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140화 (140/352)

〈 140화 〉 막간

* * *

“폐하. 이제 이걸로 재료는 다 모았습니다.”

“수고했다. 포모르.”

“이제 바로 설치할 땅만 찾으면 되겠군요.”

“최고의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으니, 최선의 선택지를 고를 수 밖에 없겠구나.”

파르사드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채로, 그가 말한 최고의 선택지, 낙원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혐오와 원망이 짙게 서려있었다.

죽어가는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풍요로운 땅. 신들이 모여 산다는 낙원은 게이트를 쉽게 작동시킬 수 있을 만큼 많은 마력이 모여 있었지만, 그 신들이 낙원의 마력을 사용하게끔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파르사드는 낙원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 없었다. 혐오스러운 기생충들. 파르사드는 신을 혐오했다. 끈임없이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면서, 제국이 위험에 처하자 그들을 버리고 낙원으로 도망가버린 가증스러운 놈들.

그들이 외면함으로 인해 제국은 마지막 발버둥조차 실패하고 그 대가로 멸망해야만 했다.

그런 신들이 파르사드에게 도움을 줄 리가 없었다. 신들은 아마 더 쉽고 나은 방법을 알고 있겠지만, 신들이 일개 인간에 불과한 자에게 그런 방법을 알려 줄 리도 없으니.

“이번에는 어떡하시겠습니까?”

“흠...이 근처에 아직 살아있는 땅이 있었느냐?”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했던 오크들은...모두 죽어버린 모양이더군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부락마저 전멸한 것 같더군요. 엘프들의 땅은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저희에게 협력하지는 않겠죠.”

“그 콧대 높은 엘프들이 우릴 도와줄 리가 없지. 애초에 그 쪽도 후계자가 죽어버린 바람에 그럴 여력이 없을게다.”

천년단위로 산다는 그들도 멸망을 피해갈 순 없었다. 그나마 그들에겐 수천년동안 엘프들을 보호해준 신목이 있어 그나마 살아갈 순 있었지만...아마 오래 버티지는 못하리라. 파르사드는 장담했다.

이미 도래한 멸망은 신들도 피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오크들의 땅으로 가자꾸나.”

파르사드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디를 가든 마력이 남아 있을 리는 없고,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비인도적인 선택이지만, 파르사드에겐 수단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그럴 여유가 있었다면 진작에 세 번째 게이트를 열었겠지.

“...그 땅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

“시체들이 남아있지 않느냐.”

“...그렇군요.”

포모르는 뭔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입을 닫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을 논하기엔, 이미 그 도덕을 지킬 사람마저 거의 남지 않은 세상이었다. 지금 이 대륙에 살아있는 인간이 천명을 넘어가는 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남은 인류의 대부분은 낙원에 있겠지만, 그들은 인간이라기 보단 신을 숭배하는 도구에 가까웠다.

“그들의 시체에서 마력을 뽑아내면,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게이트를 만들 수 있을게야.”

오크들의 땅은 다행히도 그리 멀지 않았다.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파르사드는 바위에서 일어나 오크들의 터전이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늙고 노쇠한 몸이라 오래 걷는 것은 무리였지만, 30분 정도는 어떻게든 걸을 수 있었다.

“그럼...”

“아니, 내가 가겠다. 자네는 아직 할 일이 많아.”

“폐하! 폐하의 몸은 게이트를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 지셨습니다!”

재료를 모으기 위해 대륙을 돌면서 파르사드의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60줄에 들어선 노인이 대륙을 돌아다니며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근근이 얻은 식량마저도 늙은 몸으로 소화시키기는 힘들었다. 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을 망집만으로 움직이는 노인이었다.

“자네는, 살아야 하네.”

하지만 파르사드의 의지는 완고했다. 그는 포모르가 아직 이 땅에 할 일이 있다고 믿었다. 늙고 노쇠해 이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과 다르게, 두 눈동자에 깃든 총기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반짝이고, 그가 가르친 모든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두뇌는 천재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그를 파르사드는 자신의 망집에 어울리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할 일이 있는 법이니까.

“포모르. 아니, 아들아.”

“폐하...”

“너는 낙원에 가거라. 그리고 때를 기다리거라. 언젠가 너에게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사냥감을 사냥하기 위해 몸을 웅크린 맹수처럼,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려라.”

파르사드와 포모르의 시선이 허공에 맞부딪혔다. 파르사드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포모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10여 년 동안 기른 제자이자 양아들의 얼굴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어린 소년에서 누구나 한번쯤 뒤돌아볼법한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파르사드는 콧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시체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멈춰 섰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살아있는 이 하나 없는 오크 부락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파르사드는 짚고 있던 지팡이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거라.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보여도 왕년엔 내가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던 황제였지 않느냐?”

파르사드는 평소보다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팡이를 든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애써 건강한 척 하는 모습에 포모르는 슬픔을 감출 수 없었지만, 필사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의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포모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조용히 뒤돌아섰다. 파르사드의 고집이 얼마나 완고한지 알 수 있었기에, 그리고 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포모르는 파르사드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꼴사나운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파르사드는 점점 멀어져가는 포모르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다시 마법진을 떨리는 손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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