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132화 (132/352)

〈 132화 〉 119.거부 할 수 없는 제안(2)

* * *

“그야...유진씨가 우리가 잡은 마지막 기회니까요.”

무슨 의미야? 마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무슨 이유로 적합자인가 뭔가 여서 그렇다는 거야? 아니 인구가 70억인데? 그 정도면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을 선별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까놓고 말해서 내가 뭐 잘난 부분이 있었냐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초중고 다니고, 4년제 적당한데 다니고, 중소기업 다녔던 평범한 사회인이었는데?

인재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차라리 세계경찰 미쿡 대통령을...아 지금 호호 할아버지였지? 70대 용사 조...어...뭔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그런 웹툰이 있었던 것 같은데...

[...]

“아니, 나 지금 이해가 안 되는데...나 말고 할 사람이 없어?”

“당신이 아는 신들은 얼마나 되나요?”

내가 아는 신? 하나님이랑 그리스 신들이랑 북유럽 신들이랑 켈트 신 조금, 그리고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내가 그 쪽 전공도 아니여서...

“수많은 신들이 우리처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가르는 장벽에 생긴 틈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스케일이 점점 커지네. 하긴 동양풍 저승사자도 있는데 다른 신화권 신들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근데 왜 하필 켈트 신화일까. 사실 신화로서는 정말 마이너 중에 마이너잖아.

차라리 아즈텍 신화가 더 유명하단 이야기도 나오던데. 그쪽 이미지가 살벌한건 둘째 치고...

“그리고 다른 신들도 저희와 같은 방법을 시도했죠. 하지만 다 실패했어요.”

“왜?”

말마따나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당장 특수부대원이나 격투기 선수 정도만 되도 나보다 더 낫지 않나? 여전히 왜 나인지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인생 좀 편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왜 이 시대에 신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실패한 이유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않은 채, 마리아가 나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 시대에 신이 없는 이유? 음...이 세상에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아니, 생각해보면 종교인이 인류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니겠네.

“음...나는 다 죽거나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보통 신화의 마지막은 신들의 죽음이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난 그런 건 줄 알았지. 켈트 신화야 딱히 멸망했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니까...기독교에 흡수되기는 했지만. 마치 뭔가 숨겨진 이유 같은 게 있다는 뉘앙스라, 나는 마리아의 대답을 재촉했다.

“저희는 물러난 거랍니다. 인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왜? 계속 통치하면 좋은 거 아니야?”

적어도 흔히 말하는 ㅈ간들이 활개 치는 세상보단 나았을 것 같은데. 아, 그건 아닌가? 생각해보니 제정신이 아닌 신들이 꽤 많았지. 그리스 쪽 신들이랑 북유럽 쪽 신들이 인성 터진 걸로 유명하잖아.

모 영화에도 나오는 로키는 TS와 수...여기까지. 이 이상 넘어가면 수위가 너무 높아! 19금 딱지 붙는다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기반을 다지는 역할이었으니까요. 언젠가는 떠나야 했어요. 우리 가지세계는 신들이 미쳐 날뛴 끝에 멸망의 길을 걸었거든요. 우리는 그런 과오를 보고 인간의 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죠.”

“...스케일이 점점 커지네. 가지세계는 무슨 말이야?”

“평행우주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있지. 그거야 꽤 유명하니까...”

미국 만화에서 줄기차게 나오잖아. 요즘은 하도 많이 나와서 평행우주이야기만 나오면 까기 바쁘다던데. 그런데 이젠 평행우주까지 나오는 거야? 나 차원이동까지 하는 건 아니지? 조금만 있으면 회빙환 다 튀어나올 것 같은데.

“옆 세계는, 인류가 말하는 평행우주와 비슷한 개념이에요. 이 세계가 멸망에 이를 선택을 하고 나면 그 순간 생겨나는 세계랍니다. 멸망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서요. 분리된 세계는 확실하게 멸망의 길을 걷죠. 지금 이 세계는 유일하게 멸망이 확정되지 않은, 그리고 가지세계의 근본이 되는 뿌리세계에요.”

대충 천년만년 번영하는 세계라 이 말이네. 점점 어려워...내 멍청한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점점 벅찬데. 스케일이 지나치게 커져서 머리가 이해하길 거부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가지 세계니 뿌리세계니 별로 알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저 이 세계가 우리가 지켜야할 세계라는 것만 기억하면 되느니라.]

