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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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다. 먼 옛날에는 제국의 수도가 낙원에 비견될만한 크기를 자랑했지만, 제국이 세월 속에 파묻힌 지금 낙원은 명실상부한 대륙 최고, 최대의 도시였다.
낙원을 일주한 여행자는 수기에 ‘끝과 끝을 오가는데 3일이 걸리는 황금과 보석으로 둘러싸인 도시’라고 적었던가. 포모르는 그 구절을 떠올리며, 밑도 끝도 없이 골목 속으로 들어가는 테테의 등을 따라 걷고 있었다.
“길군...”
“그거야, 이 도시가 더럽게 크니까 그렇지. 신들이 모여 있다는 만신전을 빼도 삼일 밤낮을 걸어야 반대편 성벽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낙원이라고. 그만큼 뒷골목도 넒지! 뒷골목에서 술을 파는 노인이 말하기를, 어떤 신이 낙원을 건설할 때 취미삼아 뒷골목을 만들었다고 해. 인간들이 미로에서 헤매다 죽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나 뭐라나. 뭐, 결과적으론 헤매다 죽는 사람보단 주머니 털리고 죽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악취미로군.”
“신들의 감성은 우리 같은 하찮은 필멸자들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법이라구~ 그냥 그러려니 해!”
쾌활하게 말을 내뱉은 테테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진짜 뒷골목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녀가 코흘리개일 적부터 쏘다니던 곳이라, 그녀는 눈을 감고도 맞는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테테는 자유분방한 걸음으로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도, 시시때때로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따라오는 포모르를 훔쳐보았다.
‘1년 만에 밖에서 온 여행자라, 참 기묘하단 말이지.’
어느 순간부터 여행자가 줄어들기 시작해 근 1년 동안은 뒷골목에 새로운 여행자가 오질 않았으니, 뒷골목의 사람들은 꽤나 바깥소식에 굶주려 있을게 뻔했다. 테테는 그를 데려다줄 겸 낙원 바깥의 소식을 들어 볼 생각이었다.
낙원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바깥의 정보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밖에서 온 여행자 출신들은 바깥세상의 정보를 궁금해 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정보를 좀 듣는다면, 그걸로 용돈벌이정도는 할 수 있을 터다. 운이 좋으면 며칠 동안 편하게 보낼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얻을 수도 있겠지.
테테는 오랜만의 횡재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즘 벌이가 시원찮아 딱딱한 빵과 묽은 수프로 식사를 대충 때워야 했는데, 잘하면 고기가 들어간 수프에 부드러운 빵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자, 여기야. 영감! 나왔어!”
많은 사람들과 건물을 지나쳐 도착한 곳은 겉보기엔 허름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테테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포모르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허름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나름대로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드워프로군.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포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드워프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터라, 수염이 덥수룩한 난장이를 훎어 보았다.
“시끄러워, 이녀석아. 내가 소리 지르지 말라 그랬지?”
“헤헤, 좀 봐줘. 손님 데리고 왔다고.”
“손님?”
“응. 그것도 꽤 거물이야.”
“흥...이번만은 용서해주지. 이봐, 거기. 환전할게 있으면 여기에 올려놔.”
드워프는 카운터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포모르는 그 말에 따라, 품속에서 보석이 가득한 주머니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드워프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많은 보석을 들고 다니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군. 바깥세상이 초토화 된지 오래되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러니 이렇게 많은 거다. 쓸데가 없으니 말이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낙원을 제외한 대륙 전체가 황폐화 되었다는 이야기는 나도 익히 들었네.”
드워프는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 천으로 닦으며 하나하나 상태를 확인했다. 가짜 보석인지, 보석에 흠집은 있는지, 가공은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한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머니에 보석을 다시 집어넣었다.
“아주 좋아. 이거 진상품으로 올리면 신들께서 아주 좋아하시겠구만. 내 후하게 쳐줌세.”
“진상품?”
“자네는 외부인이라 모르는가 보군.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려면 진상품을 바치는 게 제일이라네. 특히 여신님들은 잘 가공된 보석에 아주 환장하시지. 이런 질 좋은 보석 몇 개만 바쳐도 귀족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어. 자네도 아직 남겨둔 게 있다면 진상품으로 바치는 걸 추천하지. 이왕이면 편하게 지내는 쪽이 좋지 않겠나.”
