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121.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2)
* * *
“저 사람 봐봐! 엄청 커...”
“2미터는 그냥 넘을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굴라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막 도시에 상경한 촌놈마냥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굴라쉬는 이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유리창 너머의 식탁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풍요롭군. 굴라쉬는 턱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는 모습, 국물보다 건더기가 많아 보일 정도로 풍성한 내용물, 화목하게 웃으며 식사를 하는 모습.
적어도 그가 태어난 후 거의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1년에 한번 있는 의미 없는 감사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을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굴라쉬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그의 얼굴은 깊게 눌러쓴 후드에 가려져 있었기에 사람들에게는 희미하게 웃는 입가와 커다란 송곳니만 보였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지만. 굴라쉬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기운이 다해 더 이상 작물을 키우지 못하는 죽어버린 땅,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해 씨가 말라버린 동물들. 전쟁도, 전염병도, 재해도 아닌 굶주림에 죽어가는 동족들.
그의 눈에 굶주리는 동족의 눈빛이 아른거렸다. 그가 어깨에 짊어진 짐은 오크라는 종족의 미래와 희망이었다. 그가 실패하면 더 이상 오크라는 종족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굴라쉬였기에, 그의 눈에는 한 점의 미혹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일이 잘 풀린다면, 오크들은 더 이상 굶주림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그들을 구원할 열쇠를 가진 자와의 협상에 성공하면, 그들은 죽어가는 땅을 떠나 이 풍요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신들과 백성들이 모여 있다는 낙원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죽어가는 땅에서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착지라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품고 있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없어 굶어죽어야만 하는 척박한 땅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최소한 이곳은 먹을 것이 넘쳐보였으니까. 그가 발길조차 들이지 못한 낙원의 모습이 이러할까.
“저, 저기요...”
“무슨 일인가?”
“다른 분들이 무서워 하니 물러나 주시는 게...”
식당 주인이 떨리는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무서웠지만, 어쨌든 자기도 먹고 살려면 손님들이 들어와야 할 것 아닌가. 경찰에 신고할까 했지만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기에, 식당주인은 큰마음 먹고 그에게 말을 거는 쪽을 택한 것이다.
“미안하다.”
굴라쉬는 식당 주인의 말에 순순히 물러났다. 그는 이 땅에 분란을 일으키러 온 것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그러고도 남았겠지만, 그는 지금 중대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만큼, 욕망에 휘둘려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불화가 종족의 명운을 가를 수 있었으니까. 타고는 전사이자 약탈자인 그들은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마냥, 욕망을 절제하는 수도사마냥 금욕적으로 살아야 했다.
굶주림이란 용맹함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굴라쉬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여전히 그를 따라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 세상의 문물에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말 대신 말 없는 마차가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처음 보는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며, 저마다 작고 네모난 막대기를 쳐다보며 움직이는 모습은 그가 살던 세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살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가 있던 곳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당장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해결하기 힘든 곳에서 온 굴라쉬였으니까.
사람들의 얼굴에선 피곤함이 엿보였지만, 동시에 그가 살던 곳에선 느껴보지 못한 활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얼굴에 이상한 천쪼가리마스크의 존재를 그는 몰랏다를 걸치고 있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는 하염없이 걸었다. 그가 말한 기한은 해가 두 번 졌을 때, 즉 이틀 후였다. 그렇게 어려운 고민은 아닐 테니, 그는 이틀 후 까지 그동안 묵을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돈은 없지만, 그가 족장에게 받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멩이만한 금덩어리 정도면 이틀 정도 묵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필사적으로 배운 반쪽짜리 번역마법으로는 도저히 ‘여관’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었다. PC방...? 노래...방? 편...의점?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어의 향연이 펼쳐질 뿐이다.
번역마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나라는 언어를 두 개 이상 섞어 쓰는 것 같다고 굴라쉬는 판단했다. 번역마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경우는 언어가 두 개 이상 섞여 있거나, 번역 마법이 통하지 않는 죽어버린 언어일 경우뿐이었으니까.
나름 오크 중에선 매우 똑똑한 축에 속하는 굴라쉬였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계속해서 길을 걸으며 잘 곳을 찾던 굴라쉬는 이대로는 여관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딜 가도 여관은커녕 잠자는 곳 비스무리한 장소가 전혀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에는 여관이 없는가? 어떻게 여관이 없을 수 있지? 이 세계는 여행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이 도시를 나가야만 여관을 찾을 수 있는 건가? 이곳의 길을 모르니 멀리 나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 터인데...
굴라쉬의 머릿속에 수많은 가능성이 떠오르고 가라앉길 반복했다. 결국 그가 낸 결론은,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만 아닌가. 그가 붙잡은 사람은 폰을 만지작거리며 걷던 젊은 여성이었다.
폰에 정신이 팔린 채로 걸어가던 여성은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머리를 감쌀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거대한 녹색 손에 질겁하다가,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패닉에 빠져버렸다. 얼굴을 가린 후드 사이로 보이는 각진 하관과 튀어나온 송곳니는 일반인에게는 지나치게 위압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었다.
당장 그가 살던 세계에서도 오크는 다른 종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최근에 들어선 몰락한 종족이라며 비웃음을 사기는 했지만.
“자네, 혹시 여관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 않겠는가?”
“아, 아...”
그는 자기 딴에 최대한 점잖은 단어를 골라가며 말하긴 했지만 ‘힘세고 좋은 저녁, 나 찾는다 여관’으로 번역되리라는 것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기괴한 단어 사용법에 몇몇 사람들이 작게 웃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대부분의 경우 오히려 그 괴상한 문장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난감하군. 굴라쉬는 난감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이곳에서도 오크의 험악한 외모를 무서워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아무래도 오크들이 인간 기준으론 맹수나 다름없는 외모를 하고 있기는 해서, 말을 걸면 사람들이 겁을 많이 먹고는 했다.
그래도 원래 세상에선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는데, 이곳 인간들은 겁이 많은가 보군...아니, 그냥 이 여성이 겁이 많을 뿐인가?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굴라쉬는 생각했다.
“미안하네.”
다른 일에 정신이 과하게 팔려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굴라쉬는 어깨에서 손을 떼며,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고, 그 일대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굴라쉬에게 꽃혔다.
“나는 그저 길을 물어보려 했을 뿐이다.”
이번에도 ‘나 묻는다 길. 시도했다.’라고 들렸음을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괴상해지자, 그는 다시 한 번 여성에게 사과하며 일단 이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난감해하던 그의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성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자, 순식간에 굴라쉬에게 가는 길이 생겨났다. 마치 모세의 기적 같은 모습이었지만, 굴라쉬 입장에선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오크는 어디서나 인간의 적이니까.
“...국정원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오시죠.”
경계심이 가득 섞인 목소리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성은 따라오라 말하곤 다시 인파들 사이를 가로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굴라쉬는 곤란한 듯 턱을 긁적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뭐였지?”
“국정원 요원이 왜 저 사람을 데려가는 거야?”
“저렇게 큰 사람이 있다고? 농구 선수보다 더 큰 거 같은데?”
요원과 오크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거인과 국정원 요원의 조합은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렇게 순식간에 SNS를 타고 정체불명의 거인과 국정원 요원에 대한 이야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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