“일종의 폭탄 돌리기 같은 거에요. 뿌리세계가 살아님기 위해서 가지세계를 만들고 폭탄을 떠넘기는 거죠. 가지세계는 대부분 멸망헀죠. 한 세계를 빼면요.”

“알겠다. 그 살아남은 세계가 게이트를 만들어서 넘어오려고 했던 놈들이지?”

“네. 맞아요.”

마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결국 가지세계도 이 세계의 일부였으니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신들의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건가...”

“...저쪽의 목적은 아마, 가지치기 당한 자신들의 세계를 다시 이 세계에 이어 붙이려는 거에요.”

“그 과정에서, 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난 거고?”

“...그래요.”

“근데 여기...그러니까 뿌리세계? 랑 가지세계가 이어지면, 이쪽도 멸망엔딩 이라는 거 아냐?”

“네. 그래서 저희들은 가지세계가 뿌리세계에 다시 붙지 못하도록 계속 감시하고 있었죠. 저희도 이 세계의 일원으로서 멸망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정리하면, 이 세계는 평행세계들의 뿌리가 되는 세계고, 다른 평행세계가 살아남으려고 이 세계에 아득바득 들러붙는다고 이해하면 되는 건가?

[맞느니라. 저들도 동정 받을 여지는 있다만...우리도 살아남기 위해선 막아야 하느니라. 합쳐지는 순간 이 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확실해질 것이니.]

그럼 게이트 타고 저 세계 내부인원들만 이주 시키는 건 안 되나? 굳이 싸울 필요 없이 평화적으로 끝낼 수 있는 거 아니야?

[가지세계는 단순히 갈라지는 수준을 넘어서 문명 수준이나 기반이 되는 시스템 자체도 다른 곳들이 존재하느니라. 특히 우리가 막고 있는 세계는 과학 대신 마법이 발전한 곳이니라...]

마법이 진짜 있...겠지? 애초에 이런 혼파망인 세상에 마법이 없을 리가. 그냥 일반인들이 모르게 쓰고 있는 거겠지.

[당장 그대들은 같은 세계의 인간끼리도 편을 갈라서 싸우고, 미워하고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긴...한데. 하긴 지금 지구촌 꼬라지를 보면 이세계인을 환영해줄 리가 없지. 어디 조용히 끌려가서 노예나 되지 않으면 다행인데. 여신님의 말을 부정할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 확실히 수백 년 전에나 통용될 것 같은 법을 율법이랍시고 들이대는 미친놈들이 나라를 점령하는 세상인데 퍽이나 이세계인들을 환영해주겠다 싶다.

게다가 저번에 만난 개인간을 생각하면, 이세계인들이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저놈들보다 더한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단 소리니까. 말마따나 저 쪽 세계에 마왕이 있고 마왕이 넘어온다면, 이쪽 세계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대충 왜 싸우는 지는 이해했어.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어. 왜 나야? 그리고 내 전임자들은 왜 실패한 건데?”

“첫번째는 너무 용맹해서 앞서 싸우다 죽었고, 두 번째는 너무 정이 많아서 그들 또한 생명이라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다 그들에게 살해당했죠. 세 번째는 너무 탐욕스러워서 감언이설에 넘어가 배신했어요. 결국 넘어가자마자 살해당했지요.”

“내가 네 번째...근데 내가 안 그럴 거란 보장이 없잖아.”

“당신은 지나치게 용맹하지도 않고, 과하게 자비로워 사리 분간을 못하지도 않고, 적당히 탐욕스러워서 쉽게 넘어가지도 않죠. 당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아요.”

아니, 존나 많지 않나?

일반인이라면 다 그런 거 아니야? 적당히 탐욕스럽고, 용맹은...모르겠고. 적당히 베풀 줄 알고. 그렇게 드문 인물상은 아닌 것 같은데.

“저희는 더 이상 적합한 사람을 선별할 시간이 없어요. 물밑에서 수백 년 이어진 전쟁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어요. 저희가 인간들에게 간섭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는 데다 지금은 여력이 거의 남아있질 않아서...부탁드립니다.”

마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중력에 의해 뒷목을 덮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말 내가 이런 일에 끼어들어도 되는 걸까? 그리고 저 말이 진실일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지나치게 무거운 이야기에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해야, 네가 거절한다 해도 우리는 원망할 생각은 없느니라.]

그렇게 말해도, 시간이 없다면서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내면 그만이니라.]

내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승낙하게 하기 위한 교활한 계략인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긴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머릿속에서 계속 긍정과 부정을 반복하다가, 대답을 정했다.

“...저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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