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136.용서받지 못한 자(4)
* * *
사람이 정말 수 십 미터를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실시간으로 깨닫고 있었다.
“저런 걸 무슨 수로 이겨?!”
“유진아!?”
밸런스패치 발로 하나 진짜! 아무리 그래도 용은 선 넘지! 저런건 최종 보스쯤 되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기껏해야 환상이니라. 침착하게만 한다면]
방금 브레스 못 봤어요? 차가 한방에 터져나가는데! 한번만 맞으면 그대로 저승으로 사출된다는 소리잖아! 난 저승사자랑 불편한 재회를 하고 싶지 않거든요?
[지금 그런 헛소리를 할 시간이 없느니라! 어서 착지해야 하느니라!]
아니 공중에서 어떻게요?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있다고는 하지만 난 없는데요! 뭐 갑자기 각성해서 날개라도 생기는 타이밍이야?
[머리를 쓰거라! 머리를!]
그렇게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셔도...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쓰는게 아니...후, 결과만 좋으면 됐느니라...]
나는 허우적 대던 몸을 필사적으로 웅크리고 번데기마냥 머리카락으로 온 몸을 뒤덮었다. 이래봬도 강도 하나 만큼은 강철로 짜낸 실보다도 튼튼한 머리카락이다. 덕분에 시야가 보이지 않게 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미사일 탄두처럼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추가적인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보호수단이 필요하긴 했다. 온몸을 완전히 감싸다 못해 아예 고치를 만들어 버리니, 귀청을 매섭게 때리던 바람 소리가 잦아 들었다. 대신 묘한 안정감이 내 온 몸을 뒤덮었다.
묘하게 편안한데, 마치 자궁 속에 있는 것 같은....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긴장 풀 시간이 없느니라. 곧 부딪힐 테니 준비]
쾅! 머리카락 너머로 심상치 않은 충격이 느껴졌다. 한 번의 충돌 만으로는 운동에너지를 상쇄 시킬 수는 없었던 건지 충격이 연속해서 머리카락을 타고 몸을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머리카락이 충격의 대부분을 흡수한 건지, 아니면 그냥 충격 자체를 흘려내버린 건지 아픈 곳은 없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주변을 확인했다.
“...이거 이계같은 거라고 했죠? 혹시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죠?”
[그렇느니라.]
다행이네. 잘못하면 라쿤 박사님한테 잔소리를 듣는 수준이 아니라 보상비 폭탄이 터질 뻔했네. 나는 벽이 뚫려 반대쪽이 보이는 집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개 쳐준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고마워 해야 되나?
[상당히 멀어진 것 같느니라.]
그런 것 같긴 한데, 저쪽이 한번 발견한 이상 저 찾아오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느니라. 처음부터 그대를 목적으로 삼은 만큼 어떤 식으로든 그대를 추적하기 위한 마법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느니라.]
환장하겠네. 그럼 저 느릿한 속도로 나를 계속 쫒아올거란 이야기고, 나는 그걸 피해다니면서 마법진을 찾던지 아니면 저 용을 어떻게 처리해야 된다는 소리잖아.
[환상으로 만든 용이니 어딘가에 실체를 유지하는 핵이 존재할 것이느니라. 전통적인 마법 양식을 채용하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 핵이 존재할 것이느니라.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저 용을 따돌리고 마법진을 파괴해서 없애버리거나 핵에 정확히 창을 꽃는 것이느니라.]
어느 쪽이든 불지옥 난이도네. 진짜 이 마법진 만든 새끼 만나면 마운트 자세로 죽빵을 갈겨주마.
저 용을 따돌리고 마법진인가 뭔가 하는 걸 파훼하든, 아니면 저 용새끼를 때려잡아서 안전해지든, 선택지는 두 개 뿐이네. 제3의 선택지 같은건 지금 고려 할 상황이 아니고.
...근데 지옥참마도로 용새끼한테 상처를 낼 수 있나?
[충분히 가능할 것이니라. 그 검은 저승의 금속으로 재련한 무구이니, 영혼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이니라. 어중간한 무기보다도 위협적이니라. 다행히도 저 용은 살아있는 용에 비하면 유아에 불과 하느니라.]
...저게 새끼요? 1톤 트럭을 브레스 한방에 수류탄으로 만들어 버리는 놈이 새끼? 그럼 뭐 진짜 용이 쏘면 그냥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가. 미치겠네 진짜.
“!@*#!^$...”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들리는 울부짖음. 나는 먼지투성이 옷을 털고 일어나 작살을 고쳐잡았다.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생각 없이 움직이다간 체력은 체력대로 소모하고, 해결은커녕 궁지에 몰린 쥐마냥 몰이 당하다 잡아먹히던지, 아니면 듀라한 통구이가 되어버리겠지.
나는 작살의 끝으로 바닥에 X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드러누워도 가려지지 않을 크기로. 실제로 통할지는 모르지만, 길을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골목길에 주차한 차들로 기억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선 같은 차가 나오면 못써먹으니까. 당장 지금 내가 돌아다니면서 본 같은 차면 3대다. 헷갈리는 방법 보단 확실한 방법이 낫지.
“세연아, 너는 뭐 좀 보이는 거 없어?”
