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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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제우스 녀석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이냐! 이번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회의인지는 제우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뻔 하죠 뭐. 어디선가 또 여자 하나 잡아와서 질펀하게 놀고 있겠죠...”
100년 정도만 더 지나면 아버지의 자식들로만 도시를 세워도 될 정도인데. 토르의 일갈을 들은 아테나는 볼멘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배정된 좌석에 앉았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테이블에는 수많은 신들이 서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 진지함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에 토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팔짱을 꼈다.
“대업을 눈앞에 두고 사소한 일에 눈이 팔리다니, 이래서 그리스 신 놈들은...아폴론 녀석도 그렇고, 하나같이 계집질에 미쳐서...”
안 그래도 여신이라면 아무에게나 다 추파를 던지는 제우스의 행태에 반감이 있던 토르는 혀를 차며 대놓고 그리스 신들에게 혼잣말을 빙자한 모욕을 했지만, 아테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눈앞에 놓인 음료, 넥타르로 입가를 적셨다.
뭐로든 입을 막지 않으면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버지...’
아테나는 언제나 여신도들과 질척이는 밤을 보내고, 여신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제우스 덕에 속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총력전을 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여자나 후리고 다니다니, 아무리 그리스 최고신의 힘이 손꼽힐 정도로 강력하다지만, 이렇게 있다간 정복은커녕 돌파조차 하지 못 할 텐데.
벌써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든지 오래였다. 가지세계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어서 빨리 돌파구를 마련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전쟁에 대해서 낙관하고 있는 신들이 많았기에, 아테나는 생색내주는 수준의 얼마 되지 않은 전력으로 전투를 계속 이어나가야만 했다.
아무리 상대 쪽의 전력이 보잘 것 없다지만, 이쪽은 공격하는 입장이다 보니 철저하게 수성전을 하는 탓에 전력을 집중해서 뚫어야 하는데, 신들이 신화마다 파벌로 갈려 싸우는 통에 선택과 집중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라, 일단 명목상 지휘관인 아테나는 매번 지지부진한 전투를 이어가야만 했다.
그마저도 최근 몇 년 동안은 싸우는 마는 둥 하며 서로 파벌을 견제하느라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전부 때려치우고 싶다...’
아테나는 맞은편에서 으스대고 있는 토르의 얼굴을 주먹을 갈기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냈다. 한 자존심하는 토르가 지휘관 선발에서 아테나에게 밀린 것에 앙심을 품은 탓에 북유럽 신들이 제대로 협조도 안 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아테나 본인은 어쨌든 그리스 쪽 신들의 힘이 줄어들 터였다.
“뭐? 말 다했냐?”
“아레스.”
이 단순무식한 놈아, 제발 좀 닥쳐. 아테나는 목 위까지 올라온 욕을 집어삼키고, 토르의 도발에 걸려 화를 내려는 아레스를 멈춰 세웠다. 아무리 저쪽이 먼저 도발을 했다지만, 그 도발에 넘어가봐야 발언권만 약해질 뿐이었다.
안 그래도 파벌 싸움에서 다른 신화권 파벌들에게 집중 견제 당하는 상황이질 않나. 저놈의 오라비는 같은 12신이면서 수천 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건지.
‘그냥 다 때려치울까?’
부하랍시고 내어놓은 것들은 말도 제대로 안 듣지, 서로 파벌의 이득을 위한답시고 정치질을 해대질 않나, 최고신이란 것들은 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언제든지 자기네들이 나서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여서, 아테나는 다 때려치우고 어머니와 함께 은거를 할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올림포스의 12신으로서 이 전쟁에서 빠질 수는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였지만, 가족인 12신들을 버릴 정도로 아테나는 모진 여신이 아니었다. 결국, 아테나는 가족이라는 족쇄에 묶여 이 회의를 이끌어나가야만 했다.
“애초에 이렇게 오랫동안 뚫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지. 우리 발할라의 전사들이라면 그깟 방어선쯤이야 단번에 분쇄해 버렸을 걸세!”
그럼 그 잘난 병사들이나 지원해주던가. 파벌 싸움하기 바빠서 병력도 안내주면서 입만 살았군.
“그럼 지원해주시죠. 그렇게 자랑스러운 병사들이라면 필히 모범을 보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내가 뭘 믿고 자네들에게 자랑스러운 전사들을 내주겠나! 발할라의 용사는 따를 가치가 있는 자여야만 빛을 발하는 법이라네!”
“이런 개...!!!”
이어지는 도발에 화를 내며 욕을 내뱉으려는 아레스를 아테나는 손을 뻗어 제지했다. 화내는 건 좋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지. 아테나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토르의 말을 받아쳤다.
“그건 이 회의장에 있는 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뭐?”
“저는 이곳 신들의 투표로 뽑힌 총사령관이니, 저를 모욕한다는 것은 이 회의장에 있는 신들을 모욕하는 것이 되겠죠?”
“...끙, 이거 한방 먹었구먼.”
반격을 당했음에도 토르는 넥타르를 벌컥벌컥 마시며 호탕하게 웃었다. 민망함을 숨기고 마치 자신이 시험을 한 것 마냥 여겨지기 위한 행동임을 아테나는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쓸데없이 시비란 시비는 다 걸면서 정작 본인이 당하면 호탕한 척 하며 받아넘긴단 말이지.
