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135.용서받지 못한자(3)
* * *
“어, 언니가...”
“일단 진정하렴. 우리가 나가면 더 위험해질 뿐이야.”
엘프, 류미나는 유라의 등을 쓸어넘기며 유라를 필사적으로 달랬다. 언니의 행방을 알수 없어 불안한 것은 이해하지만, 지금 뛰쳐나간다면 유진이 그들을 남겨두고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이 허튼 짓이 된다.
상황을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유진이 유라와 자신을 위해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 챘다.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을 보니 분명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모양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나가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사와, 오로지 ‘변이자’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미 아예 종족이 변하는 일을 겪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사고과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온갖 곳에서 구르다가 간신히 정착한 곳에서 이런 기묘한 일을 겪게 되다니, 참 재수도 없지.
미나는 무심코 튀어나올뻔한 욕지거리를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는 숨어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는 게 상책이다. 미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가게 뒤편의 방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자리를 비우고 없는 점장이 낮잠을 자고는 하던 곳이라, 잠시 휴식을 취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자. 기밀관리본부엔...”
미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통화권 이탈이라는 표시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건지.
이제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곳에서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것.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초인이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구조를 기다리는 민간인. 그게 두 사람이 취해야할 포지션이었다.
분명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할 안개는 마치 환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몸을 축축하게 하지 않았다. 보통 안개가 아니구나 이거.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그것도 뭔가 판타지스러운 방법으로 만들어진 안개인 모양이었다.
오로지 시야를 가리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걸까. 아니면 만화나 게임에서 그러는 것처럼 오감을 흐트러트리는 게 목적일까. 어느 쪽이든 좋지 못한 일인 것은 확실했다.
뭐 나는 외출하면 사건이 터지냐. 얼마나 익숙해졌으면 이젠 자연스럽게 무기까지 꺼내서 경계까지 하게 되는 건데. 내 평온했던 일상을 돌려줘...이젠 방송시간이 쉬는 시간으로 느껴질 것 같아...
[넋 놓고 당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느니라.]
아 예...뭐 아는 거 있으시면 좀 알려주시죠. 일단 상황파악이 먼저니까. 그나마 이번에는 아직 다친 사람도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하지 않을까요. 이 안개는 뭔지, 적은 누군지, 뭐 아는 거 있으면 이야기를 좀...
[음...나도 모르겠느니라.]
뭐? 모리에몽! 그게 무슨 소리야!
[모리에몽은 도대체 무슨 뜻이더냐...내가 아는 것은 이게 고대 마법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 뿐이느니라.]
마법? MAGIC? MAGICK? 살다 살다 마법이란 걸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아는 마법은 마법(물리)뿐이라고. 요즘 시대에 마법 소리 하면 비웃음 당할 텐데 참, 이젠 말 할 수 없는 썰만 늘어가는 느낌이야.
좀 상식적으로 그럴 듯해야 방송 중에 할 만한 썰이 생기는 법인데 이런 개 같은 일만 주변에서 일어나니 슬슬 체념해야 하는 걸까. 아주 주옥같은 세상이네. 내가 진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흐음...이 정도 규모로 확산된 것을 보아하니 보통 방법은 아니느니라. 아무래도 이 골목 전체를 안개로 뒤덮어 버린 듯 하느니라...]
안개로 골목 전체를? 규모 참 크네. 이 골목 꽤 넒은 편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골목에 아예 사람이 없지는 않을 텐데...
[이 안개의 역할은 ‘격리’에 가깝느니라. 오로지 그대를 가두기 위한 감옥. 그것이 이 안개의 역할 이느니라. 그러니 아마 그대와 같이 있었던 꼬마와 요정을 제외하곤 사람은 없을 것이느니라...]
뭐? 감금플레이를 위해 안개를 깔았다고? 어떤 놈인지 몰라도 심상치 않은 변태일세. 납치집착감금광공 에반데. 나 하나 잡으려고 이렇게 공을 들이다니, 내가 뭐라고. 뭐 이거 만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제 몸에 뭐 x혼의 구슬 같은 거라도 박혀서 그거 빼먹으러 오는 거랍니까?
[x혼의 구슬이 무엇인지 모르겠느니라...하지만 그대의 몸이 목적인 것은 맞을 것이느니라.]
몸이 목적...?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야한 쪽으로 사고회로가 돌아가는 데...모...읍읍. 어쨌든 이런 헛소리를 계속 할 여유는 없으니, 나는 미로에서 길을 찾는 요령대로 벽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내가 저놈을 먼저 기습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뭐 따돌려야 하는 거야? 일단 이 안개를 어떻게든 없애야 하는 게 중요한 거겠지?
