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158화 (158/352)

〈 158화 〉 140.나는 새치가 싫다(2)

* * *

[지금 거신 번호는, 통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 되오며,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내가 너무 일찍 전화했나? 마리아에게 여러 번 전화했지만 마리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승사자는...내가 부르는 법을 모르고. 그럼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기밀관리본부 정도였다. 그전에 왠지 가면 사람들이 또 뭣한 시선으로 쳐다볼 것 같으니까 뭔가...적당한 현금술을 시전하고 들어갈까.

“요즘 추석선물은 뭐가 좋지?”

“어...x팸세트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기밀관리본부 직원이 몇 명이더라...아 몰랑.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추석선물을 죄다 구매해버리기 시작했다.

­­­­­­­­­­­­­­­­­­­­­­­­

“...붉은색 새치가 점점 늘어나더니 옆머리를 반쯤 뒤덮었다는 겁니까?”

“네. 이거 뭔가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싶어서 왔는데요...”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트와 내 머리카락을 번갈아 쳐다보던 곰닥터는 아마도 진지한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곰 표정을 어떻게 알아.

“흠...머리카락은 대부분 원래 색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편견이 있지만, 사실 여러 요인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색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유진양의 경우, 아주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현대의학으로는 정확한 진단이 불가능합니다.”

역시 그런가. 나도 이게 현대 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검사 받아본 거지. 밝혀지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겸사겸사 라쿤박사님께 근황보고도 하러온 셈이었다.

“일단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제 연락처로 연락을 하시면 됩니다.”

나는 곰닥터에게서 명함을 건네받았다. 예전에 안 받...았던가?

나는 명함을 건네받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내가 복도로 나오니, 나와 함께 왔던 세연이와 유라가 내 양옆에 들러붙었다.

“곰아저씨가 뭐래요?”

“모른데.”

“그럴 것 같았어요.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보통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좀 슬프다? 현대의학으로 해결되는 문제만 생기면 안 돼? 이러다 일 생기면 무당부터 찾아야 할 판인데? 진짜 울고 싶네? 돈이 있으면 뭐해? 병원이 의미가 없는데!

그나마 쓸데없이 몸이 건강해서 다행이지! 하루에 피 몇 리터씩 꾸준히 흘리면서 건강한 인간은 나밖에 없을 걸?

아니, 나 인간 맞나?

“그럼 이번엔 라쿤 박사님한테 가볼까...유라야, 선물가방좀 건네줄래?”

“여기요. 근데 라쿤 박사님이 화내시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할걸?”

나는 유라에게서 라쿤박사님을 위한 선물이 들어있는 종이 가방을 건네받아 라쿤박사님의 집무실로 향했다. 중간 중간 업무를 하러가는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 앞에 도착하니, 어쩐지 안이 소란스러웠다.

설교하시는 건가. 라쿤박사 특유의 악센트 섞인 목소리가 굳게 닫힌 문을 뚫고 울려 퍼졌다.

“들어가도 되나?”

“어...안되지 않을까요?”

“그럼 잠깐만 기다리자.”

나 말고 저렇게 혼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누군지 몰라도 반갑네! 나는 맨날 나만 혼나는 줄 알았지! 하긴 여기 직원들도 잘못을 하긴 할 테니까 혼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오늘 처음 봐서 그렇지.

“...가게!”

나는 유라와 함께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곧 이어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은하였다.

“안녕.”

“혹시 무슨 사고치셔서 오신 겁니까? 그러면 오늘은 조용히 잔소리만 듣고 가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뭐? 왜? 무슨 일 있었어?”

“그게...사실 일부기관들이 일부 우량주에 투자하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아, 그거. 국민연금이 그걸로 유명하잖아. 하는 것마다 족족 수익을 내서 유명하던데. 물론 초 장기 전략에다 극한의 안정성을 추구하니까 나올 수 있는 수익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주식 이야기가 왜 나오지? 설마?

“설마 기밀관리본부도 주식에 넣었다가 꼬꾸라진 거야?”

“그, 우량주였던 게임회사에 30%가량의 예산을 넣어 놓았습니다만...”

“와...그 회사면 지금 주식 떡락하지 않았나?”

나야 그 회사 게임도 옛날에 조금 건드려본 적 밖에 없고 크게 관심도 없긴 했지만, 이번 사건이 워낙 유명해서 요즘 화제던데. 누가 맨날 주식 얼마 떨어졌느니 하면서 관음하고 있더라.

“담당 직원이 태업을 하다가 매도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지금 손해가...그 직원은 지금 시말서에 감봉에 징계에...저는 라쿤박사님을 달래드리고 나오는 길입니다.”

근데 거기에 집어넣었다가...떡락했다고? 그냥 개미들도 아니고 기관이? 투자하는 단위 수 자체가 다를 건데 손해가 도대체 얼마야. 라쿤박사님이 빡칠만 하네. 기관 단위면 최소 몇억~몇십억 때려박아도 이상하지 않은데...30% 가까이 떨어졌다고 들었는데 그게 손해가 얼마야? 아파트 몇채값이 그냥 꽁으로 날아간 거 아녀?

일단 그 직원은 진짜 직장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겠네.

“근데 이런 거 나한테 말해도 돼?”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유진씨는 반쯤 저희 기관 소속이시기도 하니까요.”

“엥? 언제부터?”