싸움 말고는 모를 것 같은 주제에 은근히 머리를 굴린다. 아테나는 연회장에 놓인 음식을 조금씩 맛보며 속으로 실컷 토르를 욕했다. 제 아버지처럼 대머리나 되어버리라지.
“제우스님이 오셧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한눈에 보기에도 거구를 자랑하는 중년 남성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금발을 자랑하는 올림포스의 최고신 제우스는 당당한 걸음으로 자신에게 배정된 옥좌에 앉아 신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 옥좌에 앉아 내려다보는 경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마치 모든 신들의 왕 같지 않은가. 권력욕 강한 제우스에게는 정말 마음에 드는 자리였다.
그가 옥좌에 앉자,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웠던 회의장은 금새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먼저 총사령관인 아테나가 상황 설명을 하도록.”
제우스의 말에 아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지금 상황은 여전히 소강상태입니다. 뿌리세계 측에서는 철저하게 수비로만 일관하고 있으며, 오랜 작업을 균열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직 저희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저희 세계의 필멸자들이 넘어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발견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더군요...”
“호오. 성공한 자들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흥미롭군.”
우리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해낸 필멸자들이 있다니. 회의를 대충 끝내고 갈 생각이었던 제우스는 아테나의 말에 호기심을 갖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테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곤 말을 이어갔다.
“대부분은 죽었지만, 성공적으로 넘어간 인간이 있더군요.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쪽의 멸망한 제국의 황제였던 자입니다.”
“아, 그 건방진 인간인가. 기억나는군. 감히 신과 맞먹으려고 하던 놈이였지.”
제국에게 과도한 공물을 요구해놓고 정작 상황이 안 좋아지자 나 몰라라 했던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아테나는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토르를 잠시 흘겨보곤 말을 이어갔다.
“목표는 수백 년전에 유실된 차원이동 마법진을 활용해 넘어간 모양입니다.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을 보니, 실제로 그 마법은 성공한 것이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호오. 그거 참 재밌는 이야기로군. 아테나, 네가 왜 이 말을 꺼냈는지도 알 것 같구나.”
제우스는 단번에 아테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 챘다. 이정도도 눈치 채지 못하고서야 최고신 노릇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네. 저는 그래서 몇몇 충성스러운 신도들을 뽑아, 내부에서 그들을 공격할 생각입니다. 육체를 잃어버린 신들은 물리적인 공격에 매우 취약하니, 내부에 진입할 수만 있다면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역시 지혜의 여신이로군. 아주 좋은 계책을 짜냈어.”
“과찬이십니다.”
“그럼 이 안건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있나?”
토르는 살짝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본인들이 나서기 싫어서 가장 강력한 파벌의 여신에게 투표를 한 것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신들은 느긋하게 다가오는 위기보다 현재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신들은 그런 존재였다.
“없나보군. 그럼 이 일은 전부 찬성하는 것으로 알겠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이어서 다음 안건입니다. 이번에 뒷골목을 한번 ‘청소’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청소라...”
“...불신자인 저들을 굳이 살려둘 필요가 있냐고 하더군요.”
“흠...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 이 낙원 안에 있는 것이 꽤 불쾌한 일이긴 하지.”
“맞아, 그 놈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다 죽여버려야 해!”
“생명을 함부로 죽여선 안됩니다!”
“우린 저런 버러지들을 생명이라고 인정하지 않아!”
누군지 모를 신의 외침이 회의장을 울렸다. 몇몇 신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성정이 괴팍한 신들이었기에, 몇몇 온화한 신들은 그들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온화한 성정을 가진 신들은 극소수였기에, 금세 다른 신들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개판이로군. 아테나는 당장이라도 회장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테이블을 한번 두들겼다.
“조용! 아직 회의 중입니다! 발언할 신은 손을 들고 발언해 주십시오!”
아테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신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테나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아테나는 난감한 얼굴로 제우스를 쳐다보았다. 제우스도 살짝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다시 근엄한(척) 표정을 지으며 그 여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우리를 섬기지 않는 다는 이유로 죽인다는 것은 잔혹한 처사입니다. 제우스.”
“그들은 불신자들이야. 우리가 돌볼 의무가 없는 자들이지.”
“뒷골목의 모두가 불신자는 아닐 겁니다. 무자비한 폭력은 신도들마저 돌아서게 할지도 모릅니다.”
몇몇 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신들이 무자비한 폭력의 현장을 관람하고 싶어했지만,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하는 신들도 있었다. 헤스티아는 후자를 대표하는 여신이었다.
“...확실히 그렇군. 쓸데없이 피바람을 불게 할 필요는 없지. 차라리 본보기로 몇 명을 잡아서 벌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나?”
또 시작이시군. 아테나는 제우스의 의도를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발정난 개새끼도 아니고 진짜. 아테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쥐꼬리만큼 있던 정도 떨어지게 만들 만큼 막나가는 제우스의 행동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이번 일만 끝나고 진짜 내려놓던지 해야지.
“...이 일은 앞선 작전을 시행하느라 바쁠 아테나대신 내가 맡도록 하지. 불만 있는 신 있나?”
이번에도 반대는 없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세수에 관한 안건이군...”
“네 그렇습니다...”
회의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다른 신들에게 발언권이 돌아가,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긴 아테나는 자리에 앉아 컵으로 입을 가리곤 한숨을 쉬었다.
그냥 다 꺼졌으면 좋겠다.
아테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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