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124.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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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문틀에 가려져서 막연하게 크다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크구나. 농구선수들 뺨치는 거구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방구석 찐따인 나는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는 뎁쇼. 나는 고개를 완전히 들고 나서야 겨우 이름 모를 오크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생긴 거는 전쟁터에서 오래 굴러먹은 베테랑처럼 생겼는데 눈빛은 에포나처럼 순수해 보였다.
그러니까, 험악한 생김새에도 얼굴에 걸맞는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는 거다. 여신님이 말하는 대로 짐승 같지도 않은 게, 오크는 나를 위협하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젠틀하게 내가 앉을 의자를 빼주기도 했다.
...너무 신사적인데?
“나 기다렸다. 소녀.”
“아, 안녕.”
나는 얼떨결에 대답하며 속으로 말을 골랐다. 한번 만나긴 했지만 여전히 초면이나 다름 없는 사이라, 나와 오크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오크였다.
“나 원한다. 동료.”
“동료?”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이 오크는 내가 동료가 되길 간절하게 바라는 모양이었다. 이세계에서 여기까지 와놓고 왜 나를 동료로 삼으려고 하는 걸까. 뭐 내가 거기서 용사라고 신탁이라도 받은 건가?
아니면 뭐, 나한테 나도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이세계에서 나를 스카우트하러 올 거라는 건 어지간한 트러블에 단련된 나라도 알기 힘든 시추에이션이었다.
아니 차라리 기밀관리본부에서 나를 스카우트 하면 ‘올 것이 왔군’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을 텐데, 이세계 오크한테서 너 내 동료가 되라! 소리 들으니까 느낌이 이상하잖아.
안 그래도 눈빛만은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애가 그러니까 진짜 소년만화 같다. 나를 영입하려고 하는 대상이 오크인 게 좀 특이한 부분이지만, 요즘 세상에 바퀴벌레도 주인공을 하는데 오크정도 야...언젠간 오크가 대통령을 하는 세계가 올지도 모른다고.
“어...음...나를 동료로 삼으려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나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도대체 저 쪽 세계에서 나를 어떻게 알고 나를 만나러 넘어오는 건데? 그 부분이 가장 의문이었다. 아니 뭐 내가 진짜 용사 같은 것도 아니고, 내가 저쪽 차원에서 마왕을 때려잡고 온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가 동료가 되었다고 해서 뭐 바뀌는 게 있는 건가. 그 부분도 의문이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방송이랑 요리뿐인데? 뭐 내가 집밥 듀선생이라도 찍어서 이세계에서 요리법 전파라도 하라는 건가?
와! 이세계밥! 이세계에서 뭐 했어요?
음...밥을 해줬어
“동료, 버리지 않는다. 동료.”
해석하면 ‘동료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동료가 되면 동료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인가. 알기 쉽게 말하면 내가 누군가를 구해주길 바라는 모양이다.
“말했다. 신님. 소녀, 하얀 머리, 찾아라. 가지고 있다. 황금색 눈.”
“...정확히 내 특징이기는 하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그 조건 하나가지고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알려줬다. 눈.”
“눈?”
오크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손으로 꼭 쥐고 내 앞에 내밀었다.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펼쳐지자 그 안에 있던 목걸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심플한 가죽끈에 에메랄드 빛 보석이 박힌 물건이었다. 이게...눈? 그냥 보석 같은데.
만져 봐도 되나? 내가 ‘눈’에 시선을 떼고 오크를 올려다보자, 오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들고 그가 말한 눈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눈이니라.]
네? 이거 진짜 눈이에요? 나는 뭔가 비유나 이쁘게 생겨서 눈이라 부르는 건 줄 알았는데 이게 진짜 눈이라고? 저 쪽 세상은 눈이 보석으로 된 사람도 있는 모양이네요? 참 신기한 물건일세. 나는 여신님의 말에 물건을 이리 저리 훎어보았다.
내 눈에는 여전히 눈이 아닌 보석으로 보일 뿐이었다.
[보석이 아니라, 신의 눈이니라. 오크들의 신이 남긴 물건인 듯 하느니라.]
그거 어디서 들으면 논란이 될 것 같은 단어 선정이네 그려. 근데 이걸 나한테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 막말로 내가 막 되먹은 인간이었으면 이걸 가지고 튈 수도 있는데. 물론 내가 그렇게 막 되먹은 사람은 아니지만. 나처럼 준법정신 투철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것이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게 해준 매개체가 틀림없느니라.]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라고 나한테는 그냥 보석에 끈을 매단 물건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가공되지 않아 투박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눈은 그래도 내부에 발광체가 있는 듯 빛이 나고 있었기에 아름답기는 했다.
“말했다. 신님. 찾아라. 황금눈에, 하얀 머리. 머리가 없는.”
{그렇다. 내가 자네를 찾으라 !@*$!@!에게 이야기 했지.}
깜짝이야. 실례지만 당신이 오크들의 신?