“아니었습니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음...마음속에 조용히 담아 두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그런 거 말할 사람을 보여? 내 인생사가 너무 험난해서 그런 이야기 들어도 금새 까먹을 걸?”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방금 뭐야? 뭔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본 것 같았는데? 내가 그런 거 하나 안 지킬 인간으로 보인다 이 말인가? 물론 내가 좀 인생을 무지성으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말실수 자주해서 방송에서도 극딜 당하기는 하는데...나 그런 거는 잘 지켜...

아 몰라. 빨리 이야기 하고 나와야지. 나는 굳게 닫힌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라쿤 박사님! 저 왔어요!”

“...들어오게!”

라쿤박사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책상위에 엎어져 있는 라쿤박사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또 사고를 친 겐가!”

적어도 엉덩이를 이쪽으로 하고 말하지는 마시죠. 쓸데없이 토실토실하고 푹신푹신해보여서 킹받거든요?

“어, 맞다고 하면 맞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데요...갑자기 머리색이 변하기 시작해서 도움 받으려고 왔어요! 그리고 여기 선물도요!”

나는 선물을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오기 전에 애완동물샵에서 사온 고급진 선물이었다. 아 이것들 산다고 40만원 정도 썼다고. 그래도 내가 벌인 일 뒤처리 하는 비용 생각하면 새발의 피겠지만.

“자네! 장난하나! 나를! 뭘로! 보고! 이런! 선물을!”

엥. 개껌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일부러 크고 아름다운 고급진 개껌으로 준비했는데요...라쿤 박사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은 솔직한 모양인지, 개껌을 이빨로 열심히 뜯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무흔! 이인가!”

개껌은 입에서 떼고 말하시죠.

“이거 보여요? 옆머리가 점점 빨간색으로 변하고 있거든요? 이거 때문에 온거에요.”

“그러고 보니! 머리색이! 변했군! 이리오게!”

자기 몸만한 개껌을 내려놓은 라쿤 박사는 가까이 다가온 나의 머리카락을 가까이서 지켜보다 만지작 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무리 봐도 개가 냄새로 신원확인 하는 느낌인데.

“잘! 모르겠군! 혹시! 하얀 머리카락 하나! 빨간 머리카락 하나! 줄 수 있겠나!”

“여기요.”

나는 머리카락 두 가닥을 뚝 떼다 라쿤박사의 앞발에 올려놓았다. 라쿤박사는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샘플 보관용 케이스에 따로 분류해 집어넣었다.

“일단! 실험을 해 볼 테니! 돌아가게! 지금은! 많이! 바빠서! 말일세!”

하긴 주식 터진거 수습하려면 엄청 바쁘긴 하겠다. 예산 계획도 다시 짜든지 해야 할거고. 나는 라쿤 박사의 말에 따라 조용히 집무실을 떠났다.

근처에 있는 수제버거 집에서 햄버거 몇세트만 포장해서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

“언니, 사람들이 자꾸 쳐다봐.”

뭐 왜 뭐. 백발에 옆머리만 시뻘건 미소녀 처음보냐.

그래 처음 보겠지.

그러니까 잔뜩 보든가 말든가. 사진 찍으면 손가락이랑 휴대폰을 같이 반으로 접어버릴 거지만. 전에 사진 찍은 새끼들 진짜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학생이라서 흐지부지 됐다더라.

어쨌든, 빨리 사서 가야지. 밖으로 나올 때마다 하도 시선을 끌다보니 이제는 수많은 시선들 앞에서도 뻔뻔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저런 시선에 하나하나 신경 쓰면 아예 밖을 돌아다니지도 못 할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감탄, 질투, 색정, 부러움이 담긴 시선을 매번 받는다면 나처럼 사람들 시선은 신경도 안쓰게 될 걸? 일일이 신경쓰면 짜증난다니까?

게다가 요즘은 그런 시선을 받는 빈도가 늘어난 게, 내가 외출만 하려하면 유라가 전에 사놓은 여성복을 입힌다고 유난을 떨어서 치마를 자주 입게 된 게 좀 큰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청바지에 블라우스위에 자켓 하나 걸친 게 끝이긴 하지만.

“저기요...”

“네?”

또 뭐야. 나는 나를 부른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목만 돌리면 아무래도 부자연 스러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좀 어색하게 보이긴 하겠지만 뭐 어쩌겠어. 듀라한인 거 들키는 것 보다는 낫지.

“그쪽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번호 좀...”

“싫은데요.”

아 난 남자한테 관심 없다고. 그리고 말하면서 가슴 쳐다보지 마라. 가슴 쳐다보는 그 마음은 이해한다만, 너무 노골적이잖냐.

“그러지 말고 한번 만...”

“한번이고 자시고 됐어요.”

“거 되게 비싸게 구네...”

매장 손님들의 시선이 나와 이 멀대같이 키만 큰 헌팅남에게 집중되는 걸 느꼈다. 아 좀 꺼지라고 좀.

유라가 불안한 듯 내 손을 꼭 붙잡고 눈치를 보자, 진심으로 때려서 쫒아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참아라 유진아. 여기서 치면 저 남자는 최소 중상에 나는 폭행죄로 잡혀간다고.

“그냥 조용히 가시죠?”

표정 겁나 띠껍네. 좀 생겼다고 지금 근자감으로 나한테 지랄하는 거냐.

지옥참마도 마렵네 진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