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156.엘프(이)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1)
* * *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깜짝이야. 나는 갑작스레 고함을 지르는 라쿤 박사의 몰상식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냈다. 누구 고막 터트릴 일 있나. 물론 이정도로 터질 고막은 아니지만.
역시 내가 말한 부탁이 적잖이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역시 힘든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된다네! 대신! 검사! 검사! 검사를!]
“검X사막이요?”
[그게! 뭔지! 난! 모르지만! 헛소리! 인 것은! 알겠군!]
“그러면 내일 기밀관리본부에 데려가면 되는 거죠?”
애가 외형상으로도 실제로도 10대 초반의 꼬마라서, 혼자 놔둘 수는 없다. 호적이 따로 생겨봐야 고아원 행일 거고. 하지만 이 꼬맹이를 고아원에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지...나는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리온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요 녀석 볼 한번 쫀득하네. 입으로 한번 깨물어보고 싶다. 실제로 저지르면 좀비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이 나올 테니 진짜로 할 생각은 없지만. 애 옷을 꼭 붙잡고 자는 게 아기 같기도 하다.
벌써 애를 데려온 게 이틀 전의 일이다. 현실시간으로는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였지만, 나흘정도 있었던 그곳에서 돌아온 우리는 일단 리온을 데리고 귀가했다. 애를 생판 처음 보는 곳에 내버려둘 정도로 막장인간도 아니고, 내가 맡기로 했으니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에 오고 반나절은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리온은 나를 붙잡고 도통 놓아주질 않았다. 그 뭐냐.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긴 한데...어제부터 간단한 한국어를 가르쳐 주긴 했지만 큰 진척은 없었다.
기껏해야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헤으응”정도?
...마지막건 내가 아니라 에포나가 하던 걸 따라한 거다. 내가 그런 걸 가르칠 리가 없잖아. 어쨌든 리온은 우리 집의 새로운 식구가 되었고, 나는 리온을 내 식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여러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야했다.
우선 호적문제.
한국이란 나라가 호적 같은 데에서는 정말 철저한 나라다보니, 애를 은근슬쩍 호적에 집어넣을 수 도 없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 외모다보니 힘들 것 같고. 나도 화려하기로는 만만치 않지만, 저 기다란 귀가 문제였다.
엘프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저 기다란 귀! 리온의 귀를 허락 맡고 만져봤는데, 생각보다 부드럽더라. 약간 동물 귀를 만지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결국 호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기밀관리본부에 오랜만에 연락을 하게 된 것이다. 뭔가 되게 오랫동안 연락을 안했던 것 같은 느낌인데. 거의 한 달 정도는 안한 것 같아. 연락 할 일이 없는 게 좋은 거긴 한데.
[그렇다네! 내일! 오후! 3시! 까지! 오게!]
“넵. 그럼 수고하세요~”
[다음부턴! 이런! 기쁜! 소식만! 가져오게!]
아니, 애는 실험체가 아니거든요? 내가 기막혀하고 있는 사이에, 라쿤 박사 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지금부터 실험준비에 들어간 게 아닐까. 박사님 은근히 실험에 환장한단 말이야.
후. 나는 스마트폰을 대충 침대위에 던져놓고, 곤히 자고 있는 리온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진짜 잘 자네. 아무래도 하루 종일 컬처쇼크를 연속으로 당한 탓에 정신적으로 지쳐 쓰러진 모양이었다.
자연 그 자체에 가까웠던 엘프의 숲과 달리 현대사회는 마법이나 다름없는 과학기술로 이루어진 사회니까, 냉장고를 보고 놀라고, X튜브를 보고 또 한 번 놀라고, 가스레인지를 보고 쇼크를 받은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근데 난 어디서 자지.”
애가 내 침대 한가운데에 떡하니 누워서 자느라 내가 잘 곳이 없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바닥에 이불 깔고 자야하나.
아 몰라. 나는 조심스럽게 리온을 안아들곤 벽 쪽에 눕혔다. 어린애 한명 더 잔다고 자리가 모자라진 않으니까 그냥 자야지.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은...뭘 먹지...
아.
“...에포나 또 너야?”
나는 머리카락을 움직여 바닥을 굴러다니던 머리를 일으켜 세웠다. 순식간에 X라군 마냥 머리카락으로 다리를 만들어낸 나는 내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는 에포나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마치 에일리언 같은 기분이로구만. 머리카락만으로 사족보행이이라니.
왠지 가위눌린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 졌었는데 에포나 때문이었군. 나는 에포나를 안아 올리곤 조심스럽게 침대위에 내려놓았다. 리온은 여전히 세상모르게 자고 있엇다. 나는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늘려 리온과 에포나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내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7시 반. 이르다면 이르고 늦다면 늦은 시간이었다. 확실한건 더 자기에는 애매한 시간대라는 거다. 나는 거실로 나가 냉장고를 열었다. 생각해보니 최근에 장을 본적이 없던 것 같은데. 이틀전에는 경계에 갔다 왔고, 이틀 동안은 좀 짦기는 했지만 방송했고. 리온이 나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통에 방송을 오래 할 수가 없더라.
리온을 데리고 장을 보기엔 문제가 좀 많으니까 유라한테 맡겨야 하나? 유라는 리온을 꽤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잘 돌봐주긴 할 텐데, 문제는 말이 안 통한다는 점이다. 애가 뭐라 해도 리온이나 유라나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의사소통이 안되는 건 치명적인 문제였으니까.
리온이 아직 나 이외의 사람을 꺼려한다는 것도 있고. 유라는 키가 비슷해서 또래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더라.
“후...그냥 대충 토스트에다 계란프라이 해서 대충 때워야지.”
“...참깨빵 위에 순 쇠고기 패티 두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
“혹시 소금 덩어리라도 드시고 싶으신지?”
