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143.저는님 친구가 아닙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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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통은 키워주신 것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지만...”
나는 말끝을 흐리며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따지고 보면 저건 마리아의 시체에 여신이 깃든 것이니까 키워준 적도, 애정도 없는 게 되지 않을까. 아니지, 그래도 꽤 오랫동안 빙의해 있던 거 아니야?
내 방송 초창기부터 보였잖아?
못해도 반년은 얼굴보고 살았을 텐데, 그 정도면 아주 약간이라도 인간관계가 생겼을 거다. 보통이라면. 근데 지금 상황이 보통이 아니란 말이지. 일단 저 속 알맹이가 인간이 아닌 여신이라는 게 첫 번째 문제고, 두 번째 문제는 여신의 감성이 인간과 다르다는 게 문제였고, 세 번째는 저 몸의 주인이 죽었다는 것.
마리아는 왜, 어떻게 죽었을까?
마리아의 부모님들은 자기 딸이 사실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시겠지. 알고 있다면 분명 난리가 났을 테니까. 이 잉여신이 스스로 최면이나 암시 같은 거 쓰지 못한다고 말했으니까 그런 가능성도 없고.
“마리아, 그 몸의 원래 주인은 어떻게 죽었어?”
“모르겠네요. 일어났을 때는 길거리 저는 그냥 적당한 몸을 찾아 들어온 거라서...”
“하아...그럼 마리아의 기억 같은 건 좀 남아있어?”
적당히 기억에 남아있어야 의심하지 않고 말을 맞출 텐데. 그렇게 빡빡하게 물어보는 부모님은 별로 없다지만, 그래도 알아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최소한 대학교를 어디 다녔다든지, 고등학교를 어딜 나왔다든지 정도는 아는 게 속 편하다.
“약간 정도는요? 일단 집 위치랑,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기 방이랑...컴퓨터 비밀번호랑, 대학교는 다니지 않았다는 것 정도네요. 빙의하자마자 도로에 누워있었고 몸에서 피를 많이 흘리길래, 마법으로 몸을 치료하고 집에 들어갔네요.”
뺑소니인가? 도로에 누워있을 이유가 그거 말곤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뺑소니>사고사>잉여신이 빙의>치료후 귀가>그대로 방구석에서 X수질 시작 이렇게 되는 건가? 시작은 둘째 치고 결론이 너무 에반데?
“어, 그러니까 빙의하고 보니까 몸이 만신창이여서 치료하고 집에 들어가서 방구석에 틀어박혔다는 거야?”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그럼 빙의하자마자 방콕 생활부터 시작한 거냐고! 무슨 방콕의 여신이라도 돼? 아 몰라. 적당히 친구행세나 하고 빠져야지. 쓸데없이 오지랖 부리다 남의 사정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다.
내가 오지랖 부리다 별의별 꼴을 다 봤는데 이젠 각이 조금만 보여도 뭔 일이 펼쳐질지 뻔하다.
분명 어디선가 폭탄이 터질 거야.
엄마가 나를 단번에 알아봤던 것처럼, 어쩌면...
그렇게 하염없이 걷던 우리는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고급아파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였다. 꽤 잘사는 집인가 보네. 근데 따님의 상태가...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마리아를 슬쩍 쳐다보며, 우리는 경비실을 지나 아파트 입구 앞에 섰다.
“난 적당히 친구 행세하고 빠질 테니까, 알아서 잘 해봐...”
“맡겨만 주세요! 인간 두 명 속이는 정도야 식은 죽 먹기에요!”
...못 믿겠어! 난 저런 대사 치는 년놈들치고 제대로 일을 처리하는 걸 본적이 없단 말이야!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어버버하다가 골든타임을 놓치고 더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지!
“자, 여신님, 내 말 잘 들어봐. 지금부터 우리는 대충 고등학교 동창이고, 어쩌다보니 다시 만나게 돼서 내 일을 도와주고 있다는 식으로 입을 맞춰보자. 저번에 계약서는 보여드렸지?”
“어...좀 미심쩍어 하는 것 같긴 했지만 보여줬어요.”
“사진은? 사진은 보여줬어?”
그때 내가 사진을 어떻게 찍었더라? 무슨 표정으로 찍었는지 기억이 안나. 내 얼굴이 마리아의 부모님에게 알려져 있는 상태라서, 이래저래 말을 잘 맞춰야 한다.
“네. 그 때 보여드렸으니까...그때 반응이 좀 이상하긴 했네요.”
“어떤 식으로?”
마리아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눈을 크게 뜨곤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미심쩍은 표정이었어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발언 감사합니다! 내가 생긴 게 이래서 이게 내 얼굴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게 인터넷으로 합성한 사진이 아닌지 의심했던 게 아닐까? 솔직히 내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에, 백발인 미소녀가 자기 딸이랑 같이 사진 찍은 거 보여줘도 대부분 못 믿지 않을까.
내가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미녀라면 모를까, 보기 드문 황금색 눈에 백발을 가졌다보니 솔직히 사진 하나로 믿기는 힘들 텐데.
“후...일이 점점 귀찮아지네. 어쨌든 그, 뭐냐, 그 육체 나이 알아요? 성인일 테니까 주민등록증이 있기는 할 텐데.”
“어...잠시 만요.”
마리아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너무 무방비한 한 거 아닐까. 물론 내가 그만큼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러는 거겠지만. 나는 주민등록증을 받아들고 갈색 피부를 가진 금발여성의 사진을 쓱 보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확인했다.
