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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176화 (176/352)

〈 176화 〉 막간

* * *

“책이 아주 많군.”

“그거야 이 대륙의 모든 책들이 이곳에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네! 그리고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위험한 서적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네...”

포모르는 열성적으로 도서관에 대해 설명하는 베네딕틴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정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아주 큰 차이였으니까. 그의 스승이 언제나 강조하던 말이었다.

‘때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소문 하나가 백만 대군을 무너트리는 법이다’

파르사드는 포모르에게 입버릇처럼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그는 스승의 말을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포모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맞장구 쳐주면서도, 금방 만나게 될 여신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는 아직 신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기억은 희미해 어디서 살았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적어도 그의 기억이 시작된 시점에서는 파르사드와 함께 전 대륙을 떠돌아 다녔으니까.

“...이곳에는 학문에 대한 책이, 저쪽 서재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쓴 소설책들이 있다네. 그리고 저쪽에는...”

끝이 없군. 포모르는 신나게 도서관을 소개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몇 권의 책이 안에 있는지 가늠하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도서관은 수많은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포모르는 서재를 지나치며 책들을 훑어보았다. ‘마법 기초 이론’, ‘의식에 대하여’, ‘마법진의 이론과 실재’, ‘저주의 정석’...마법 관련 책을 보아놓은 서재로군. 그는 꽤 흥미롭게 책들을 살폈다.

마법에 관한 책은 구하기도 힘들고 비싸다고 했던가. 뛰어난 마법사기도 했던 그의 스승에 의하면, 희귀한 마법책 몇 권이면 저택을 산다고 말하곤 했다. 옛날 자신의 궁에는 그런 마법책이 수백 권이 있었다는 소리와 함께.

스승은 살아있을까. 부질없는 희망이지만 그는 파르사드가 죽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상상하기엔 너무 끔찍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자 했다. 점점 쇠약해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가. 포모르는 담담한 얼굴 속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숨겼다.

약한 모습을 함부로 보이지 마라. 그게 파르사드가 포모르에게 가르친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흠흠...이제 곧 메티스님에게 도착한다네. 복장을 정돈하고 예를 갖추는 것을 추천하지. 메티스 님이 격의 없는 분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란 게 있는 법이니!”

“알았다.”

그는 잠시 고민 끝에 망토를 벗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모래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망토는 들어오기 전에 한번 털어냈기는 했지만, 입고 있기엔 너무 헤지고 낡았다. 그가 망토를 벗자 그의 망토 속에 입은 가죽옷이 드러났다.

“흠. 가방은 옆에 내려놓게. 누가 훔쳐갈 사람도 없으니 대충 놔둬도 될 걸세.”

포모르는 그의 말을 따라 가방을 적당한 자리에 내려놓았다. 베네딕틴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위대한 지혜의 여신이시여, 여신님의 미천한 종이 용무가 있어 왔음을 알립니다.”

“...그런 거창한 인사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니?”

“습관이 되어서 말입니다.”

“고집쟁이로구나...들어오렴.”

마법인가. 포모르는 밀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열리는 문을 보며 생각했다. 포모르는 방 안으로 들어가며 내부를 살폈다. 문 너머는 잘 정돈된 화원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수많은 꽃들, 녹색으로 가득한 방. 그 사이에 있는 주전자와 찻잔이 놓인 작은 식탁과 흔들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책을 읽는 여성.

포모르는 그녀가 여신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운 여성일 뿐이었지만,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녀가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새로운 손님이로구나. 어디보자...”

메티스 여신은 잠시 입가에 손을 대고 고민하다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녀의 행동에 포모르가 의문을 가질 찰나에, 갑작스레 식탁 앞에 두 개의 의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두 사람분의

찻잔.

“내 화원에 온 것을 환영한단다. 아이야.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니?”

“...포모르입니다.”

“포모르...포모르라...누군지는 몰라도 짓궂은 이름이로구나.”

여신은 오래전, 같은 이름을 가진 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신은 모리안에게 살해당했단 것도. 오래전 가지세계로 육체를 포기하기 싫었던 신들이 이주하기 전의 일이었다.

“이름이...말입니까?”

“그 이름은 오래전 죽은 신의 이름이었단다. 아주 처참하게, 한 여신에게 살해당했지. 이유는 동생을 죽였기 때문이었단다. 마하, 라는 이름이었나...이젠 수천 년전의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구나...”

까마득한 옛날이군. 포모르는 수천 년전의 일을 회상하며 감상에 젖은 여신을 쳐다보았다. 못해도 수천 살이란 소리인데, 어떻게 보면 그보다도 어려 보였다. 테테보다는 많아보였지만. 아직도 20대 초반에 가까운 것은 신들의 외모가 고정되어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렇게 보이도록 한 것일까. 포모르는 전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신들이 나이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자, 앉으렴.”

