란 말이야. 아 몰라. 이럴땐 충격 요법이지.
“아, 그렇군요...저는 듀라입니다. 이번 합방에 대해선데, 일단 저는 합방에 반대에요.”
[네, 네에?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도 되, 될까요?]
“저희들이 시청자 수가 너무 차이나서 합방으로 시청자가 늘어나면 관리하기 힘들기도 하실 거고, 제 방에 악질 시청자들이 그쪽으로 넘어가면 오히려 기존 시청자들을 밀어낼 수도 있어요.”
방송인들이 원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다. 악질 시청자가 시청자들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면 채팅창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니까.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엄청 받고. 재작년 쯤에 그렇게 은퇴를 선언한 스트리머가 하나 있었지. 결국 다시 돌아오기는 했다지만...
[여, 역시 듀라님. 저를 위해서 그렇게 생각해주실 줄은...]
왜 감동하는 건데. 까놓고 말해서 체급 차이가 이렇게 나서 하기 싫다고 하는 거나 다름없는데.
[그, 그래도 역시 합방을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저는 듀라님과 합방을 해보는 게 소원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만류하는 시아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수향이라는 버튜버는 나와 합방을 꼭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살짝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내 양심을 콕콕 찔렀다.
뭐, 어쨌든 하꼬 입장에서 머기업과 방송을 같이 한다는 건 역시 이득이니까...뒷일은 알아서 하겠지. 애초에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는 문제니까...
나는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