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139.나는 새치가 싫다(1)
* * *
...어?
이른 아침, 씻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선 나는 거울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새친가?”
내 왼머리 구렛나룻쪽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옆머리에 브릿지를 단 것만 같은 모습이라,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가 더 화려하게 변해 있었다. 기껏해야 일부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었을 뿐인데 이게 또 묘하게 어울리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원판이 워낙 뛰어나니까 어울리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 얼굴로는 군바리 헤어해도 어울릴 거야. 아니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새끼손가락 정도는 될법한 새치 뭉치를 만지작거리며 계속해서 거울을 쳐다보았다. 이거 그냥 놔둬도 되나? 자르는 건...무리고. 애초에 전기톱을 갖다대면 전기톱 날이 나가는 미친 강도의 머리카락을 무슨 수로 잘라.
이건 X시무라 호 가서 X라즈마 커터 가져와야 자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엑스칼리버 같은거 가져와서 자르거나.
그런데 엑스칼리버가 정말 실존할까? 솔직히 별의 별거 다 튀어나오는 이 마굴 같은 세상을 보면 엑스칼리버 정도는 진짜로 존재할 법한데. 물론 검에서 빔이 나오진 않겠지만. 어느 게임 때문에 사람들이 검사는 다 칼에 빔을 쏠 줄 안다고 생각한다고!
나는 새치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불길한 사건의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쓸데없이 굴곡진 인생사를 생각하면 갑자기 새치가 말을 걸어와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니지?
갑자기 ‘와! 나는 마법의 새치! 마법소녀가 되어줘!’같은 건 아니겠지? 바꿀꺼면 하다못해 마스코트가 튀어나오라고! 모 하얀 축생처럼 마법소녀를 권유하는 새치를 떠올린 나는 그 끔찍함에 몸서리 쳤다.
솔직히 전적이 있어서 새치가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말 걸어와도 납득할 것 같은 자신이 있었다. 시발 요 근래 내 인생이 어지간히 험난해야지. 자서전에 쓰면 미친년 취급받기 딱 좋은 이야기만 한 가득이야.
아니지, 그냥 판타지 소설을 써도 될 것 같은 이야기가 한 가득이다. 이참에 웹소설 한 번 써봐? 수필로 써도 200편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TS인방물이 인기라던데 진짜 그냥 기억나는 대로 써도 생생한 TS미소녀 일기 쌉가능인데.
물론 진짜로 쓰면 라쿤 박사님의 ‘사고 멈춰!’가 날아오겠지.
이번에는 잔소리에 급식 시절 말고는 써본 기억이 없는 반성문까지 쓰게 한다고 했으니 망상만 하자! 이 나이에 반성문은 에바야!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라쿤박사님이랑 연락을 한 적이 없네. 결국 사고를 안 쳤다는 의미니까 좋은 소리긴 한데 안부 전화 정도는 해볼까? 오랜만에 연락하면 반겨주시겠지...? 아니, 무슨 사고 안쳤냐고 의심부터 받겠네.
내가 전화를 걸때는 언제나 사고가 터진 뒤였으니까!
...아니, 생각이 딴 데로 새어버렸네, 일단 이 새치가 뭔지 해명해야 되는데.
내 몸에 일어난 변화가 절대로 평범한 것일 리가 없다. 머리가 떨어지고, 내 머릿속에 상상 친구 비슷한 여신님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단 입주하고, 처녀귀신 친구가 생기고, 지옥참마도를 저승사자한테 선물 받고, 왠 호랑이랑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고, 이젠 다른 세계에서 온 놈들이랑 판타지 영화를 찍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그냥 새치가 생겼다고 어떻게 믿어!
차라리 내가 원래 남자였다는게 차라리 더 신빙성이 있겠다!
...아니, 나 전직 남자 맞는데?
아직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그렇게 생각할 만큼 암컷이 되었단 말인가! 이젠 내가 미소녀가 되기 전에 뭘 했는지 기억도 안나! 젠장! 이러다 남자보고 반하는 건 아니...지?
끔찍한 가능성에 나는 몸서리치며 머리를 붙잡고 180도 회전시켰다. 끼야야야야악! 내속에서 지워버려! 내가 남자와 사귀게 될 미래는 그 어떤 곳에서도 없다!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어! 존재한다면 전부 지옥참마도로 썰어버릴거야아아아아아!
나는 그런 끔찍한 미래 인정할 수 없어! 차라리 사귈 거면 여자랑 사귀고 말지! 원래 여자는 여자랑 사귀는 게 맞다고 생각해! 반론은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난 동성애자가 아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 새치는 정체가 뭘까.
진짜 모리에몽 마렵다.
원래 이때 쯤 모리에몽이 이건 ~~느니라 하면서 주절주절 댈 타이밍이었는데. 벌써 일주일째 여신님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에도 가끔 하루이틀정도 조용해지실 때가 있긴 했는데, 일주일 동안이나 조용한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쓸쓸한데. 여신님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다. 한 달 정도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버렸구나. 씁.
