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142.저는 님 친구가 아닙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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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 주인의 어머니가 방안에 맨날 쳐박혀 있지말고 밖에 나가서 친구 좀 사귀라고 해서 친구 있다고 대답해서 친구 데려오라고 했다고? 그래서 친구 행세 좀 해달라고?”
아니 난 뭔가 판타지틱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내용이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마리아를 흘겨보았다. 마리아는 정말로 절박했는지, 내 양손을 꼭 붙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어허. 안 돼 돌아가 난 들어줄 맘 없어.
“네. 한번만 집에 가서 친구 행세 좀 해주세요! 안 그러면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생겼단 말이에요!”
“저는 님 친구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요?! 저랑 매일 X톡으로 대화도 나누면서!”
아니 그건 업무상 메시지니까, 비즈니스잖아. 보통 비즈니스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는 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이젠 울먹이기까지 하는 마리아를 째려보았다. 내 신에 대한 환상이 다 박살나려고 하는데.
한명은 극한의 육식주의자고, 한명은 찐따 기질 다분한 여신이고. 도대체 이 바닥 신들은 왜 상태가 하나 같이...그 오르쿠스였나 하는 신이 정말 신 같은 신이었네. 우리가 생각하는 신같은 이미지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아니, 생각해보니까 신화에 등장하는 신 치고 정상적인 신이 별로 없었지. 그리스 로마신화는 말할 것도 없고, 북유럽도 그렇고 인성파탄자에 내로남불이 패시브인 족속들이다. 신에게서 뭘 기대하는 게 이상한 거지.
그나마 내 바로 앞에서 내 손을 꼭 잡고 부탁하는 여신은 방구석여포 기질이 있어도 나름 상식적인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최소한 정신나간 짓은 안하잖아.
그렇지?
“한번만 같이 가서 친구라고 이야기만 해주세요. 네?”
...신 맞지?
“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시는 거에요?”
“어...나름 여신이면 최면이나, 암시나, 뭐 이러쿵 저러쿵 해서 속여 넘기면 되는 거 아니야?”
신이니까 그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지 않나? 신이 라는 게 편의주의적 존재니까 편의주의적 능력 같은 것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게 보통 아닐까. 나도 머리카락을 손발처럼 사용한다거나 입에서 피를 무한정 뱉어낸다거나 머리를 분리한다거나 하는데 신이면 나보다 더 기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게 아닐까?
당장 흡혈귀 변이자인 한솔이도 눈으로 최면 거는데? 본인 말로는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 다고 하지만 어쨌든 걸잖아. 근데 신이 그걸 못해? 신들 생각보다 무능한 거 아닐까?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 몸이 아니라 재벌2세 몸에 들어가서 살았을 거에요! 그럼 궁상맞게 방구석에서 쌀먹질하면서 버티지 않았을 텐데...”
뭐 쌀먹? 나한테 도네 달리던 돈이 어디서 나왔나 했는데, 게임으로 돈을 벌어서 도네를 넣고 있었나보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하네. 신이면 신답게 뭔가 뿅 하고 돈 좀 벌면 안되나.
신도 돈 문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 여신이 그냥 궁상맞은 걸까. 환상이란 환상은 다 와장창 부숴대는데 이젠 신에 대한 존경심은 한강에 던져버린지 오래였다. 이젠 그냥 평범하고 상식적인 신이면 감동할 것 같아...
“네? 제발요. 네? 솔직히 저 쫓겨나면 유진씨도 골치 아프시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유능한 편집자가 일을 못하면 나도 손해긴 하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이런 일에 휘말리고 멀쩡하게 끝난 적이 없단 말이야. 며칠 전에도 왠 미친놈이 나한테 칼 휘두르다가 경찰서에 잡혀갔고.
“친구비.”
“네?”
“친구비를 내놓거라!”
나는 마리아 앞에 손을 내밀었다. 마리아는 당혹스러운 듯 내 단호한 눈빛과 손바닥을 번갈아 보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꺼내 올려놓았다.
어?
“다 줄 테니까 친구 역할 좀 해주세요...”
농담한 건데 다큐로 받아들이면 제가 인간쓰레기가 되어버린 거 같잖아요...나는 누가 볼세라 마리아의 손에 다시 지갑을 쥐여주었다. 내가 아무리 돈에 미친 듀라한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타락한건 아니라고!
가난한 여신님 등쳐먹을 정도로 인성이 터지지는 않았어! 내가 이래봬도 급식 시절에 봉사활동만 100시간 넘게 한 사람이야! 봉사활동 시간 채워야 해서 한 거긴 하지만.
“농담이니까 다시 가져가세요.”
“네? 저는 진짜일줄...”
...이 여신님 안에서 나는 도대체 무슨 이미지 인걸까. 내가 방송에서 돈에 환장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제가 진짜 친구비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
“내가 그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는데...”
