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155.당신의 뚝배기를 반으로 쪼개면 사랑이 올까요?(7)
* * *
“이상해.”
“저도 동감하지 말임다.”
이곳에서 지낸지 3일째. 우리는 커다란 나무의 그루터기에 앉아 길거리를 지나가는 엘프들을 쳐다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정확히는 첫날부터 느끼긴 했지만, 확신을 가지게 된 게 오늘이었다고 할까.
“어린아이가 리온 하나 밖에 없는 것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해봐. 아무리 아기를 임신할 확률 이 낮더라도, 못해도 수백 명은 있는데 아이가 단 하나 뿐이라고? 그렇다고 부부가 없는 것도 아니지, 실제로 붙어 다니는 남녀가 꽤 보이니까. 같은 집에 사는 것도 확인했어.”
생명체라면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본능적으로 아기를 가지려고 하지 않나? 엘프들은 종의 생존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역시 이상했다. 3일 내내 마을과 마을 바깥을 돌아다녔지만 엘프들은 이렇다 할 채집활동이나 식량 수급 같은 걸 하지 않았다.
이들은 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같은 경로를 반복해서 움직였으니까. 마치 정해진 행동을 반복하는 NPC처럼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는데.
환술 같은 거라도 걸린 건가? 나는 저번의 안개를 떠올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데.
“제가 3일전에 이야기 하려다 만 것 기억하심까?”
“어...이 마을이 어쩌고저쩌고 그거?”
네가 나중에 알려준다고 지금까지 말 안한 거잖아. 나는 리온을 태우고 힘차게 뛰어다니는 에포나를 바라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슴다. 처음엔 처음 보는 방식이라 긴가민가했는데, 일부를 빼곤 전부 환영임다.”
“환영?”
“저쪽을 보면 알검다.”
나는 저승사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저승사자가 가리킨 곳에는 바구니를 들고 이동하는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엘프여성이 보였다. 저게 뭐? 그냥 평범하게 이동하는 걸로 보...
“바구니가 팔을 통과했...네?”
“저희가 온 첫날에는 저렇지는 않았슴다. 아마 이 환영을 만든 자의 힘이 떨어지고 있는 모양임다.”
그런...가? 그래서 그게 누군데? 그 시리아인가 릴리인가 하는 애들? 내가 이름 아는 애들이 3명밖에 없는데. 리온이랑 개내 둘 말고는 이름도 몰라. 생각해보니까 촌장 이름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네.
나 너무 무관심 했던 건가.
“그냥 게으름 피워서 그런 거 아님까...”
“몰?루”
“그거 왠지 열받지 말임다.”
“아니 왜. 귀엽잖아.”
“부정은 못하겠슴다...그런데 왠지 열받슴다...이걸 속어로 킹받는다고 하는 걸로 아는데 말임다.”
그러라고 하는 거니까 당연하지. 저승사자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알게 뭐람. 니도 꼬우면 똑같이 하던가. 왠 창백한 남정네가 몰?루 하면 열 받는 다기보단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겠지만. 미소녀가 하면 애교지만 남정네가 하면 좀...
“흠흠, 어쨌든 아마 오늘이 지나면 환영도 사라질 검다. 아마 시전자도 같이 사라질 것 같으니 그전에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슴다.”
“무슨 이야기?”
“영혼 성불 말임다.”
영혼 성불이라... 생각해보니까 목적이 그거였지. 힐링 한답시고 여기서 놀고 있긴 했지만 목표를 정말로 잊지는 않았다. 나도 직장이 있고 삶이 있는데 여기에 무한정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야기만으로 해결이 되나?”
“아마 그럴 검다. 성불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였으면 진작에 저희한테 해코지를 했지 말임다...”
“그건 그러네. 끌려가기 싫었다면 지금쯤 손을 써도 이상하지 않았겠네...그러면 무슨 이유로 환영까지 만들면서 버티고 있는 걸까?”
“뻔 하지 말임다...”
저승사자의 시선이 에포나위에 타고 있는 리온에게로 향했다.
아, 그런가. 그거라면 납득이 되네. 이 엘프마을에 어린아이가 리온 말곤 존재하지 않는 이유. 굳이 환영을 만들면서 까지 엘프마을을 구현해놓은 이유. 그리고 정말 환영 뿐이었다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식재료까지. 엘프중에 유일하게 음식을 먹던 것도 리온이었지.
아귀가 맞지 않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럼...촌장한테 가면 되는 건가.
“드디어 깨달으신 것 같슴다.”
“뭔가 열 받는데...어쨌든 뭘 해야 할지는 알았으니까 빨리 해결하자. 너무 오래 비워두면 유라랑 한솔이도 걱정되고.”
“...그럼 출발하지 말임다.”
“재들은 어떡할래?”
“...일단 놔두지 말임다.”
나와 저승사자는 커다란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일어나 촌장의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계세요?”
