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123.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4)
* * *
“식사입니다. 무엇을 먹는지 몰라서 일단 스테이크로 가져 왔습니다만...”
은하는 굴라쉬 앞에 놓인 식탁에 사람 얼굴 보다 커다란 스테이크가 든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굴라쉬가 워낙 크다보니, 4인용 식탁이 어린이용 1인 식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굴라쉬는 잠시 접시를 쳐다보다가, 은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식에 약을 타진 않았으니 안심하고 드시면 됩니다.”
굴라쉬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손에는 너무 작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포크라면 그도 몇 번 써본 적이 있었으니까 쓰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 한 입에 집어넣었다.
그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머리와 입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은하는 잠시 스테이크를 한입에 넣고 씹고 있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더 드립니까?”
“괜찮다. 나 참을만하다.”
더 먹을 수는 있지만 사양하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 몸집만큼이나 식욕도 왕성한 것 같다...은하는 그 사실을 조용히 머릿속에 저장했다.
“더 드셔도 됩니다.”
“이곳, 먹는가? 이런 음식, 자주?”
“...자주는 아닙니다만, 원한다면 자주 먹을 수 있습니다.”
굴라쉬는 애잔한 눈빛으로 접시를 쳐다보았다. 이곳에 동족들이 정착할 수 있다면 이런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굴라쉬의 마음에 한줄기 빛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반드시 동족들을 이 세계로 이주시키리라. 굴라쉬는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졌다.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더 드립니까?”
굴라쉬는 아주 잠깐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여보세요.”
[자네! 연락을! 왜이리! 안 받나!]
“...으어.”
[벌써! 10시! 라네!]
하암...나는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10시면 꽤 오래자기는 했네...머리카락으로 폰을 잡고 기지개를 한바탕 쭉 켠 나는 라쿤 박사님의 잔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나를 뒤에서 껴안는 세연이의 감촉을 느...딱딱해.
“유진아...?”
[자네는! 왜! 아직도!...]
“...왜?”
“지금 뭔가 실례인 생각하는 거 맞지?”
아, 저.는.그.런.적.없.는.데.요. 나는 세연이의 시선을 피하며 부정했다. 하지만 세연이도 나랑 부대낄 대로 부대낀 몸. 내 행동만 봐도 거짓말을 간파하는 수준에 이른 세연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내 옆구리를 꼬집고는 방 바깥으로 사라졌다.
뭔가 오늘은 햄버거 1+1 이벤트 행사를 할 것 같네. 아무튼 해야 된다. 어느 쪽이든 내가 사러 가야하니 너무 귀찮은데...오늘은 유라한테 카드 맡기고 사오라고 할까. 솔직히 매일 점심 챙겨주는 거 너무 귀찮아. 가끔은 정크 푸드도 먹어줘야 몸에 좋은 법이라고.
그러니까 오늘 아점은 햄버거다. 반론은 받지 않는다. 이 집의 주인은 나야!
[자네! 내! 말! 듣고 있나!]
“네네. 듣고 있어요.”
[그럼! 어서! 기밀관리본부로! 오게!]
“저 방송 있는데...”
오늘 1370찍고 사슴새끼 찍먹하기로 했단 말이야. 기밀관리본부 갔다오면 방송이고 뭐고 로손실온다고...나는 투덜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가볍게 샤워하고 가야지. 아무래도 그 오크 관련해서 부르는 것 같은데. 신고한 당사자인 만큼 내가 가긴 해야겠지. 근데 나를 부를 이유가 있나?
내가 신고해서 데려가기는 했을 텐데, 아직 하루가 더 남아서 좀 여유롭게 고민 좀 하려고 했더니만,..
[자네! 이 일이! 얼마나! 큰! 사안인지! 아는가!]
“아니 알긴 하는데요...굳이 제가 가서 뭘 할 게 있어요?”
[그거야! 이세계에서! 온! 오크가! 자네를 만나려! 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그렇긴 한데요...아직 기한이 하루 남았는데 저도 생각할 시간을...”
[그렇게!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아니, 이게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잖아요? 뜬금없이 우리 편이 되라는데, 박사님 저를 팔아넘기실 생각이에요?”
[크흡! 말을! 왜! 그렇게! 하나! 나는! 그저!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네! 이세계! 교류! 탐험!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박사님 속마음을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하시네. 평소처럼 분노에 찬 흥분이 아닌 호기심과 설렘으로 가득 찬 흥분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좀 그렇기는 한데 저지른 일이 있어서 뭐라고는 못하겠고... 아 몰라. 일단 가고 나서 생각해.
[...]
여신님은 주무시나? 조용하시네. 이때쯤이면 말 거실 타이밍인데.
“주인님...배고파...”
“기다려봐. 금방 줄 테니까.”