{그렇다. 내가 오크들이 섬기던 신...이었지. 다른 신들에게 패해 산산조각 난 후, 나는 내 눈 한쪽에 힘을 보존해 내 아이들을 인도했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어쩌다가 신들끼리 싸워서 죽고 눈에 힘을 봉인해서 오크들을 이끌었다는 거지? 오크에게 진심인 신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반짝이는 신의 눈을 내버려두고, 잠시 오크를 쳐다보았다.
“이야기한다. 신. 우리 땅. 전부 죽었다. 낙원, 거부하다. 필요하다. 새로운 세상. 원한다. 우리.”
“그쪽 세상이 개판이라는 건 들었던 것 같은데...아예 살 곳이 없는 거야?”
“그렇다.”
그래서 이쪽으로 넘어온 건가. 일종의 망명요청이라는 건데, 이건 내가 마음대로 ok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잖아. 내가 높으신 분도 아니고. 나는 뒤에서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은하에게 말을 걸었다.
“망명요청 하는 것 같은데? 종족 단체로?”
“...그렇군요.”
{불쾌한 여신이 생각나는 아이야, 우리 아이들에게 살아남을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니까 좀 불쌍하긴 한데요. 제가 높으신 분도 아니고 그 부분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그런데 뭐? 불쾌한 여신? 그거 혹시 우리 여신님?
여신님 도대체 과거에 무슨 짓을 하셧길래 이런 소리를 들어요? 뭐 통수라도 치셧어요?
[살다보면 악연이 생기기 마련이잖느냐.]
{그대는 그저 의견을 피력해주면 될 뿐이느니라. 부탁이다. 우리 아이들을 살려다오. 이 세계가 받아주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광야에서 모두 굶어죽게 된다. 저 낙원의 신들은 그들을 섬기는 종족이 아니면 전부 내쫒아버리니,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남은 건 그대 뿐이로다.}
도대체 저쪽은 얼마나 개판인거야. 탈레반이 점령한 아프간 같은 상황이라도 되나. 어느 쪽이던 종족 전체가 존망의 위기라니 이렇게 필사적인 것도 이해는 갔다. 나라도 종족 존망이 걸려있으면 필사적이지 않을까.
나는 신님의 간절한 부탁에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내 갬성을 자극하는 단어의 향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게 맞는 말이겠지.
[받아들이지 말거라. 이 세계에 새로운 종족이 나타나면, 혼란은 필연적이니라. 그리고, 이들이 이동한 흔적을 통해 저 쪽의 신들이 이 세계에 침입할 수 있느니라.]
그렇다고 제가 이 상황에서 ‘안받아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로 반대하면 기밀관리본부 직원들의 시선이 폐기물쓰레기를 보는 것처럼 변할 거라고요! 차라리 다른 대책을 강구해 보시는 게?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위해 동정심을 가지는 지 이해할 수 없느니라.]
여신님은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뭐 캥기는게 있는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줄기차게 반대를 하실 이유는 없으니까. 그게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고기로 협박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세계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라.]
퍽이나. 고기 밖에 관심 없으시면서.
“그런데 규모가 얼마나 되요? 천? 만?”
“많이 죽었다. 한때 십만 넘었다. 우리. 백명 남았다. 지금.”
십만? 근데 지금은 백단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뭘 하던 아예 절멸 수준까지 오는 건데?
{신들의 전쟁이란 그런 것이니. 패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법이다.}
신들끼리 배틀로얄이라도 하는 건가...제정신인가? 차라리 듀얼 같은걸로 끝내면 안 돼? 숨막힐 듯 조여오는 필드의 압박만으로도 우열을 가를 수 있는 거 아니냐?
“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일단 뒤쪽 분이랑 해주시고...혹시 하나만 부탁해도 되나요?”
“나 들어준다. 무엇?”
“피 좀 조금만 뽑아갈게요. 우리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까...”
“알았다.”
대충 둘러댔는데도 오크는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야기가 긍정적으로 끝나서 그런가,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4천만원! 4천만원어어어어어어언! 피 내놔!
[너 만한 속물은 내 신생동안 한번도 본적이 없느니라...]
{...나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것인가?}
아니 둘다 왜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돈에 미친 것처럼 보이잖아.
은하눈나는 왜 나를 ‘저 돈미새가 또 돈을 받았나 보군’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거야? 난 경멸당하는 취미는 없어!
이건 인류를 위해서라고! 오크한테 무슨 병균이 있을줄 알고! 어? 이게 다 코로나로 좆된 인류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여기에 새로운 전염병이 추가되면 골치 아프니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안전을 생각하는 게 뭐가 나빠!
[...하는 수 없도다.]
지나치게 흥분했던 나는 여신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어리석도다. 오르쿠스여.”
아름다운 얼굴에, 비웃음이 걸쳐진다.
밤하늘을 바라보던 여신은 초승달을 지켜보며 먼 옛날 가지세계로 쫒아낸 오르쿠스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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