[이정도 규모의 마법을 단신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을 터...이 안개는 강력한 제물을 바쳐 만들어낸 의식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느니라. 이 안개의 중심에서 의식이 이루어졌을 터이니, 우선 그것을 파괴해야 하느니라. 이 마법을 사용한 존재는 우선 미뤄두어도 좋느니라. 어느 쪽이든 그대가 마법진에 도달하면 만나게 될 터이니.]
그래서 마법진이 있는 방향은 어떻게 아는데요? 당장 1미터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뭐 일단 무지성으로 다 돌아다녀봐야 하는 건가? 뭐 괜찮은 방법 없어요?
[흠...아해야, 혹시 그대의 애마를 불러보지 않겠느냐?]
개가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불러요? 뭐 텔레파시로 마음이 통하기라도 하나?
[아해야, 에포나는 그대를 위한 유령마이니라. 그대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면 알아챌 것이느니라.]
어디서 비슷한 소리 들어본 것 같은데. 근데 이거 불러도 되나...? 에포나가 여기까지 달려오면 사람들 눈에 띌 테고, 기밀관리본부에서 그 소식 듣고 뒷목을 잡을 테고, 여기서 살아남아도 라쿤 박사한테 정신적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
아니, 해결책이 자폭버튼이라니 이거 무슨 똥겜이냐고! 그래도 일단 마음속으로 빌어보기는 했다. 에포나야 에포나야, 이 주인이 지금 참 주옥같은 상황에 처했으니 빨리 와서 도와주렴.
“후...내 인생 참 주옥같네...”
한숨을 쉬며 계속해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당연히 유라와 그 깐프가 위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목표니까, 일단 그 가게에서 멀어지면 정체모를 습격자는 그 둘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까. 일단 내 예상은 그랬다. 애초에 싸울 수 없는 사람 둘을 데리고 다니기엔 내가 싸움에 능숙하지도 않고.
내 전투능력은 오로지 맹약에 의해 강해진 신체능력과 지옥참마도 뿐이었다. 싸우는 법을 따로 배운 것도 아니고, 오로지 감에 의존한 전투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누굴 지키면서 싸우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게 하염없이 벽을 짚고 이동하던 중이었다.
스윽스으윽
마치 다리를 질질 끌며 이동하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곧바로 창을 바로 잡고 언제든지 내지를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나는 내가 잡은 자세인데도 위화감을 느꼈다.
나는 이런 걸 배운 적 없었을 텐데...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생물체의 실루엣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상대도 다급한 모양이로다. 그 세상에서 어떻게 저런 것을...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게 뭔데! 혼자만 아는 이야기 좀 그만하고 좀 알려주세요! 그거 직무유기야!
[그대는 용에 대해 알고 있느냐?]
용? DRAGON? 아니 그게 여기서 왜 튀어나온답니까. 아니 갑자기 허들이 너무 올랐잖아요. 아니 뭔 튜토리얼 깨고 초보자 사냥터 왔는데 갑자기 만렙 레이드 보스가 튀어나온거잖아 이건.
지금 나랑 장난해? 장난하냐고! 이런 주옥같은 상황이 어딨어! 내가 뭔 수로 용을 잡는데! 용잡으라 할꺼면 차라리 나한테 그람 같은 거라도 던져주던가!
[정말로 용은 아닐 것이느니라. 이 세계는 일정 이상의 마력을 필요로 하는 생명체는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으니, 마법진을 통해 불러온 실체를 가진 환각일 것이느니라.]
진짜 용이든 그냥 환각이든 좆된 것은 좆된 것이었다. 나는 창을 있는 힘껏 쥐고 골목길에 주차되어 있던 트럭 뒤에 붙어 숨을 죽였다. 실루엣의 크기는 꽤 넒은 골목을 꽉 채울 만큼 거대했으므로, 한 번에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산 넘어 산이네 진짜. 수인도 충분히 끔찍했는데, 이번에는 용이라니, 나 전생에 나라 여럿 말아먹었구나. 내 전생한테 가서 죽빵 날리고 싶다. 마운트 자세로 죽빵을 연타로 갈기고 싶어.
인생 시발.
스윽스으윽
소리는 이제 내 청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채로, 머리카락을 이용해 트럭위로 머리를 들어올려 실루엣을 확인했다.
“어?”
가로등과 맞먹는 높이에서 무언가 시뻘건 광원이 보였다. 광원은 점점 커지며 강렬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가만히 있으면 좆될 것 같다.
나는 사냥감을 만난 토끼마냥 곧바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시발! 브레스는 선 넘었지!”
판타지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끼며, 나는 트럭이 폭발한 여파에 휩쓸려 저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