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122.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3)
* * *
“타십시오.”
“작다. 마차.”
“...확실히 그렇군요.”
은하는 잠시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쉬었다. 예상보다 상대의 몸집이 너무 커서 SUV로도 몸을 구겨 넣어야 간신히 집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재보지는 않았지만, 240cm정도는 되겠다고 은하는 짐작했다. 변이자 오크들과 비교했을 때 미묘하게 작았다. 변이자도 아닌 진짜 오크라, 은하는 자신에게 이 일이 떨어진 것이 골치 아팠다. 변이자 들이 사고치는 거 수습하는 것도 벅찬데, 이번엔 진짜 이세계 오크라.
다행히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오크의 이미지와 다르게 폭력적이지도 않은 것 같아 은하는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변이자 오크들은 죄다 전직이 전직이라선지 난폭했는데...은하는 속으로 자신을 잔뜩 고생시켰던 오크 변이자들을 떠올리며 욕을 삼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새로운 차를 불러오겠습니다.”
“괜찮다. 나, 걷는다 잘.”
...확실히 잘 걸을 것 같기는 하군요. 그가 근육으로 꽉 들어찬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것을 보며 은하는 생각했다. 기밀관리본부까지는 차를 타도 꽤 오랫동안 가야했으므로, 굴라쉬의 말은 기각이었다. 이대로 굴라쉬를 대중에게 더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변이자조차도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금, 이세계인의 존재가 대중에게 드러나는 건 썩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할 테니까.
그렇기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칼퇴근도 못하고 꼼짝없이 긴급출동을 하게 된 은하였다. 기밀관리본부 최악의 요주인물인 이유진이 기밀관리본부에 전화를 한 시점에서 직원들 전부가 오늘 집에 가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직감했음에도 희망회로를 불태웠지만, 유진은 희망은 어디까지나 희망임을 다시 한번 증명시켰다.
도대체 이유진 그 인간은 왜 자꾸 트러블에 휘말리는가. 이 일을 한지 몇 년이나 된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은하조차도 가끔 그 쓸데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이제 감탄이 아니라 짜증이 치솟을 정도였다. 본인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따지고 보면 피해자였지만, 어쨌든 직원들에게는 야근의 주범이니 좋게 볼래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이곳, 탁하다. 바람이.”
“도시라 그렇습니다. 시골로 내려가면 고향과 비슷한 분위기 일지도 모르겠군요...”
“아니다. 살던 바닥, 비슷하다.”
환경이 비슷하단 이야긴가...은하는 머릿속에 그 정보를 기억해두었다. 이세계의 존재 자체는 기밀관리본부에서도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세계인과 접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정부에서도 이 만남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이세계와의 첫 교류였으니까. 이 교류의 결과가 향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그런 교류의 첫 단추를 대한민국이 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이득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군요. 고향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고...향...춥다. 뜨겁다. 메말랐다.”
굴라쉬는 그녀의 질문에 순순히 답했다. 싸울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는 이쪽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야 할 입장이었다. 밉보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그는 그가 대답 가능한 범주 내에서 솔직하게 답변해 줄 생각이었다.
“황폐한 곳이었나 보군요...”
“그렇다.”
손에 들린 휴대폰의 진동에 은하는 잠시 점멸하는 화면을 쳐다보았다. 메시지였다.
‘15분 뒤에 도착예정.’
길다면 길고 짦다면 짦은 시간이었다.
은하는 그동안 이 초록색 방문자와 잡담을 가장한 심문을 더 할 생각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야근을 빨리 끝내는 지름길이었으니까.
인적 없는 길가에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모두 듀~바~”
ㄷㅂ
내일 봐요~
에휴. 피곤해죽겠네. 나는 빗으로 오늘도 열심히 움직인 머리카락을 빗으며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저녁 시간에 찾아온 오크 때문이었다.
이름은 뭔지 모르겠고. 키는 더럽게 크던데. 농구선수 뺨치더라. 뭔가 제안을 하러 온 것 같았는데 뭐였...더라? 뭔가 해적왕 지망생 같은 대사였는데.
[...너를 영입하려고 하였지 않았느냐.]
아, 그랬지...어떡하죠? 상대는 평화적으로 나오는 것 같은데...뭐 승낙하면 이세계라도 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호기심이 생기긴 하는데...방송해야 되니까 못 가지. 요즘 너무 많이 쉬어서 거의 한달 스케쥴 체크하니까 휴방 반 방송 반이드만. 더 이상 휴방하면 방송 자체에 악영향이 올 것 같았다.
방송으로 10년 넘게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순 없지. 건물주가 되는 그 순간까지 구독자가 줄어드는 꼴은 절대 못봐! 나도 10년 무사고 스트리머 해서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거야 빼애액!
[...죽여야 하느니라.]
엥? 왜요? 굳이 평화롭게 대화 하려는 녀석한테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요? 차라리 우리편으로 만드는게 좋지 않나?
[오크란 족속은 본디 포악 하느니라. 요구를 거절하면 너를 힘으로 끌고가려 할 것이니라.]