“나도 아무것도 안 보여...”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대상으로 설정한 것 같느니라.]
무슨 차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세연이를 불렀다.
“세연아, 저쪽으로 갔다와 봐.”
나는 손으로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야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입장이니까 운신의 폭에 제한이 있지만, 세연이는 귀신이니까 날아다니니 좀 더 시야 확인이 쉽겠지. 그 동안 나는 반대쪽 방향으로 조금씩 걸어가면 되고.
“나, 나 혼자?”
“어차피 죽었는데 걸려도 별 일 없지 않을까?”
“그, 그치만 무서운데...”
세연이도 크고 웅장한 용의 모습에 잔뜩 겁에 질린 듯, 내 소매를 붙잡고 울먹였다. 하긴 나도 용은 좀 무서웠어...문자 그대로 지릴 뻔했다고.
“임무를 완수하고 온 착한 귀신에겐 수제 햄버거 3세트가 기다리고 있습”
“나한테 맡겨줘!”
세연이가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찰하러 간 모양이었다.
도대체 세연이에게 햄버거라는 건 뭘까? 삶의 활력소 수준을 넘어서 거의 종교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인데? 겁에 질려서 벌벌 떨던 애가 수제 햄버거 3세트에 용기 충전 백배하고 달려 나가다니, 혹시 햄버거엔 마약성분이 들어있기라도 한 건가?
귀신한테 통하는 마약이라니 엄청나네.
[참 재밌는 아해로다...]
그럼 이제 나는 반대쪽으로 갈 차례인가.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코너를 돌았다. 아까처럼 몸을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지만 먼지, 가까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좀 몸집 큰 오크나 오우거 같은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용은 너무 허들이 높잖아.
이번이 4번째 코너 인데, 그냥 일직선으로 가는 게 나을까. 쭉 가다보면 언젠가 끝에 도착할 테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고. 골목이란 게 길이 제대로 나있지 않고 중간에 민가로 막혀있는 경우도 많아서 외딴곳에 도착하게 될 수도 있다.
...아닌가?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바닥에 O표시를 새겨 넣고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이대로 가면 지치기만 할 뿐이니라.]
그거야 알고 있지만 다른 방법이 있나? 세연이도 꽤 멀리 까지 갔는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고.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뭐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났어요?
[그렇느니라. 성공한다면 용을 처치할 수 있을 것이느니라. 어쩌면 마법진에 피해를 줄 수도 있을 테고.]
그래서 그 방법이 뭔데요?
[우선...]
나는 여신님의 작전을 듣기 시작했다.
[...어떻느냐? 할 수 있겠느냐?]
어...신박하긴 한데, 그게 정말 되나? 내 근력으로?
[뭣하면 맹약을 하나 더 맺으면 될 일이니라.]
그건 좀...아니 뭐 사람 힘으로도 할 수 있으니까 이 정도 신체능력이라면 충분하겠죠 뭐.
[그래서 해보겠느냐? 하지 않겠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겠느니라.]
까짓거 한번 해 보죠. 솔직히 이렇게 마법진 찾아 돌아다닌다고 해결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니까 차라리 여신님 말대로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럼 일단 괜찮은 위치부터 찾자꾸나.]
넵.
나는 여신님의 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생각보다...잘 도망치는 군.”
안개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진을 이마에 그려 넣은 파르사드는 그토록 염원하던 물건을 가지고 있는 상대를 찾기 위해 골목을 돌아다녔다.
용의 심장을 이용해 상대를 끈임 없이 추적하는 가짜용을 만들어 추척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력도 지맥도 완전히 결이 다른 세상에서 제대로 마법이 성공하기란 힘들었다.
용이라고는 하지만 비행은 꿈도 꿀 수조차 없고, 사족보행 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기어 다니다시피 하는 몰골은 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래도 용의 심장을 베이스로 만든 환영이었기에 막대한 질량에서 오는 물리력과, 원본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81mm박격포 수준의 위력을 가진 브레스는 충분히 강력했다.
문제는 기어 다니는 탓에 속도가 너무나도 느려 터졌다는 점이다. 그래도 탱크만한 크기를 자랑했기에 인간 기준으로 충분히 빠르긴 했지만, 상대를 붙잡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파르사드는 노구를 채찍질하며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야 말았다. 오랜 세월을 전쟁터에서 보낸 파르사드였기에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몸은 무리한 차원 이동과 대규모 마법의 시전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 언제든 쓰러져 죽을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죽으면 이 마법진도 사라진다. 그 전에 파르사드는 그 물건 만이라도 찾아서 자신의 세계로 전송하던, 아니면 마킹이라도 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그런 것이었다.
“포모르여, 너를 위해서라도 꼭 성공하고야 말겠다.”
그렇게 다짐한 순간이었다. 파르사드는 희미한 인기척을 느꼈다. 그가 찾던 상대가 아닌, 또 다른 기척이었다. 그의 시선이 인기척을 따라 돌아갔다. 쇼윈도 너머로 진열되어 있는 여성복들, 그리고 그의 귀에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
그의 마법 안에 또 다른 인물들이 존재하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예상치 못한 실수 였지만, 예상치 못한 기회일 수도 있다고 파르사드는 생각했다.
그는 잠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무시할 것인지,
아니면...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