똑똑. 나는 조심스럽게 촌장님의 집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긴 한데. 곧이어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촌장은 문자 그대로 어제보다 약간 희미해진 느낌이었다.
역시...
“자, 들어오세요. 마침 차를 우려냈답니다.”
우리는 첫날처럼 촌장의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촌장은 언제나처럼 차분한 기색으로 찻잔을 우리들 앞에 내려놓았다. 촌장은 우리들 맞은편에 앉아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조용히 눈을 감은채로 입을 열었다.
“...역시 눈치 채셨군요.”
“마법이 약해지고 있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요. 이런 환영을 만들면서까지 버틴 건...리온 때문 맞죠?”
내 질문에 촌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리온 빼고는 전부 환영이었나. 촌장은 영혼만 남아있는 것 같고. 리온은 세연이를 보지 못한다. 3명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던 것도 혼자서 살아있었기 때문이지.
처음엔 그냥 엘프라서 성인이 되면 귀신을 볼 수 있나보다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더라고. 그렇게 따지면 그 가슴 큰 깐프 년도 세연이를 봤어야 하니까. 변이자랑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하나 더, 왜 이 마을엔 어린이가 리온 밖에 없을까. 그 부분은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대략적인 추측이 가능하다.
아마 다른 아이들은...
“...맞답니다. 저희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대규모 마법진을 이 숲에 설치했답니다. 저 아이는 저희 세계의 마지막 엘프에요. 저 아이가 죽는다면 이제 엘프라는 종은 멸종하게 되겠죠.”
...1명인 시점에서 이미 멸종한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불쑥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나도 눈치가 있지 그런 말을 대뜸 내뱉을 만한 인성 나락간 인간은 아니라고.
“여신님의 목적은 저희들의 영혼이시겠죠. 저희들의 영혼을 전부 바칠 테니, 저 아이를 거두어 주시면 안 될까요?”
촌장은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너무나도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대답하기를 주저하며 저승사자에게 눈짓으로 메시지를 날렸다.
데려와도 될까?
“마음대로 하지 말임다. 하나 정도야 큰 문제는...없을 검다. 아마도 말임다...”
불안하게 아마도 붙이지 말라고. 확실히 봉인당한 모리안 생각하면 죽이자고 했을 것 같은데.
“알았으니까 고개를 들어주세요. 나보다 연장자한테 고개 숙여지면 좀 그래요...”
동방예의지국에 태어난 자로서 장유유서에 약하단 말입니다!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냐만은. 촌장님은 내 말에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안심한 듯 한 미소를 짓고 있던 촌장님은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차를 홀짝였다.
“...이게 제가 마지막으로 마시는 차가 되겠군요...”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촌장이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적막으로 가득 찬 공간에 이따금씩 차를 후루룩 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리온은...데려와야겠지?
“그럼 리온을 데려올게요. 그 애도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하니까...”
“아니요. 괜찮답니다...아마 지금쯤 도착했을 거에요. 제가 마법을 해제했으니까요.”
“초, 촌장님! 사람들이! 시리아 언니가! 릴리 언니도! 모두 사라졌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거칠게 열리고 리온과 에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온은 겁먹은 얼굴로 촌장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촌장의 몸은 형체를 잃고 점점 희미해져만 가고 있었다. 저대로 가면 아마 더 이상 만지지도 못하겠지.
“리온. 이제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이 다 됐단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촌장님?”
리온은 현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니까. 마지막 작별인사 정도는 할 수 있도록 조용히 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차맛이 씁쓸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상쾌했는데.
“싫어요! 가지마세요!”
“이미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단다. 순리를 거스르는 건 크나큰 대가가 필요하단다. 아마 내 영혼은 여기서 소멸하겠지만...다른 엘프들의 영혼은 이분들이 성불시켜 주실 거란다.”
“그럼 나는? 나 혼자 살아야 해...?”
“아니란다. 리온, 너는 이 분과 함께 가려무나.”
퉁퉁부은 리온의 두 눈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참아냈다. 나 이런 거에 진짜 약한데.
“나랑 같이 가자.”
“...”
촌장님은 애써 리온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내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나는 힘없이 내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리온을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가슴팍이 축축해졌지만, 별로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도 걱정없이 떠날 수 있겠군요.”
“...애는 잘 돌볼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 늙은이가 사라지기 전에, 조금만 조언을 해드리겠습니다. 신들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어린 신이시여.”
촌장의 몸이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촌장이 있던 자리에는 반짝이는 구슬만이 남아아있었다.
“일단 원래 세계로 가져가지 말임다. 이곳에서 성불 시켜봐야 저승에 가지도 못함다...”
“...그래. 근데 어떻게 돌아가?”
나 돌아가는 법 모르는데?
“간절히 바라면 돌아갈 수 있지 말임다.”
...말하는 내용은 막장인데 틀린 말이 아니니까 뭐라 할 수 도 없고.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돌아가기를 바라며 에포나와 저승사자를 붙잡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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