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134.용서받지 못한자(2)
* * *
“좁고, 복잡하고, 인기척이 없군...”
지직, 지이익
파르사드는 골목 사이사이에 간단한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토끼를 사냥하기 위해, 도망갈 곳을 없애기 위해 치는 덫이었다. 한번 걸리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파르사드는 계속해서 골목길 안으로 나아가다, 중간 지점이라 생각 되는 곳에 멈춰 섰다.
지도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파르사드는 예리한 직감으로 이정도면 맞을 것 같다고 짐작 하면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동차 한 대는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넓이의 마법진이 수많은 도형과 이세계의 글자로 빽빽하게 뒤덮이기 시작했다.
“제물은...이것으로 해야겠군.”
그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그의 머리만한, 종이로 감싼 물건을 꺼냈다. 내용물은 마치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그는 잘못 건드리면 깨지기라도 할 것 같이 섬세한 손길로 물건을 감싼 종이를 하나하나 펼쳐냈다.
종이를 전부 펼쳐내니, 그 안에는 사람 머리만한, 여전히 요동치는 심장이 나타났다. 그가 꽁꽁 숨겨놓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용의 심장.
그는 마법진 가운데에 용의 심장을 내려놓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우후후, 갈아입히는 보람이 있네요~”
“그쵸?”
나 나갈래...옷 갈아입히기 인형은 싫어...나한테 검은색 란제리 같은 거 입히지 말라고...하늘하늘한 옷도 입히지 말라고...세연아 왜 넌 코피를 흘리고 있냐? 엄지 내밀지 마라!
정말 끔찍하게도, 만화에서나 볼법한 상황이 내 몸으로 펼쳐지니 자괴감에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한테 동정을 죽이는 옷 같은 거 입히지 마...여기 코스프레 복장 같은 건 왜 파는 건데? 보통 옷가게에서 그런 걸 취급하나?
내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옷은 여인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수단이니라. 모처럼 이 몸이 손수 만들어낸 천상의 미를 품고 있으니, 꾸며야 하지 않겠느냐?]
“유진씨, 이쪽 보시겠어요?”
“네?”
찰칵. 불길한 소리에 내 고개가 공회전을 하다 머리카락에 의해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지금 무슨 짓을...
“히히, 언니 예쁜 옷 입은 거 한솔이 언니한테도 보여줘야지.”
“전송 멈춰!”
“에이, 좋지 않으세요? 자자, 거울 보시구요.”
내가 유라를 저지하려고 하자, 깐프가 내 어깨를 붙잡고 내 몸을 똑바로 세웠다.
“자자, 거울 보세요. 예쁘죠?”
어...그렇게 말하면 제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뭐한데요. 나는 어쩔 수 없이 한때 유행했던 ‘동정을 죽이는 옷’을 입은 내 모습을 거울을 통해 쳐다보았다.
하얀 블라우스에, 코르셋처럼 허리를 조이는 검정색 치마, 이런걸 뭐라고 했더라. 플레어스커트? 하이웨스트? 예전에 x무위키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잘록한 허리가 강조되고 자연스럽게 가슴이 강조되는 노출이라곤 얼굴 밖에 없지만, 야함은 200% 올라가는 미친 복장이었다.
어중간한 노출보다 이게 야해! 으아악! 평소엔 품이 넒은 티셔츠나 적당히 가디건을 입고 있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내 가슴이 컸다. 잘록한 허리 위로 거대한 질량을 동반한 고깃덩어리가 내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그동안 별 생각 없었는데 이러고 있으니까 수치사 할 것 같아!
“후후, 후후후...”
수상쩍게 웃지 마! 어깨잡고 조금씩 흔들면서 내 가슴 흔들리는 거 구경하지도 마! 이거 성희롱이야!
[좋은 옷이니라. 청초하면서...여성스러움이 강조되는 복장이로다...]
여신님은 뭔데 감상모드시죠? 어?
[그대도 이런 복장을 입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때이니라. 그대는 영원히 여자로 살아가야 할 터이니, 이런 복장에 익숙해져야 하느니라.]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이런 복장은 좀...너무...부끄러운데. 내가 처음부터 여자였으면 몰라, 전직 남자로서 이런 복장은 너무 많이 부담스러운데...요...치마가 너무 거슬려...다리가 너무 허전해... 하얀색 니삭스 말곤 다리를 보호해주는 천이 없는 지라, 굉장히 불안했다.
[그 복장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면 익숙해질 것이니라.]
“자신감을 가지세요!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그런 꽁꽁 감싸는 복장으로 있는 건 좋지 않답니다!”
“그러니까! 그런 얼굴이랑 몸매 가지고 맨날 박스티랑 티셔츠만 입고 다니는 건 기만이야! 차라리 잘 차려입으란 말이야! 무슨 만화주인공도 아니고 복장을 그렇게 입으면서 다닌다고 그 외모가 감춰질 것 같아? 언니는 아까 여기 올 때 시선 집중되는 것도 못 느꼈어?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그걸 몰랐으면 얼마나 둔감한 거야? 언니는 이렇게 착하고 예쁜데! 이렇게 차려입기만 해도 남자들이...”
으아악 투머치 토커 그만해! 내 귀가 썩어서 떨어지겠다! 깐프를 슬쩍 쳐다보니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긴 밑도 끝도 없는 잔소리의 향연이 견디기 쉬운 건 아니지. 오로지 라쿤 박사의 4시간짜리 잔소리를 빙자한 갈굼을 버틴 나에게만 견딜 수 있는 영역이다!