베네딕틴과 포모르는 그녀의 말을 따라 의자에 앉았다. 여신은 둘이 자리에 앉자 가볍게 찻잔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주전자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세 명의 찻잔에 차를 가득 채워넣었다.

“이 화원에서 재배한 허브로 만든 차란다. 정신을 맑게 해준단다.”

“감사합니다! 메티스님!”

“...감사합니다.”

“후후, 주인으로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

포모르는 어색하게 작은 찻잔을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마셨다. 입안에 퍼지는 향긋한 맛에, 포모르는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밖에서는 상상도 못할 물건이로군.

우물이란 우물은 다 마르고 그나마 남아있던 물도 메말라가는 세상에서 차라...사치중의 사치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는지 궁금하단다.”

“아! 여신님, 제가 말입니다...”

베네딕틴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여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회주의라...그 사상을 정말 좋아하는 구나. 확실히, 꽤 흥미로운 사상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그걸 위해선 결국 신들이 사라져야만 하겠지...그건 어디까지나 필멸자들 만의 사회잖니.”

“그, 그게 꼭 신님들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겁먹지 마렴. 애초에 그 책을 너에게 보여준 건 나였단다. 나도 지금 상황에 불만이 있단다. 신들이 자기 의무를 져버렸는데...섬겨질 의무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짓는 여신의 모습에, 포모르는 의아해 했다. 자기도 신이면서 신들을 싫어하는 건가...?

“...혹시, 의무란 게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포모르는 자기가 아는 한에서, 가장 예의바른 태도로 여신에게 물었다. 여신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그 작은 입술을 열었다.

“신이라는 존재가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신의 존재 이유 말입니까?”

“그래. 신의 존재이유 말이야.”

신의 존재이유라... 포모르는 생각에 잠겼다. 파르사드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긴 했지만, 신들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 파르사드가 신들을 혐오하기도 했거니와, 그는 신학에 있어서는 불성실한 학생이었으므로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후후, 간단 하단다. 세상을 다듬는 일이란다.”

다듬는다...? 포모르는 그녀의 말이 어떤 뜻인지 짐작을 할 수 가없었다. 그저 인간인 자신에게는 까마득한 이야기라는 것만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뿐. 메티스는 잠시 차를 마시며 뜸을 들이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이라는 존재는 세상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탄생한 존재란다. 신들을 탄생시킨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이 부분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마­적어도 이 세상을 관리할 의지가 있는 자 임이 확실하지. 그래서 신들에게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것이고,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단다.”

“하지만 작금의 신들은 권력놀음에만 빠져있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베네딕틴의 울분에 찬 목소리에, 여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망가지고 말았단다. 어쩌면 낙원도 바깥처럼 망가져버릴 운명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면, 신들이 제 의무를 다 한다면 이 땅이 살아날 수도 있다는 말 입니까?”

“...꼭 그렇지는 않단다. 세상에는 시기적절이라는 말이 있어서, 적절한 때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된단다. 이 세계는 이미 늦었단다. 신들이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을 제외해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 신들이 제 일을 하게 되더라도 잠시 숨을 붙여놓는 정도밖에 안될 거란다.”

멸망이 확정된 세계. 메티스는 이 세계가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1년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원인이 신들의 타락인지, 아니면 이 세계에 주어진 시간이 다된 것인지는...모르지만...

“...이 세계는 언젠가 멸망할 세계였단다. 그 이유가 신들의 타락이든 다른 이유였든,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란다.”

여신이 내뱉은 충격적인 사실에, 포모르는 처음으로 감정의 동요를 보였다. 회생 가능성 따위는 없다고? 처음부터 멸망할 것이 정해진 세상이었다고?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갈 곳 없는 감정의 분류가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포모르는 이성의 끈을 붙잡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럴리가! 여신님은 방법을 찾아내셨네!”

포모르는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살리려고 노력했던 파르사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륙을 살리기 위해 다른 차원에 까지 손을 대는 그의 노력은 뭐였단 말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이 파국이라면, 그 노력은 무의미한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단다. 나는 이 세계를 아주 좋아한단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찾아다녔지. 그리고 최근에,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단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데 필요한 사람이 오기를 오래전부터 기다렸단다.”

“그 말씀은...?”

“포모르, 제국의 마지막 후예야. 그대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싸움에 참가할 생각이 있느냐? 아주 괴롭고 험난한 혁명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느냐?”

“...처음부터 그것뿐이었습니다. 메티스님.”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단다. 그러면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어야 하겠구나...포모르, 너는 꺾꽂이란 말을 아니?”

메티스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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