진상품이라. 어쩌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포모르는 품에 숨겨놓은 또 다른 보석 주머니를 생각하며 드워프의 말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넉넉하게 쳐서 15만 드라크마로 쳐주도록 합세. 아, 자네는 외부인이라 가치를 잘 모르겠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여관에서 식사포함 하루를 묵었을 때 10 드라크마일세. 때깔 좋은 집이 보보통 100만 드라크마 쯤 하고. 말을 사려면 아마 15만정도 필요할 걸세.”
“생각보다 보석의 가치가 낮군?”
현물 중에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게 보석인데, 제국의 황궁에 잠들어있던 보석이 고작 그 정도의 가치인가. 포모르는 파르사드가 이 주머니에 담긴 보석 하나면 수도에 저택을 살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후려치려는 건가...포모르는 이 드워프가 가격을 후려치려는 것이 아닌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허리춤에 걸린 검을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그는, 팔짱을 끼고 드워프에게 질문을 날렸다.
“그럴 수 밖에 없네. 요 몇 년간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보석이란 보석은 죄다 들고 왔네. 오죽하면 만신전에 있는 바벨탑의 외벽에 보석을 촘촘하게 박아도 남아돌 정도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인데 보석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아 아저씨, 우리 상도덕은 지키자구요~ 아무리 그래도 15만은 좀 그렇잖아? 응? 20만 정도는 쳐줘야 하지 않겠어?”
“꼬맹아! 이거 영업방해야!”
역시 후려치려던 건가. 포모르는 드워프를 노려보았다. 드워프는 포모르의 살벌한 시선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더 묵직해진 주머니를 내밀었다.
“23만 드라크마네. 내 미안해서 좀 더 쳐주는 거야. 그럼 잘 가게!”
“...고맙군.”
“고마워 할 필요 없어! 오빠가 돈을 많이 벌어야 내 몫도 커지는 법이거든. 게다가 원래 저 영감이 겁이 좀 많아서 저렇게 위협하면 덤을 잘 얹어주거든...더 줄테니 건들지 말라는 거지.”
“흠?”
낯선 호칭에 곤혹스러운 듯 포모르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세상에선 정말 듣기 힘든 단어였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엔 익숙한 단어였을지도 모르지만...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자 가자, 일단 여관에 가서 노곤한 몸을 풀어주자구!”
포모르는 테테를 따라 환전소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곤 뒷골목에 버젓이 존재하는 시장을 지나 역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여관에 도착했다.
“악마의 속삭임...신들의 도시에 있을 법한 여관이름은 아니군.”
“뭐, 신들이 뭐라 한 적은 없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여관 안에 들어선 포모르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은 듯 묘한 얼굴로 여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군. 대부분은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개중에는 비교적 깔끔하거나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 일단 밥을 먹자구. 당연히 내 몫도 사줘야 하는 거 알지?”
“...알았다. 메뉴는 네가 고르도록.”
“오케이! 필립 아저씨! 여기 닭고기수프 두 그릇이랑 흰빵 두 개!”
“오냐! 오늘은 돈 좀 벌었나 보지?”
“오랜만에 자비로우신 손님을 만났거든~”
“1년 만에 외지인이 들어왔나보구만! 낙원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나는 필립, 이곳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지.”
“포모르다. 바깥을 떠돌다 낙원에 왔지...”
포모르는 필립이 내민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이게 악수란 건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악수를 해본 것은 처음이라, 포모르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도, 여관이라는 것도 처음 겪어 보았으니까.
“여러분!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신들 발밑에서 꿈틀거리며 살 것입니까! 우리들은 신들이 아닌 우리들의 손으로 세상을 일구고, 문명을 이룩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입니까! 저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또 시작이구만.”
“저 아저씨 또 저래? 술 먹으면 매번 저러더라.”
테테와 필립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술병을 들고 일장연설을 펼치는 추레한 몰골의 남성을 쳐다보았다. 여관 곳곳에서 야유가 들려오기는 하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것을 보니, 으레 자주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건지, 코가 빨간 남성은 술병을 더 높이 치켜들고 우렁차게 소리질렀다.
“...바로 사회주의 낙원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야.
포모르는 그의 앞에 놓인 흰 빵을 찢어먹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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