“...나도 언니 꾸미고 다니는 모습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리고 화장도 좀 하고! 아무리 쌩얼로 연예인도 비비지 못할 외모라고 해도 기본적인 화장은 해야지! 얼굴에 선크림 달랑 하나 바르고 다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언니는...”
그러니까 빨리 끝내줘. 나 옷 갈아입고 싶어...
“아무리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후줄근한 복장은 아니라고 생각해! 에포나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니 개는 말이잖아. 말이 패션을 아는 것도 아니고...
유라의 잔소리 폭탄은 10분이 지났음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살짝 비틀거리던 깐프가 제지하고 나서야 유라의 잔소리 폭탄은 끝을 맺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죠...저도 꽤 재미있었구요...유진씨는 평소에 좀 더 옷차림에 신경 쓰셔야 겠어요.”
“아 예...”
그래서 이 옷은 언제 벗을 수 있는 거야. 가슴이 강조된 복장은 너무 부담스럽단 말이야. 심지어 안에 입은 속옷이 검은색 란제리라 더 그래. 이런 옷은 입고 싶지 않았어...이런 복장은 쩡에서나 봤다고! 에바야! 나는 암컷타락따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럼 옷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입고 가시겠어요?”
“네!”
“아니 네가 왜...아니다.”
나 대신 대답한 유라를 보고 한숨을 쉬며, 나는 스마트폰 가죽케이스에 꽃혀있던 카드를 건넸다. 누군 이걸 보고 틀딱 케이스라고 부르지만 이게 얼마나 편한데. 따로 놨다가 잊어버릴 염려도 없고. 어차피 이제 현금은 코인 노래방 정도면 쓰지도 않을 테니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구매하신 옷들은 전부 배달해 드릴게요. 주소도 적어주시겠어요?”
“아 넵.”
깐프가 건넨 메모와 볼펜을 건네받은 나는 주소를 적었다. 오랜만에 쓰는 주소라 좀 헷갈리기는 했지만, 아마 맞을 거다. 전화번호도 적어놨으니 문제 있으면 연락 하겠지 뭐.
“총 합해서 87만 6천원 나왔습니다~”
비싸! 아니 유라가 골라와서 입어본 옷가지가 한두 벌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싸다고 봐야 하나. 잠옷이랑, 외출복이랑, 일상복 등등 10벌 이상에다 속옷도 혹시 몰라서 10세트는 사는 거니까...이정도면 나름 싸게 먹힌 게 아닐까.
뭔가 할인 같은 것도 받은 것 같고. 생각해보니까 내가 첫 정장을 맞추었을 때가 생각나네. 그때도 돈 엄청 깨졌던 것 같은데. 벌써 그게 3년전 일인가...세월 참 빠르네. 그때 남성용 정장을 맞추던 내가 이제 여성복을 입게 될 줄이야.
세상일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근데 진짜 어떻게 돌아가지? 다행이도 쇼핑백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가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지만, 사람들 시선 집중되는건 좀 많이 신경 쓰이는데. 마스크 덕분에 신분 노출 방지는...개뿔, 머리카락이랑 눈동자 때문에 안 봐도 누구인지 다 알겠다.
너무 눈에 띄게 생겨도 문제야 문제. 적당히 검은 머리 였으면 선글라스만 써도 어떻게 될텐데, 할머니도 아니고 너무 하얀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라 눈에 너무 띄어!
“후...이제 장보러 가자. 힘들어 죽겠어...”
“...미안해. 내가 너무 심했지?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시무룩 해지려는 유라의 이마에 살며시 딱밤을 날렸다. 애가 또 이런다. 사춘기라 그런가 기분이 너무 급격하게 천국과 지옥을 오간단 말이야.
“괜찮아. 어차피 옷도 사야했으니까. 저번에 백화점 무너지면서 못 샀잖아. 그거 지금 와서 샀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자, 빨리 가자. 피크타임 되기 전에 장 봐야 하니까...”
“응.”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아, 넵. 수고하세요~”
뭔가 문 바깥이 흐린 느낌인데. 나는 문을 열고 가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
“안개?”
상하좌우 어디를 둘러보아도, 안개로 가득했다. 골목 자체가 안개의 벽에 가로막힌 느낌에 나는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어라 손님? 무슨 일이시...어?”
우리가 문 앞에 멈춰서있자 의아하게 생각했는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깐프직원도 시야를 빼곡하게 채운 안개에 당혹스러운 듯 말이 끊겼다. 진짜 무슨 일이지? 분명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맑고 화창한 날씨였을 텐데?
X일런트 힐이야? 아니면 X크소울?
설마...
[요새 잠잠했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습격인 것 같느니라.]
“점원씨?”
“네?”
“기밀관리본부에 연락해 주시겠어요? 유라도 가게 안에 들어가 있어.”
유라도 대충 상황을 파악한 건지, 군말 없이 다시 점원과 함께 가게로 들어갔다. 일단 이러면 유라는 안전할테니 이 안개를 해결하기만 하면 되겠네.
“세연아.”
“준비됐어...”
“울어라, 지옥참마도!”
“구웨에에엑!”
나는 초록색 점액질로 뒤덮인 내 애병을 휘둘러 점액질을 떼어냈다.
나는 검을 작살로 변화시키고, 짙은 안개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주 희미하게, 맹약으로 인해 독수리 뺨치는 수준으로 강화된 내 시력으로도 겨우 보이는 실루엣이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는 걸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