“그, 그건 좀. 미안해...”
내가 위협적으로 소금통을 흔들자 세연이는 순식간에 거실 끝으로 도망쳐 내 눈치를 보았다. 아니 왜. 장난이야 장난. 그냥 네가 내 PTSD를 자극하기에 나도 PTSD를 자극한 것뿐이라고. 내가 그 날 이후로 저 cm송 나오면 영도고 뭐고 막아버리거든?
내가 싫어한단 걸아니까 x수들이 뇌절하더라.
“...후. 기다려봐,,,일단 x벅이 남아있...다 먹었네. 아침은 너도 토스트나 먹어. 저녁에 사다줄 테니까.”
분명 2주전까지 x벅 70개는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다 먹은 거야. 하긴 한번 먹을 때 두세 개씩 먹어대니까 남아날 리가 없지. 냉장고 한 칸을 꽉꽉 채운 x벅이 사라지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세연이가 햄버거만 죽어라 먹어대니 거진 몇 달 전 부터 냉장고 한칸을 x벅으로 채웠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누가 보면 x벅으로 장사라도 하는 줄 알겠네.
내가 응징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눈치 챈 세연이는 내 어깨위에 머리를 올리곤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입가를 헤벌린 모습이 멍청해보였지만, 애가 안 멍청했던 때가 있나 싶기도 하고,
예전에 ...ㅎ...ㅐ...ㅁ...ㅂ...ㅓ...ㄱ...ㅓ,,,로 모든 의사소통을 퉁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낫지만, 가끔 그립기도 했다. 최소한 그때는 햄버거만 주면 알아서 짜져있었다고. 지금처럼 남의 가슴가지고 장난치지도 않고.
“네 토스트에만 소금 잔뜩 쳐버린다?”
별 느낌은 없지만 거슬리거든? 니가 납작하다고 그 한을 내 가슴으로 풀지 말아줄래? 나는 머리카락으로 세연이의 정수리에 꿀밤을 날리곤 다시 노릇노릇하게 익은 토스트를 접시위에 올려놓았다. 5개 정도면 되겠지? 리온이 꽤 먹성이 좋더라. 어린애라 그런가.
문제는 한국인의 식단에는 죄다 마늘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겠지. 그걸 깜빡하고 식사를 차리니까 리온이 코를 막고 기겁하더라. 이게 korean의 맛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깐프? 마늘은 한국인의 정체성입니다. 김치 없는 식단은 있을 수 있어도 마늘 없는 식단은 한국인의 밥상에 존재할 수 없다 이거야.
흡혈귀도 한국인이라면 마늘을 한 움큼 집어 숯불에 구워 삼겹살과 함께 먹을 수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최근 식단에선 마늘을 좀 빼고 양식 위주로 하고 있긴 한데, 슬슬 마늘에 적응 시켜야 되나. 한국 요리는 죄다 마늘이 들어가서 마늘냄새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X튜브에서 본 것 같은데,
계란프라이는 대충 서니 사이드업으로 해먹어야지. 난 노른자가 적당히 익은 게 제일 좋더라. 너무 익히면 퍽퍽해서 식감이 별로야, 부드러운 흰자 속에 찐득한 노른자가 더해지는 게 진정한 풍미지.
“주인님! 나도 먹을래!”
“잘잤어?”
“응! 나도 토스트!”
나는 토스트를 에포나의 입에 물려주었다. 에포나는 재주 좋게 토스트를 입으로 조금씩 씹어삼켰다. 머리를 180도 돌린채로 강아지마냥 꾀를 살랑살랑 흔들며 토스트를 음미하는 에포나를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던 나는 다시 머리를 돌리고 계란프라이를 완성하는 데에 집중했다.
와! 서니 사이드 업 5개! 별이 다섯 개!
나는 토스트 위에 뒤집개로 계란프라이 하나를 올려놓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저항감 없는 식감이 입안에서 부스럭 거린다. 이빨이 너무 튼튼해도 문제다. 바삭한 식감으로 먹는 토스트가 두부마냥 썰려버린다고.
생각해보니까 커피를 깜빡했네. 나는 커피포트의 전원을 켜고 예열버튼을 눌렀다.
“유진아, 나도 하나만...”
“옛다.”
나는 세연이의 입에 계란을 얹은 토스트를 물려주곤, 방으로 향했다. 애도 깨워서 아침밥 맥여야지.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리온의 옆에 앉아 볼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리온이 내 손장난에 반응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으음...”
역시 어린애라 아침에 약한 건지, 반쯤 뜬 눈으로 나를 게슴츠레 쳐다본 리온은 다시 눈을 감고 이불속으로 몸을 파묻으려 했다.
“5분만...더...잘래...”
그거 어디서 배웠어. 혹시 ‘5분만 더’는 이세계도 공통인가.
“아침 먹어야지?”
“아침...?”
“그래. 향기로운 버터로 코팅한 먹음직스러운 빵과 반숙으로 적절히 간이 된 계란프라이를 얹은 토스트 말이야. 취향따라 설탕을 뿌려도 맛있고, 잼을 발라도 되고. 신선한 우유와 함께 먹으면 아주 끝내주는 토스트 말이야.”
“토...스트...먹을래!”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하던 리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실로 달려 나갔다. 아 이거 밑에서 층간소음으로 신고당하는 거 아닌가? 슬슬 이사를 고려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계좌에 5억이나 있는데 이 정도면 적당히 수도권 구석에 있는 집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좀 무리해서라도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 좋을 것 같은데. 나중에 매물이나 찾아봐야지.
나는 이부자리를 적당히 정리하곤 방을 나와 식탁의자에 앉아 다 먹지 못한 토스트를 마저 먹어치웠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