나는 머리르 원래방향으로 되돌리고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까끌까끌한 느낌. 전에 확인해 보니 뭔가 묘한 문신 같은 게 새겨져 있더라. 아마도 그 노인이 한 짓거리겠지. 어쩌면 이것 때문에 여신이 조용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마리아를 만나 봐야 하나?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새치 하나로 도대체 이게 무슨 궁상이람. 뭐 때가 되면 알아서 말을 걸어오든 지 혼자 움직이든 하겠지. 여태까지 그래왔으니까, 그냥 나는 평범하게 하루를 살아가면 될 뿐이다.
나는 화장실을 나와 냉장고 앞에 서서 아침 메뉴를 고민했다. 으레 하는 일이다. 보통은 여신님의 인도에 따라 육류를 자주 섭취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침은 가볍게 먹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아침부터 굳이 무겁게 먹을 필요가 어딨다고. 고기는 점심~저녁때 먹는 게 최고야. 아침부터 기름진 음식 먹으면 속에 얹힌다고.
귀찮은데 토스트나 구워서 설탕 뿌리고 커피랑 먹을까?
아니면 역시 아침이니까 든든하게 밥 해다가 적당히 반찬 만들어서 먹어? 계란도 좀 남아있고 된장도 있으니까 된장찌개에 계란프라이 정도만 해 먹어도 아침 식사는 뚝딱인데. 아, 그러고 보니까 애호박이나 두부 어제 다 먹은 거 같은데.
된장찌개는 무린가...그럼 뭐 해먹지. 나는 냉장고를 열고 식재료를 체크했다. 당근이랑, 당근이랑, 당근이랑, 당근이랑, 그 사이에 피망이랑 감자가 드문드문 보였다. 아 귀찮아. 어차피 아침은 혼자 먹을 테니까 대충 때울까...
나는 당근을 서너 개 꺼내 싱크대에서 씻어냈다. 물론 내가 다 먹는 게 아니라 그리고 겉껍질을 벗겨낸 다음, 입에 물었다. 당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입에 퍼졌다. 가끔 이렇게 먹어도 맛있더라.
자주 할 만한 짓은 아니지만.
“주인님...나도 밥!”
“안 줄 건데?”
“치사해!”
에포나가 심통이 났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앞발을 들고 내 다리에 들러붙어 내 손에 들린 당근을 향해 입을 내밀었다. 나는 닿을 듯 말 듯 당근을 에포나의 눈앞에서 흔들다가, 에포나가 정말로 삐지기 전에 입에 당근을 물려주었다.
“맛있어!”
“옛다. 하나 더 먹어.”
“유진아, 나도 햄버거...”
“기다려봐.”
나는 냉동실에서 X벅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타이머를 세팅했다. 나도 그냥 X벅이나 먹을 걸 그랬나. 당근만으로 아침을 때우기엔 좀 심심한 감이 있으니까.
“유진아, 혹시 브릿지 했어?”
“뭐?”
“아니, 그 옆머리가...”
“아 이거...몰라.”
“또 몸에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일단 몸은 멀쩡한 것 같은데.”
딱히 이상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지, 세연이는 내 몸을 쓱 훎어보며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탈모?”
아니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데. 존나 옛날 일 생각나게 하지 마라. 그땐 정말 끔찍했단 말이야. 니 집에 갓 이사 왔을 때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나는 몸을 떨었다. 그건...진짜...아니야...
“이건 그냥 새치야, 새치라고! 세상에 머리가 빨갛게 물드는 새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듀라한이니까 듀라한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건 좀...”
“햄버거 내가 먹어버리기 전에 닥쳐.”
“그치그치! 새치가 참 빨갛네~”
“세상을 살다보니까 이런 일도 다 있네~”
하.하.하...그래서 이 빨간 머리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내 눈에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신 눈에도 떡하니 보이는 걸 보면 내가 환각을 보고있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그냥 새치로 여기기엔 너무 신경쓰이고.
애초에 새치가 빨간색일 리가 없다. 라쿤 박사님한테 연락해서 실험이라도 해봐야 하나? 신경이 쓰여서 미칠 것 같애! 내 반년 동안의 경험상 자고 있을 때 지 멋대로 움직이거나 갑자기 말을 걸어오거나 해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야! 이게 코스믹호러인가? 나는 내 머리카락이 자율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이런 말도 안돼는 경우가 어딨어!
이게 그냥 얌전할 리가 없어! 이건 분명 또 다른 개판의 전조야! 그러니까 어떻게든
“유, 유진아?”
“왜. 부를 거면 그냥 부르지 머리카락은 왜 잡아 당...”
세연이를 쳐다보니 세연이가 떨리는 눈으로 내 머리카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위화감을 느낀 나는 머리카락을 늘려 거실에 있던 손거울을 끌어와 내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어?”
새치가 점점 넒어지고 있었다. 대파 줄기 정도의 양이었던 머리카락이, 이제는 구렛나룻 전부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신님! 도움! 격하게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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