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125.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6)
* * *
“시슴! 시슴! 태양! 태양! 너 빡숙이라매! 빡숙이라매! 왜 초행인 나보다 니들이 먼저 죽는 건데!”
ㅎㅎ ㅈㅅ ㅋㅋ;;
빡숙:나는 빡세게 숙코하겠다 아 ㅋㅋㅋㅋㅋ
시슴 ㅅㅂ ㅋㅋㅋㅋㅋㅋㅋㅋ
왜 나보다 스펙이 훨씬 높은 놈이 3번이나 죽는 건데...초행인 내가 1페 끝까지 안 죽고 버텼는데! 이런 망할 템렙만 높은 찌끄레기들! 자신만만하게 들어와서 니들이 사망전대가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솔직히 말해봐 니들, 고의로 그러는 거지? 염소언니도 깼다는 놈들이 이곳에서 죽을 리가 없잖아!”
아브 눈나 깻다매! 그럼 이런 염소 새끼는 눈 감고도 깨야지! 이 트롤 새끼들아! 무심코 마우스가 신고버튼에 갔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내가 분위기 곱창내면 나만 손해니까 일단은 참을 수 밖에 없다.
있다가 보자. 니 닉네임이랑 X위치 닉네임 대조해서 똑같으면 그대로 영구밴이야 시발.
아 들킴 ㅋㅋㅋㅋㅋㅋ
저격 맞는 듯 ㅋㅋㅋㅋㅋㅋ
“할 거면 제대로 해! 염소 새끼 잡는 거 쉽다면서 니들이 그러면 내가 얼마나 슬프겠어. 어? 레벨 값을 해!”
어떻게 된게 1페이즈를 2시간이나 꼬라박을 수 있는 건데?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우 요즘 경쟁겜들도 맛탱이들이 가서 암 걸리고 요즘 사람들이 빛강선 빛강선 외치면서 전부다 X스트아크 하기에 나도 그 붐에 좀 편승할려고 싶었더니만, 나도 이제 머기업이라서 그런지 저격을 너무 자주 당하네.
저격러들이 눈치가 좀 있으면 좋으련만, 애초에 눈치가 있는 놈들이 저격을 할 리가 없지. 나는 시슴 앞에서 늘어지는 방송을 보며 마이크를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요즘 기분이 좀 싱숭생숭해서 컨디션이 별론인데 애내들이 꼴받게 만드네.
진정하자 이유진. 이놈들은 내 소중한 돈줄이야. 육수가 줄줄 흐르는 흑우들이라고. 이럴 땐 카리스마 있게 한번...
“시슴! 작은 피자! 피해욧! 색 맞춰서!”
나는 패턴에 맞게 내 색에 맞는 발판으로...아, 죽었다.
???:브레스 피해욧! 구석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죽었죠? 죽었죠? 혼자 죽었죠?
으아아아아악! 나는 몸뚱이를 침대에 집어던지고 지랄발광을 시작했다. 저! 좆같은! 시슴! 새끼! 넌씨눈 저격러 새끼들! 방송 곧 끝날 시간인데 내 방송시간 늘리겠다고 기어코 저 지랄을 하네!
나는 결국 다시 한 번 레이드 실패 화면을 봐야 했다. 좆같은 새끼들...
“후...선생님들. 제가 9시 반에 이 게임을 끌 거거든요? 지금 30분 남았으니까 제대로 합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잘 수 있음?
켠왕 ㄱㄱ
“아니, 좀. 나 내일 중요한 일 있어서 일찍 자야 돼.”
그럼 내일 또 휴방임?
“그렇게 됐어요. 나도 휴방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
제사에요?
설마 데이트임?
“제사는 아니고, 데이트도 아니야. 나 솔로인데 데이트는 개뿔...주변에 여자밖에 없구만. 부모님이랑 하는 거면 모를까. 그냥 서울 시청에 갔다 와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우리 집이 시청이랑 좀 멀어서 오래 걸리거든.”
니들이 4시간 왕복의 귀찮음을 알아? 운전하기 귀찮아서 대중교통 이용하고 다녔는데 이번 일 끝나고 차 사던가 해야지. 교통편이 좋아서 가는 게 어렵진 않지만 버스에서 1시간동안 죽치고 앉아 있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다.
역시 프로 휴방러 듀라;;
ㄹㅇ 한 달에 반만 방송함 ㅋㅋㅋ
“그건 내가 진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원래 쉬는 날에도 방송하잖아. 근데 제가 진짜 재수가 없는 건지 액땜을 하고 있는 건지 온갖 사고에 휘말려서 자꾸 다치고 그러다보니까, 요 몇 달 동안 병원에 몇 번을 입원했는지 모르겠어. 오죽하면 의사선생님이 ‘또 오셧어요?’하고 물어본다니까? 아예 내 전용 개인병실이 생길 지경이라니까?”
