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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155화 (155/352)

〈 155화 〉 138.용서 받지 못한자(6)

* * *

신들 때문이라고?

“그대는, 신이라는 존재가 왜 존재하는지 알고 있는가?”

“...모르는데.”

신이라...

생각해보면, 신이라는 존재가 참 묘했다.

나한테 들러붙은 여신은 모리안이고, 켈트 신화의 여신이었다. 그리고 전에 만났던 바이브 카흐도 켈트 신화 쪽이고. 근데 저승사자는 동양 쪽이잖아? 켈트 신화 신들만 남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다른 신들도 있다는 소린데.

“신이라는 것은 말일세. 본래는 세계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네. 갓 생겨난 세계가 제대로 뿌리내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들은 본래라면 제 역할을 다하는 순간 사라져야만 하네. 지상에 남아있기엔, 신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위해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이 땅에서 뽑아 쓴다네.”

그러니까, 신들은 고성능 저연비 트랙터 같은 건가? 기반을 다지면 쓸모를 다해야 하는 거? 적혈구나 백혈구 같기도 하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고차원 적인 존재는 아닌 모양이었다. 막 전지전능 한 존재는 아니고, 중간 관리자 같은 건가.

윗대가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컨트롤에는 영 재능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보통이라면 신들은 육신을 땅으로 되돌리고 돌아가야만 하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한 그들이라도 인간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뛰어난 존재들이라네...자네라면 그런 힘을 쉽사리 놓을 수 있겠는가?”

[지나치게 개인적인 의견 이느니라.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으니 맹신하지 말거라.]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닌, 어쩐지 다급함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저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란 이야기였다.

“이 세계에서 쫓겨난 신들은 우리 세계에 터전을 잡았네. 어리석게도 우리 세상의 필멸자들은 그들을 환영했지. 그들의 힘은 힘겹게 괴물들의 위협에서 살던 인간들에게 구원 그 자체였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했지.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었네...”

쓸데없이 장황하고 긴데. 그냥 신들이 개판을 쳐서 세상이 망해버렸다는 이야기 아니야? 그래서 결국 그가 원하는 물건은 도대체 뭘까.

“대충 그쪽 사정은 알겠는데, 그래서 그게 뭔데? 가지세계는 이미 멸망이 확정된 세계라고 들었는데, 이미 가망 없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좀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안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 세계에 민폐를 끼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멸망이 확정된 세계에서 발버둥 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결국 큰 흐름을 일개 인간이 뒤집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나?”

[헛소리니라.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설마.]

“신들 중에서는 말일세. 우리가 생각하는 신들의 일 뿐만 아니라 아주 특수한 임무를 띈 신들도 존재하네. 예를 들면, 신들의 육신을 분해해 나온 에너지를 땅에 재분배하는 능력을 가진 신이 말이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그 신은 죽었네. 하지만 그 신의 영혼은 아직 남아있다네...자네 몸속에 말일세.”

“뭐?”

이게 뭔 개소리야? 그런 복선 있었어? 내 몸 속에 뭐? 그런 거 처음 들었는데? 혹시 나도 가슴 사이에서 뭔가 뽑아내는 건 아니지...?

찌찌참마도는 에반데.

[...]

“잘 생각해보게. 왜 하필 그대의 몸에 여신이 깃들었겠는가? 그것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그냥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정말로. 변하기 직전의 운수가 워낙 사나워서 그냥 운수가 너무 사나워서 휘말린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모리안이 육식주의자 여신이 내 몸을 듀라한 미소녀로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내가 선택된 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로다...]

여신님이 너무 말을 안 해준 건 아닐...여신님?

****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도다, 아해야.”

“유진아..? 유진아? 너 누구야! 빨리 유진이를 돌­”

“시끄럽구나.”

여신은 눈에 힘을 담아 세연을 노려보았다. 여신과 눈이 마주친 세연은 점점 의식을 잃고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일개 처녀귀신이 여신의 위압감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같은 목소리였지만, 노인은 금세 화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육체의 진짜 주인이 아닌 그 몸에 깃들은 여신.

“...여신이여. 어차피 제가 그 것을 가져가 우리 세계의 수명을 조금이나마 늘린들, 이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구나. 그대들의 세계는 어떤 짓을 한들 멸망할 운명이니라. 멸망이 예정된 세계에 그 물건을 보낼 수는 없느니라.”

여신의 냉정한 대답에, 노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이렇게 되는가. 그도 여신이 순순히 그것을 건네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들은 언제나 뺏어가는 존재였지, 베푸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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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숨은 어찌되어도 좋으니, 그 물건 만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되느니라. 어떤 멍청이가 적들의 힘을 불려줄 보물을 적에게 넘기겠느냐? 경계를 넘어 이곳에 도달한 것은 가상하나, 이제 퇴장할 시간이니라.”

