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156화 (156/352)

〈 156화 〉 막간

* * *

“멈춰라! 그대는 어느 신을 섬기는가.”

자신의 목젖 앞에 드리워진 창날에, 포모르는 짐짓 두려워하는 척을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랜 여행으로 헤진 로브를 입고 있는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기에, 경비병들은 포모르를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에뉘알리오스! 저는 아레스님의 신도입니다.”

누가보아도 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믿음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포모르는 속으로 신들을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누가 보아도 광신도로 보이도록 연기했다. 경비병들은 그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포모르는 품에서 조용히 가죽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이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하지만 저 안에서는 아직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보석들이었다. 아무리 신들의 도시인 낙원이라고 한들 그들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필멸자인 법.

어쨌든 먹고 살아야 하는 필멸자들은 결국 재물에 약했다. 수상한 사람을 보듯 그를 쳐다보던 경비병의 눈빛이 금세 호의를 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에뉘알리오스! 아레스님의 신도시군요. 아레스님의 신실한 신도라면 낙원에 들어올 자격이 있습니다.”

경비병이 창날을 거두고 물러나자, 포모르는 짐짓 평화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경비병도 미소로 화답하며, 포모르가 조용히 건넨 주머니를 몰래 챙겨들었다.

“낙원에 온 것을 환영하오! 신실한 자여! 그대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이곳이 낙원인가. 가끔 그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파르사드가 낙원을 가리켜 ‘신들의 취향이 듬뿍 담긴 모형정원’이라며 비꼬던 것을 듣고는 했던 포모르는 그 평가가 들어맞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온갖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건물들, 깨끗하고 화려한 길, 대로를 지나는 고급스러운 마차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인상의 말들. 그리고 길을 지나는 화려한 복장을 입은 수많은 종족들. 황폐하다 못해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돈지랄도 이정도면 예술이군.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낙원 내부의 모습을 보며 포모르는 혀를 찼다. 그는 파르사드에게 구해진 이후로 이렇게 풍요로운 모습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이게 바깥에 살던 종족들의 재물을 빨아먹은 결과인가.

그는 파르사드가 왜 그토록 신을 증오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바깥세상은 강은 말라가고, 땅은 갈라지고, 동물들은 전부 굶어 죽어 뼈밖에 남지 않았는데 낙원은 마치 그가 질나쁜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풍요롭다니.

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곳에서 기회를 엿보아야 하니, 한동안 먹고 살만한 곳이 필요했다. 그는 대로를 따라 걸으며 틈틈이 주변을 살폈다. 행복한 듯 웃으며 걸어 다니는 생명체들. 이따금씩 돌아다니는 신들의 모습.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포모르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도와줄 신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이 망하든 말든 자신들의 낙원만을 지키려고 하는 신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단은 숙소를 찾아야 겠군. 이왕이면 아직 품에 숨겨놓은 보석들을 환전 할 수 있는지도 알아보아야만 했다.

낙원과 판테아 대륙의 화폐는 다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낙원에서는 낙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별도의 화폐가 존재한다고 했으니 우선은 보석을 환전해야 잠 잘곳을 구하든 식사를 하든지 할 수 있었다.

대로를 따라 걷던 그는 건물 사이의 좁은 틈으로 시야를 돌렸다. 보통이라면 어두운 골목길은 피해야 하는 곳이었지만, 낙원에서도 그럴 것인지 포모르는 확신하지 못했다. 단지, 골목길 너머에서 그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기에 쳐다본 것뿐이었다.

“흠.”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무시하고 지나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포모르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오랜 세월 파르사드에게서 무예를 배워 온 만큼 제 몸 하나만큼은 지킬 자신이 있었고, 정보를 구한다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뒷골목 쪽이 더 구하기 쉬울 테니까.

광신자들의 천국인 낙원에서는 오히려 뒷골목 쪽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는 판단도 있었다. 포모르는 발길을 돌려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다.

“오, 눈치가 빠르네. 몇 번 쳐다봤을 뿐인데 바로 눈치 채고 뒷골목으로 들어오다니. 밖에서 한가락 하셧나봐?”

포모르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앳된 목소리의 주인은 그보다 머리 하나 작은, 하프고블린 소녀였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인간 같지 않은 날카로운 송곳니, 밝은 황토색 피부는 판테아 서쪽 지방의 고블린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흔한 특징이었다.

포모르는 이 기묘한 소녀를 보고 의아해 하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나를 쳐다본 이유가 뭐지?”

“불신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법이라고.”

“그거 놀랍군.”

“에이, 너무 딱딱하게 굴지마. 이 가녀린 소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싶은 거야?”

하프고블린, 테테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하프고블린 소녀의 거리낌 없는 행동에 포모르는 잠시 당황했지만, 오랫동안의 방랑으로 다듬어진 포커페이스는 다행히도 멀쩡했다.

“...가녀린 소녀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그거 인종차별 발언이야. 알아?”

“...사과하지.”

“쳇. 재미 없긴. 오랜만에 같은 불신자가 들어와서 재미좀 보나 했더니만.”

테테는 포모르의 재빠른 사과에 김이 팍 식어 근처의 나무 상자 위에 걸터앉아 턱을 괴었다. 그녀의 변덕스러운 행동에 포모르는 곤혹스러웠지만, 그는 부러 티를 내지 않았다. 어쩐지 티를 내면 그걸 빌미로 한참 놀려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안거냐.”

“얼굴 보면 바로 티나 확 나. 신실한 인간은 낙원의 화려함에 홀려서 바보처럼 웃게 된다고. 봐, 대로 지나면서 본 사람들 전부 웃고 있었지? 신실한 신도들은 다 그렇게 되는 거야.”

“끔찍하군...”

“뭐, 내가 안 불렀으면 너도 조만간 저렇게 됐을 걸?”

“고마워 해야 하나?”

“당근이지. 이 몸이 아니었으면 너도 저기서 쓸데없이 화려한 옷 걸치고 하하 호호 웃기만 했을걸? 그 쪽은 잘생겨서 여신들이 꽤 마음에 들어 했을 것 같은데.”

적어도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던 테테의 눈에도, 포모르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여신들이 노리개로 삼고 싶을 정도로. 쓸만한 장난감이 모자라 눈에 불을 켜고 새로운 장난감을 찾는 여신들은 많았으니까.

“결국 겉만 번지르르 한 곳이라 이건가.”

뇌물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는 경비병을 보았을 때부터 짐작하기는 했지만, 속은 이미 곯을 대로 곯아있는 모양이라고 포모르는 생각했다. 어쩌면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길 낙원이라고 지은 신들은 정말 악취미라니까. 지들 마음에 안 들면 죄다 씨를 말려버리는 녀석들을 뭐가 좋다고 섬기는 건지...”

“혹시 보석을 이곳의 화폐로 환전할 만한 곳을 아나?”

“쳇. 무시하는 거야? 뭐 됐고, 밝은 쪽? 어두운 쪽? 밝은 쪽이 더 쳐주기는 할 걸?”

“...어두운 쪽으로 가기로 하지.”

“알았어. 그럼, 출발!”

상자에서 뛰어내린 테테는 당당하게 골목길 사이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포모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테테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