또 오셧어요 ㅇㅈㄹ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의사도 존나 신기하겠다 ㅅㅂㅋㅋㅋㅋ
개인병실 뭐임;; 금수저임?
“금수저는 아니고, 이제 우리 X수들 덕분에 먹고 살만큼은 벌지. 그냥 그 병원이 사람이 좀 적어서 그래.”
내가 잠깐 잡담을 나누는 사이, 다시 레이드 트라이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좀 깨자, 제발!
기밀관리 본부의 넒은 테스트실 안에 사람들이 모였다.
나와 라쿤 박사님. 은하와 오크. 4명과 귀신 하나. 인간이 하나 밖에 없는 기묘한 조합이었다.
왜냐고?
그거야, 이제 저 오크남이 자기 세계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자기 동족들을 데려오려면 일단 돌아가야 하니까. 그런데 너무 스무스하게 흘러가는 거 아니야? 내 몇 달간의 인생 역경을 생각하면 이렇게 얌전하게 끝날 리가 없는데.
[얌전하게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더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누가 일이 잘 처리되는 걸 싫어해? 맨날 트러블에 시달려서 PTSD가 도진 것 뿐이니까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흐음...]
여신님은 여전히 내가 저 오크의 부탁을 수락한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저쪽이 침략자에 가까운 입장이니 여신님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겠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비정한 선택을 강요하는 건 선 넘지.
결국 나보고 독박 쓰라는 이야기잖아.
[그럼 그대가 비난 받지 않을 수 있다면, 내 말을 따르겠느냐?]
싫은데요. 난 평화주의자라서 굳이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내가 무슨 피에 굶주린 전투광도 아니고.
[그대가 지금 저 자를 보내면, 이 세계에 크나큰 위험이 닥칠 것인데도 말이더냐?]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 데요? 미래라도 볼 수 있어요? 아니잖아요. 이세계라고 대놓고 차별할 필요가 있냐고요. 이세계의 모든 구성원이 우리의 적은 아닐 텐데. 겨우 100명 남짓하다는 오크들이, 그것도 굶주린 오크들이 이 세상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어떻게 아느냐?]
그렇게 말하면 증거가 없으니 뭐라 반론 할 수는 없지만...피해자의 눈물이 증거입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말거라. 그리고 전에도 언질을 주었듯이, 저 아해가 문제가 아니라 아해가 드나든 길로 들어올 다른 자가 문제니라.]
몰래 오가는 건데 어떻게 알아요?
[신의 힘은 그 무엇보다 독특한 기운을 가지고 있기에 판별하기 쉬운 법이느니라. 특히 신이 직접 사용하는 힘과 달리 신의 신체 일부를 사용해 힘을 빌리는 식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니라. 가지세계의 신들이 낌새를 눈치 챈다면, 벌어진 틈새가 아닌 저 오크가 지나온 길로 아무도 모르게 들어올 수 있느니라. 그렇게 된다면...]
여신님이 말끝을 흐렸다. 가지세계는 멸망이 확정된 세계인만큼, 가지세계의 구성요소가 뿌리세계에 단 하나라도 침투하면 안 된다는 건가. 여신님의 강경한 입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오크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내게 간절하게 부탁하던 오크를 떠올렸다. 얼마나 절박했을까. 그는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말해가며 우리들의 협력을 구했다. 그만큼 종족의 존망이 위태롭다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오크들은...
사실 ‘오크’라는 종족에 대한 선입견과 정체성의 괴리 때문에 쉽게 이 세계에 적응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내 몇 마디로 오크들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한다면, 이왕이면 살리는 쪽이 좋지 않을까.
막말로 그들이 이세계의 스파이나 첨병이라고 해서, 그걸 이 세계에서 막아내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멸망해가는 세계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할까. 신들이 막고 있는 틈새를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고 있는 이유도 결국 세상과 함께 멸망하기 싫어 발버둥 치는 것일 텐데.
결국, 나는 그들을 버린다는 선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쓸데없이 오지랖만 넒다고 욕먹을 수도 있다. 그들이 어떤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지 아직 확신할 수 없기에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 오크의 부탁을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거절해? 심지어 주변은 거절은커녕 내가 받아들이길 원하는데? 비정한 선택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없었고, 선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대는 마음이 너무 약하느니라. 마치...내 동생을 보는 것 같도다.]
...동생이요?
[내 이름은 모리안, 풍요와 권력의 여신. 둘째인 죽음과 전쟁의 여신 바이브 카흐. 그리고 마하...우리 셋을 통틀어 모리안이라 부르기도 하느니라. 넌 막내인 마하를 많이 닮았지. 성격도, 됨됨이도...너무 닮아서 놀랐느니라.]
어...이런 말 하긴 뭐한데, 돈미새에 쓸데없이 오지랖 넒고 변태인 여신이었다는 거죠?