그렇게는 안보...였다고 하기엔 마주친 시간이 채 10분도 안됐으니, 단언할 수 없는 문제기는 했다. 이 여신님은 뭐가 문제라고 그리 과격하실까. 그 오크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할지는 좀 더 대화를 해보고 나서 결정하면 될 문제인데. 여신님이 당최 이렇게 과격한 발언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대화라...그대는 짐승과 대화가 될 것이라 생각하느냐?]
에포나랑 대화 잘만 하는데? 가끔씩 대답을 ‘헤으응~’이나 ‘응기잇!’으로 해서 그렇지. 저거 가르친 놈 만나면 듀라한 대가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알게 해주마.
[무릇 짐승이란 아무리 교육받았다 해도 본능을 억제할 수 없는 존재니라. 그런 존재가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이 세계의 존재는 우리 세계에 있어서 해악밖에 끼치지 않는 존재이니라.]
말넘심...그래도 지성이 있는데 꼭 그래야 되요?
[개인간도 지성이 있는 존재였느니라.]
가불기 멈춰!
그래도 개인간은 확실히 악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수백명이나 죽인 놈들인데 비교대상이 되나? 저 쪽은 비교적 온건하게 대화를 시도하려 하기도 했고, 뉴스나 X튜브도 조용한 걸 보면 사고 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당장은 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라. 그대가 거절한다면 그대를 어떻게든 끌고갈 것이니라.]
묘하게 확신에 찬 말이었다. 무언가 말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있다. 나는 그것을 직감 했다. 하지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추궁하지 않았다. 언젠가 알려주겠지. 나는 여신님을 믿었다.
[그리고...저 자가 넘어온 틈을 막아야 하느니라. 되도록 이면 빠르게, 저 오크가 넘어가기 전에 말이다.]
다른 자들이 넘어올 수 있을 테니까?
[그렇느니라. 만약 틈새너머의 신들이 그 틈을 먼저 발견한다면...]
가지세계...에도 신이 있어? 생각해보면 분가 같은 거니까 신이 존재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네. 평행우주 비슷한 개념 이랬으니까...그곳엔 또 다른 여신님이 있는 게 아닐까? 여신님이 1+1?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도다. 이 몸은 오직 하나 뿐이니라.]
미안요. 대신에 내일 점심은 고기 한번 노릇노릇하게 불판에 구워먹는 걸로 용서해주세요.
[흠흠, 충성스러운 신자에게 화를 낼 정도로 속 좁은 여신은 아니느니라...]
아 옙. 더 이상 말하면 진짜 화낼 것 같으니 참아야지. 나는 깔끔하게 빗은 머리를 품에 안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씻고 양치 좀 하고 자야지. 그러고 보니 내가 칫솔을 새로 사놨던가?
이빨이 너무 튼튼한 탓에 칫솔이 일주일이면 마모돼서 슬슬 새 칫솔로 갈아야 할 때인데. 이럴 땐 은근히 불편하다니까. 내 이빨이 숫돌도 아니고 이빨에 닿으면 뭐든 갈려나가니 원.
[이 몸에 그런 번거로운 행위는 의미가 없느니라.]
그냥 기분 내는 거죠. 저도 백날 천날 이 안 닦고 피를 뿜어내도 입에서 냄새는 커녕 이빨도 멀쩡할거라는거 다 압니다. 그래도 찜찜하니까 닦는 거지.
“주인님! 나도 치카치카!”
“오냐.”
나는 어린이용 딸기맛 치약을 에포나용 칫솔에 바르고는 에포나의 이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애도 유령마라서 이런 게 딱히 필요한건 아닌데 어른이 하는 건 뭐든 따라하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하고 싶어 하기에 해주는 거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가 살다살다 망아지 이를 닦아주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먹으면 안 된다?”
“아라라라써!”
“자 따라해봐. 어푸, 어푸”
내가 에포나의 입안에 물을 넣어주며 입안을 헹구다 뱉는 시늉을 하자 에포나는 그걸 똑같이 따라하며 변기에 입안을 헹군 물을 뱉어냈다. 나는 변깃물을 내리며 에포나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옳지. 잘했어.”
“헤으응!”
“그럴 땐 헤으응이 아니라...후.”
벌써 100번은 말한 것 같은데. 저 아무리 봐도 동인지에서 나올법한 이상한 의성어 좀 쓰지 말라고! 도대체 저거 가르친 놈은 무슨 생각으로 가르친거야!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구나.]
응? 방금 뭐라고 하셧어요?
[아무것도 아니느니라.]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찝찝하기는 했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혼잣말 할 수도 있는거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칫솔질을 끝내고 얼굴을 씻었다. 사실상 물로 헹군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 사기적인 머리는 그것만으로도 수백만원을 들여 피부를 관리하는 연예인들이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뽀송뽀송한 상태를 유지했다.
노폐물이 나오지 않는 얼굴이라니, 여자들이 알면 질투하겠고만.
에포나와 함께 화장실을 나와 침대로 향한다. 적당히 정리해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어떻게...
에포나, 내 가슴은 네 베개가 아니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