이름은 김마리아고, 98년생...발급일은 4년 전이니까 20살 때 발급 받은 건가.
“...4살차이? 나도 나이 속여야 되나?”
24? 나도 24이라고 속여야 하나. 서양 쪽은 나이 차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다지만 그건 서양이고 여긴 한국이니까. 한국은 1살만 차이나도 위아래 따지는 인간들이 사방 천지에 깔린 곳이라고. 어쨌든 외형은 내가 훨씬 연하로 보이니까 친구라고 말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지만.
“나이가 상관있어요? 수 천살 차이나도 친구는 친구잖아요.”
“그건 신이고 지금 저희는 인간 부모 만나러 가는 거거든요? 한국인은 한두 살만 차이나도 위아래 따지는 종족이라 이거 꽤 중요해요.”
“피곤한 족속이네요.”
그건 나도 동의한다. 피곤하게 살기는 해.
나는 마리아가 아파트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을 지켜보며 턱을 긁적였다.
진짜 이거 괜찮나?
들킨다고 뭐 큰일이 생기진 않겠지만, 귀찮아질 것 같은데. 하필이면 이 묘하게 컴터만 잘 만지는 여신이 내 편집자라서 무시할 수도 없고. 일단 다른 쪽으로도 협력자니까 도울 수밖에 없다.
유리문이 열리자 나와 마리아는 1층 복도로 들어섰다. 역시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인지, 아파트 1층 복도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았다. 오래된 아파트는 벗겨진 페인트나 계단에 패인 자국, 채 사라지지 않은 얼룩 같은 게 많아서 낡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데.
역시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는 다르네.
“자, 들어가요.”
다행인지 아닌지, 우리 말고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은 없었다. 마리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26층의 버튼을 눌렀다. 높은 곳에 사네. 나는 지금 사는 곳이 제일 높은 곳인데.
“그래서, 다녔던 고등학교 이름 알아?”
“어...몰라요!”
으아아악! 진짜 내가 이거 가는 거 맞아? 맞냐고! 뭐 아는 게 있어야 친구행세라도 하지! 아 몰라 그냥 되는대로 말하면 되겠지. 아는 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고등학교 동창설정은 폐기하고. 그냥 뭐 어쩌다 만난 친구라고 이야기 할게.”
인터넷으로 만난 친구라고 해도 되나? 뭐가 됐든 어디서 사귄 친구냐고 물어보긴 하나? 나 때는 친구 집 놀러 가면 잘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때야 당연히 급식시절이니까 친구=학교 친구로 알아서 생각하셧을 테니 당연한 거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저도 독립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일하는데 간섭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번거로운 일이에요.”
음...그 일이 하루 종일 컴퓨터 만지면서 하는 일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일단 편집자 일 시작한지 한 달 좀 넘었고. 그전까지는 쌀먹하고 있었다고 했으니까...게임으로 돈 벌었다는 소리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부모라도 간섭 안하고는 못 배길 것 같아. 쌀먹하는 딸이라니! 누가 봐도 막장인생 그 자체잖아! 그러던 딸이 갑자기 편집자한다고 해도 쉽게 믿을 수 있을리가!
게다가 이건 좀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금태양 그 자체인 외모를 보면 이래저래 과거사가 화려할지도 모른다. 방금 주민등록증 사진부터 금태양이었단 말이야. 발급일이 4년 전이니까 예전부터 금태양이었단 건데...
[26층, 26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나와 마리아는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문 앞에 섰다. 문은 최신 아파트답게 도어락으로 되어 있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지. 나는 혹시 몰라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나 방구석 여포라서 이런 거에 진짜 약한데.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냥 몇마디 이야기만 하고 돌아가면 되는 일이야.
긴장할 필요가 뭐가 있다고.
마리아가 도어락을 짝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좁은 복도를 울린다. 나는 잠시 머리카락을 배배꼬며 긴장을 삼키고, 마리아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당기자 현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 안쪽에서 누군가의 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마리아의 뒤에 붙어 현관으로 들어섰다.
“어, 엄마, 나왔어요.”
어색한 목소리. 부모를 부른다기 보다는, 몇 번 만나보았지만 친하지는 않은 지인을 부르는 느낌에 가까웠다. 왜 그 서먹서먹한 느낌. 막장드라마 급 가정사정을 가진 가족이 아니면 볼 수 있을법한 광경은 아닌데.
“리아야 왔니?”
그나마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약간 서먹하지만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네. 말한 대로 친구 데리고 왔어요.”
“아, 안녕하세요 어머님.”
나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정말 오래만에 90도를 허리를 꺾으며 마리아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몸을 다시 세우며 마리아의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내 외모와 머리카락을 보며 좀 당황한 표정을 짓기는 하셧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은 아주머니는 내 인사를 받아주셨다.
마리아의 어머니는...마리아와 비슷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는 좀 하얘서 인상은 완전히 달랐지만.
“여보도 좀 나와봐요! 리아가 친구를 데리고 왔어요!”
“딸이 진짜 친구를 데리고 왔다고?”
아주머니의 외침에 안방인지 모를 방에서 나이가 지긋하신 중년 아저씨가 간편한 차림으로 나타 나셨다.
....평범한데. 뭐지?
묘하게 이국적으로 생기시긴 했지만 금태양이 나올 것 같은 외모는 아니신데. 피부가 좀 어둡긴 하시지만 흑발이시고.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나?
내 머릿속이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