나는 내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적대는 에포나를 떼어내곤 미리 씻어놓은 당근을 한 개 꺼내 에포나의 집에 물려주었다.
“유라한테 이야기 해놓을 테니까 오늘은 혼자 집 지키고 있어. 알았지?”
“나도 가면 안 돼?”
“안 돼. 집지키고 있어.”
저번에 기밀관리본부에서 네가 헤으응하고 울어대서 직원들이 나를 미친년 보듯이 봤단 말이야. 트라우마 생길 뻔 했으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주라. 응?
“아라써...”
풀죽은 모습이 좀 불쌍하기는 하지만, 내 사회적 생명이 끝장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세연아, 어딨어?”
“...왜?”
“그만 삐지고 같이 나가자. 나갈 일이 생겼어.”
“방송은? 오늘 방송하는 날이잖아.”
“휴방이지 뭐.”
“저번처럼 휴방공지 이상하게 쓰면 안돼? 그때 시청자들 분위기 엄청 험악했거든?”
누굴 철부지로 보...이번엔 얌전하게 써야지. 나는 대충 폰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아 오늘 방송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일 만나요!’라고 휴방 공지를 작성하고 폰을 식탁위에 올려두었다. 일단 씻고 와야지...
그리고 오늘 점심은 대충 햄버거 집에서 먹고 가야지. 햄버거를 먹는 다는 말에 세연이가 눈을 빛내며 기뻐하는 표정을 짓다가, 부끄러웠는지 살짝 붉은 기가 감도는 얼굴을 숨겼다. 아니 너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도모미나상, 유진 데스.”
“...뭐하십니까?”
“아니, 뭔가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하아. 따라오십시오. 라쿤 박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나를 마중 나온 은하의 뒤를 따라 기밀관리본부에 들어섰다. 여긴 언제나 에어컨이 빵빵 하구만. 사시사철 언제나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야 진짜.
[...가깝느니라.]
당연히 그렇겠죠. 기밀관리본부 안에 있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뭐하다가 이제 나오셧어요?
[...잠시 생각할 것이 있었느니라.]
아 네에... 여신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여신님의 생각을 캐내는 것보다 지금은 일단 그 오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했으므로,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나는 그래도 꽤 여신님과 신뢰가 쌓여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50만원어치 고기를 퍼먹였는데 신뢰가 안 쌓였으면 그건 양심이 없는 거다.
신뢰, 그것은 고기로 쌓는다. 더 많은 고기! 더 많은 신뢰! 고기 사주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나는 잊지 않았어!
[...그대의 아비는 훌륭한 사람이로다.]
누구 아버진데 당연하지. 그러고 보니 못 뵌지 꽤 오래됐네. 명절 때는...못 내려가고, 나중에 시간 내서 고향에 내려갔다 와야지.
“라쿤 박사님. 이유진양을 데려 왔습니다.”
“들어오게!”
라쿤 박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은하는 문을 부드럽게 열었다. 안에는 예상외로 라쿤 박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 오크는요?”
“잠시! 본부를! 구경중이네! 생각보다! 순박한! 친구더군!”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 쩡에 나오는 오크마냥 난폭했으면 밑에 깔려서 응기잇 당했을지도 몰라.
...그건 좀 아닌가?
[...그대, 인간을 포기하지는 말거라.]
그냥 한번 생각 해본거에요 생각만!
“오늘!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아는가!”
“몰라요!”
“오늘! 자네를! 부른! 이유는! 저! 오크와! 대화를! 해주었으면! 하기! 때문일세!”
“그럼 내일 부르셔도 될 걸...”
하루 한번 휴방하면 도네비가 얼마나 빠지는데! 많으면 100만원 가까이 손실이라고!
“이세계! 와의! 첫! 교류! 일세! 자네의! 행동에! 향후!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을지도! 모르네!”
“너무 거창하신 거 아님까.”
고작 한명 넘어왔다고 그렇게 말하셔도...물론 여파는 클 거라는 건 저도 예상하고는 있지만요.
“근데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굳이 저를?”
난 아직 하루는 더 기한이 남아서 느긋하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 오크가! 자네와! 대화를! 원했다네!”
“아니 뭐 그건 원래 그런 거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근데 제가 왜 여기에 와서 대화를 해야 되는 거예요?”
조용히 끝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호들갑 떨면서 해야 할 이유가 있나?
“자네는! 변이자가! 왜! 생기는지! 이세계인과! 뭐가! 다른지! 알고! 싶지! 않나!”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러니! 부탁하네! 우리들이! 부탁해도! 거절하더군! 자네! 부탁이라면! 채혈하는! 것도! 승낙!할걸세!”
생각해보니 이 박사님 변이자 연구에 환장하신 분이었지...언제나 600rpm으로 진동하는 하는 것만 봐서 잊고 있었네.
“그래도 그건 좀...”
“4천! 4천일세!”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인류를 위해서라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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