아니, 그렇게 되면 막내동생 닮은 애 몸을 뺏으려다 X탠드가 되어버린거 아니었어요?
여신님 인성의 상태가?
[필요한 일에만 요긴하게 사용하고 돌려줄 생각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제 몸으로 메차쿠차 즐길 거 다 즐긴 다음에 단물 빠지면 버리려고 했단 소리인거죠?
[...그런 부분도 막내를 닮았느니라. 참으로 엉뚱한 아이였지.]
그래서 그 막내 동생 분은 어디 계신가요. 한번 뵙고 싶은데.
[죽었느니라. 아니, 죽지는 않았도다. 살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말이니라.]
말이 애매하지만, 죽었다고 봐도 되는 거겠지. 신이라 죽는다는 개념이 애매해서 저렇게 말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유진아, 유진아?”
“왜?”
“어디 안 좋아? 안색이 나빠보여.”
세연이가 내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귀신인데 그렇게 해서 열을 잴 수 가 있나? 세연이도 그냥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인지, 딱히 열을 체크하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슬슬 준비가 끝나가는 것 같아.”
내가 여신님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략적인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오크는 식량이 가득 들어간 군장가방 크기의 가방을 맨 채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알수 없는 주문 비스 무리한 것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원이로구나.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저것만큼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도 없느니라. 신에게 바치는 진심어린 기원이야 말로 기적을 일으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느니라...그것을 어떤 식으로 이루어 줄지는 신들의 소관이지만 말이니라.]
나는 앞서 이야기한 것에 맞춰, 머리를 들고 피를 살짝 오르쿠스의 눈에 떨어트렸다. 혓바닥에 떨어진 피가 오르쿠스의 눈에 몇 방울 떨어지자, 오르쿠스의 눈이 내 피를 흡수하며 푸르게 발광했다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 간다. 집으로. 돌아온다. 해가 다섯 번 지면.”
“잘! 다녀오게!”
라쿤 박사님은 섭섭한 건지 아니면 흥분한 건지 평소보다도 더 높은 톤으로 오크에게 외쳤다. 오크의 피에 관한 연구가 매우 흡족스러웠기 때문인가. 그들이 돌아오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것 같았다.
오크가 오르쿠스의 눈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자, 앞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에 구멍이 생기는 느낌이라고 할까. 게임에서 나오는 포탈 같은 느낌이기도 했고, 마치 변기 물을 내렸을 때 볼 수 있는 소용돌이 같기도 했다.
시공...시공의 폭풍?
설마 고증이었어?!
“건투를! 비네!”
“고맙다.”
오크가 균열 속으로 들어가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라쿤 박사는 눈물을 흘리며 마치 새로운 발견을 한 과학자마냥 울부짖었다.
“유레카아아! 이건! 세기의! 대발견! 일세! 증명만! 가능하다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겠군!”
...진짜 그러려나.
근데 찝찝한데. 여신님 왜 이렇게 조용하시지.
갑작스레 조용해진 여신님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오크, 굴라쉬는 조심스럽게 차원의 균열 속으로 우직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의 등에 매달린 가방에 꽉꽉 채운 식량이 무거웠지만, 동족을 위해서라면 이정도 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런 희망을 품고, 굴라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차원을 넘나드는 것은 필멸자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본래부터 강인한 육체를 타고난 오크였기에, 오르쿠스의 눈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그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네 노력이 눈물 겹지만 네 여정은 여기서 끝이란다. 아가.”
“!”
그의 눈에, 커다란 날개가 보였다. 마치 까마귀의 날개를 연상 시키는 그 모습은 그의 몸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날개를 훎던 그의 시선에 구릿빛 피부와 금발을 가진 여신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들은 당신들의 적이 아니다.”
“알고 있어. 그래서 너가 더 문제야. 마음 놓고 죽일 수 없는 게 참 골치 아프거든. 언니도 참, 꼭 이런 일은 나를 시키지.”
여신은 명백하게 귀찮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굴라쉬는 유일한 생명줄은 오르쿠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런...젠장...모리안...빌어먹을 여신...}
오르쿠스는 그제서야 모리안이 유진의 피에 무슨 장난질을 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이 많이 약해진 탓에, 모리안이 부린 술수를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었다.
마하 녀석과 닮았길래, 믿었건만, 빌어먹을 년...
오르쿠스의 눈에 깃들었던 오르쿠스의 의지가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르쿠스의 가호를 잃어버린 몸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네 신의 마지막 파편도 힘을 잃었구나.”
“...우리 종족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가! 우리한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내 알바가 아니고. 우린 너희들이 우리 세상에 건너오는 걸 바라지 않거든. 그러니까...”
죽으려무나.
굴라쉬의 몸이 차원의 압력에 의해 산산조각나 뿔뿔이 흩어졌다.
여신, 바이브 카흐는 씁슬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히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