“어...그래요?”
왜 미심쩍은 눈길로 보십니까. 눈 찔러버리고 싶게. 내가 돈에 미친년은 맞지만 그래도 선은 지킨다구요. 내가 돈 벌려고 방송을 하기는 하지만 나름 베풀 줄도 알고 쓸 때는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소리 들으면 제 유리멘탈이 깨져서 쓰레바퀴에 한번 쓸어 담아야 할 것 같거든요?
“...다행이다. 카드는 다 빼놓긴 했지만...”
뭐? 내가 친구비 내라고 말할 거라는 예상이라도 했던 건가. 아니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만 친구비 내라고 할 거 같아서요...”
처음부터 지갑에 카드를 빼놓고 있었던 거라고?
그건 좀 너무하잖아? 내가 아무리 돈에 미치긴 했어도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막나가는 인간은 아니란 말이야! 내가 돈에 미친년은 맞지만! 그래도 선은 넘지 않는 건전한 미친년이라고!
“정말로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농담인데...”
“어어...어...그러면 공짜로 해주시는 건가요?”
“...나중에 밥이나 한 끼 사세요.”
“감사합니다!”
내 손을 꼭 붙잡고 감사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그려. 그래서 친구 행세라는 게 뭔데?
“근데 친구는 뭘 해야 친구지?”
생각해보니까 나도 친구 사귄지 엄청 오래돼서...대학생 이후로 친구랑 만나본적도 없고.
한솔이요? 어...친구는 맞는데...뭔가 좀 다른 느낌? 아니 분명 절친이긴 한데 성격이 착한 것도 있어서 일방적으로 잘 받아 주니까...골 때리는 사고로 시작한 인연이라 특이 케이스라고 생각하자.
여신님은 내 질문에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을 감고 신음을 내다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야스?”
아이고...나는 이마를 탁 치며 저 안타까운 방구석 여포의 말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마 니 서마터폰 중독이다! 거기서 그게 도대체! 왜! 나오는! 건데!”
“어...인터넷에선 뭔가 감탄사 같은 걸로 쓰던데요? 치킨을 뜯으면 야스다 같은 느낌으로?”
“으아악!”
방구석여포라도 이건 너무하잖아! 얼굴값 하라고! 외모만 보면 밖을 싸돌아다니는 NTR전문가인척 하는 호구처럼 생겼으면서! 요즘 세상이 막나간다지만 이건 좀 아니지!
“인터넷은 인터넷! 현실은 현실!”
왜 밖에 나가서 친구라도 사귀라고 말하셨는지 정말 이해가 잘 되네! 나 같아도 딸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되도 않는 소리를 배워와서 짓거리고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올 법 하다! 이걸 그대로 여과 없이 부모님한테 말했으면 누구라도 쫒아내고 싶을 거야!
“어...현실에선 뭐하는데요?”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쇼핑도 하고, 놀러가고 뭐 그런 거 하겠지! 최소한 그건 안 해! 그걸 하는 시점에서 친구라고 부르질 않는다고!”
“야스요?”
“아 좀 닥쳐! 여기 길거리야! 소리 내서 말하지 마!”
여신님 한창 현역이던 시절은 어땠는지 몰라도 아직 유교드래곤이 살아 숨 쉬는 이 땅에서 그런 불경한 소리를 했다간 사람들이 다 ‘저년들 길거리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하는 시선으로 쳐다볼게 뻔하다고!
벌써부터 앞길이 막막하네.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진짜, 나 힘들어...이 방구석 여포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돼? 아니 뭔가 내가 친구 행세 해준다 쳐도 뭔가 폭탄발언을 해서 죄다 터트릴 것 같은데. 내 매니저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니!
“일단 야스는 금지. 입 밖으로 내뱉지 마십쇼. 아무데서나 그런 소리를 하는 건 공공외설죄란 말입니다.”
“어...알았어요.”
뭔가 석연치 않은 대답이긴 하지만, 일단은 알아들었겠지. 여기가 한적한 길가라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사람 많은 곳이었으면 지금쯤 온갖 시선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렸을 거라고.
“후...일단 충고해두는데, 인터넷 용어는 쓰지 마세요. 그건 현실에서 말로 내뱉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괜히 사람들이 안 쓰는 게 아니니까 말로 하지 말아줘...방금 현타 씨게 왔으니까...”
“현타도 인터넷 용어 아니에요?”
“아니, 그걸 또 알아듣네. 어쨌든 저희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에게는 그런 말 쓰면 안됩니다.”
“제가 더 나이 많은데요?”
“아무튼 외관 연령은 훨씬 어리잖아! 그리고 지금 그 금태양 몸에 들어갔으니까 호적상 부모한테는 부모처럼 대해야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몰라?”
“부모...인간의 부모는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뭐?
나는 예상외의 질문에 할 말을 잃고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마리아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나를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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