모리안은 작살을 세워 땅에 떨어트렸다. 동시에 그녀는 오른발을 움직여 창대의 꼬리부분에 발등을 대고 노인을 향해 차 날렸다. 노인은 심장에 작살이 날아온다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이곳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그는 피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그는 몸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을 모아 지팡이에 불어넣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포모르가 훗날을 도모할 수 있도록 포석을 깔아 놓는 것. 어차피 마지막 남은 미련으로 행하는 일. 그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신들을 너무 신뢰했던 나머지, 신들의 꼬임에 넘어가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왕은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끌어와 주문을 완성했다.

그 순간, 작살이 파르사드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지만, 그의 속죄를 위한 최후의 마법은 꿰뚫지 못했다.

“쿨럭...!”

“그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특별히 편하게 보내주겠느니라.”

“여신이...여! 나는! 신...들을! 증오한다! 나는! 비록 이곳에서 죽겠지만! 내 의지만은 남아! 신들을! 저주하리라!”

파르사드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이내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모리안이 그를 완전히 끝장내려고 했지만, 그 것 보다 파르사드의 생에 최후의 마법이 발동하는 것이 빨랐다.

“이런...!”

파르사드의 몸이 마치 기름을 부은 것처럼 격렬하게 불타기 시작했다. 모리안은 주문에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신의 힘으로서는 목숨을 바쳐 이루어낸 마지막 주문을 피할 수 없었다.

“크윽...!”

불길이 그녀를 감싸고, 모리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몸에는 화상은커녕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이건 그녀를 공격하기 위한 저주가 아닌, 봉인에 불과했으니까.

“이런...망할 버러지...가...”

모리안은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진의 몸을 강제로 빼앗은 것부터 무리한 행동이었기에, 다시 유진에게 주도권을 내 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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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일어났어?!”

“손님분? 정신을 차리셧군요?”

“...뭐야...그 할아버지는?”

도대체 뭐야? 나는 어느 샌가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겼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바닥에 누워있고. 그 할아버지가 무슨 짓이라고 한 건...가?

“할아버지요?”

“응. 무슨 지팡이 짚고 있던 할아버지는 못 봤어?”

“모르겠어요.”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옷을 털었다. 안 그래도 하얀 블라우스라 먼지 묻은 게 너무 타나네. 그리고 길바닥에 누워 있어서 그런가, 뒷목이 뻐근했다. 이런 감각 오랜만이야. 듀라한이 되고나서 목 위가 아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 뭔가 뒷목이 따가운데.

나는 손으로 뒷목을 직접 더듬으며 따가운 부위를 확인했다. 매끈한 피부에 뭔가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뭐지?”

여신님? 내 뒷목에 뭐가 새겨졌는데요?

여신님? 왜 대답이 없으시지?

“이상하네...”

여신님한테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분명 노인이 서 있었던 자리였을 곳에 남은 재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재는 뭐야. 누가 불타 죽었...그 노인인가?

그러고 보니까 안개도 걷혔네? 내가 대폭발로 만들어낸 참상의 흔적도 사라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온 것 같았다.

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고 보니 세연이는 어디 갔지? 나는 내 옆에 놓인 작살을 집어 들었다. 웬만하면 세연이가 알아서 수납 했을 텐데, 세연이는 어디 갔지?

“세연아...?”

이상해.

정말 이상했다.

세연이가 나를 두고 어디 갈 리가 없을 텐데.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며 세연이를 찾으려 했다.

“언니? 언니? 왜 그래요?”

“세연이가...안보여.”

“손님? 그게 무슨 뜻이신지...”

“유...진아...”

“깜짝이야!”

“...업어줘...”

“너 왜 그래?”

평소랑은 다르게,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내 다리 사이에서 머리만 내민 세연이가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나는 누가 세연이를 바닥에서 뽑아내곤 세연이의 팔을 내 목에 둘렀다.

자연스럽게 업히는 모양새가 된 세연이는 눈을 감고 내 어깨에 머리를 얹은채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세연이의 몸이 평소보다 흐릿한 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깨어나면 물어볼게 산더미네.

“일단, 저희 가게로 돌아가서 씻으시는 게 어떨까요?”

내가 잠시 숨을 돌리자, 깐프 직원분이 넌지시 권유했다. 거절할 기력이 없었던 나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뒤를 유라와 함께 따라가기 시작했다.

정말, 주옥같은 하루였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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