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131화 (131/352)

〈 131화 〉 118.거부할 수 없는 제안(1)

* * *

“주인님 어디가?”

“편집자 만나러. 금방 들어올테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알았어! 올 때 당근!”

“집에 넘치는 게 당근이거든?”

내가 너 때문에 녹즙 마니아 이미지가 생겨버렸다고! 난 녹즙 싫어! 싫다고! 너도 학창시절에 아침 대용이라면서 녹즙을 몇 년동안 마시면 당근 혐오자가 될 거야! 내가 그때이후로 녹즙은 절대 안마시지.

나는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역시 외출복은 가벼워야지. 너무 꾸며봐야 번거롭기만 할 뿐이다. 애초에 중요한 회사 미팅자리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편집자와 만나는 것뿐인데 그렇게 진중한 분위기를 낼 필요도 없고, 데이트 가는 것 같은 분위기를 낼 필요도 없다.

“그럼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나는 빌라를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맨날 저렇게 쳐다보니까 이제는 적응이 되어버린 탓이다.

그래도 이젠 사생활 침해로 고소하겠다는 엄포를 놓은 덕에 망할 X튜브 렉카들도 거의 안 들러붙게 돼 버렸고, 이 주변 주민들도 그런 수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는지 경찰에 신고를 해서 결과적으로 귀찮은 시선이 많이 줄어들었다.

역시 일주일 동안 런한게 맞았어. 시청자들이 미친 듯이 도네로 날 혼내주기는 했지만 어쨌든...

약속 장소는 저번에 만났던 그 카페였다. 어디서 만날까 물어보니까 그 카페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더라. 마음에 들었나? 버스 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시선이 느껴졌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이라기 보단 호기심에 쳐다보는 느낌?

시선의 근원지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내 바로 옆에 앉은 여성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바부?”

손을 흔들어주자 웃으면서 좋아하는 게 참 귀엽네. 나는 내 쪽으로 손을 뻗는 아기의 손에 내 검지를 올려주자, 아기가 내 손가락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어우, 애기 손이라 그런지 엄청 부드럽네.

그 모습을 아주머니가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았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애기가 내 손가락으로 재밌게 놀고 있으니 좀만 더 놀아주자...

“아우!”

요녀석. 나는 계속해서 아기와 놀아주다가, 안내방송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내릴 시간이었다.

“학생이 마음씨가 착하네...고마워요.”

“아...네.”

굳이 내가 28살 군필여고생이라는 것을 밝힐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는 멋쩍게 웃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내 얼굴이 확실히 어려보이긴 한데 학생취급 받는 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나는 정류장에서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간대가 애매한 탓인지 카페 내부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카페 내부를 쭉 훑어보다, 익숙한 금발머리와 뒷목으로 보이는 잘 태운 피부를 보곤 그쪽으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마리아였다.

...저런 비주얼을 가진 사람이 둘이나 있을 수는 없지.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인가...?”

실제로 얼굴을 맞댄 지는 꽤 지났지만, 매번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이걸 오랜만이라고 해야 되나? 방송관련으로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으니 퍽 친해진 마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대부분 업무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가벼운 안부인사나 잡담도 꽤 했으니 친해진 거 맞지 않을까?

“저번에 만났을 때랑 느낌이 다르네요...기운이 많이 달라지셨어요.”

시작부터 수상쩍은 발언이라니, 너도 뭔가 나한테 트러블을 가져올 생각이지? 에포나처럼!

“기운이라니...”

“맹약을 맺었네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애초에 그쪽 사람...? 어쩌면 여신일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관계자인건 짐작하고 있었으니 맹약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렇다 쳐도, 내가 여신님과 맹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맹약을 맺은 사람은 티가 나는 법이에요. 신의 힘은 강렬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알아볼 수밖에 없거든요...”

의미심장한 시선을 나에게 보내며 마리아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굉장히 수상쩍은 분위기에 나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왠지 잡아먹힐 것 같은 분위기인데. 전이랑 분위기랑 성격도 다른 것 같고.

소심한 성격의 마리아와 지금의 마리아 중에 어느 쪽이 진짜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일단 방송관련이 아닌, 나와 비밀스러운 대화를 하기 위해 왔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 나를 부른 이유가 뭐야?”

[...여전히 음침하도다. 동생이여.]

뭐? 동생? 이 금태양이 여신님이라는 거야? 나는 여신님의 말에 놀라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마리아는 평소와는 다르게 고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묘하게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달 까, 수상쩍은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풍겼다.

“유진씨도 알건 아는 것 같으니,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게요.”

“아, 네. 그러니까, 여신님?”

“언니가 말해주었나 봐요? 그냥 마리아라고 불러요. 전 유진씨와 친해지고 싶거든요.”

그렇게 분홍색 기류를 흘리는 건 좀...저는 여자가 좋...아니 이러니까 내가 무슨 크싸레 같잖아. 이게 아닌데. 어쨌든 나는 저런 닭살 돋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슬쩍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를 하고 싶거든요. 유진씨도 저번 사건으로 아셨을 거에요. 이 세상이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아주 위태롭다는 걸.”

그 게이트 관련인가. 확실히 그런 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 평화로운 일상이 그저 폭풍전야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알겠더라. 근데 그게 왜...? 설마 애도 나한테 일시키고 그런 건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뻔뻔한 저승사자들이랑 달라요. 오로지 유진씨를 위해서 이야기 하는 거랍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데?”

쓸데없이 감질나게 하는 게 사람 애간장 태워 먹는 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유진씨가 저희의 희망이 되어달라는 거에요.”

희망? 무슨 메시아라도 되라는 건가. 에반데. 나는 그냥 건물주가 꿈인 스트리머일 뿐인데 이런 쓸데없이 중2병틱한 이야기에 끌어들이지 마라! 나는 트러블 없이 평화롭게 수금방송이나 하면서 살고 싶다고!

왜 내 주변은 맨날 이렇게 트러블만 몰고 오는 녀석들로 가득 찬 거야! 좀 얌전하고 착하고 민폐 끼치지 않는 사람은 없냐고!

“전 그렇게 오글거리는 명칭을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병이 있어서...”

“농담도 참. 그냥 이 세상을 위해 싸워달라는 의미에요.”

그러니까 내가 왜 X터맨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거냐고? 그건 저기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같은 사람한테 가서 말해! 나는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유진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희에겐 시간이 없어요. 저쪽 세계에서는 이쪽으로 건너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어요. 만약에 저 쪽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데 성공하면...인류는, 이 세계는 끝장이에요.”

“스케일이 너무 큰데...?”

스케일이 지나치게 크니까 전혀 현실감이 없다. 세계멸망? 조금만 있으면 마왕이 이 세계를 침략해서 인류가 멸망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네.

“그러니까 국가 수뇌부들이 민간에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거랍니다. 충분히 혼란스러운 세상에, 한층 더 혼란을 가져다 줄 뿐이니까요.

그 말은 기밀관리본부도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일까? 나중에 라쿤박사님한테 물어봐야겠는데. 이런 이야기엔 교차검증이 꼭 필요한 법이니까.

“근데 그걸 왜 나한테?”

“그거야, 언니가 선택한 사람이니까요? 실제로도 유진씨는 정말 일을 잘 해결해 주셨잖아요? 호환의 일도, 게이트에 대한 일도요.”

...솔직히 반은 숟가락만 얹은 느낌인데?

호환은 애초에 트럭으로 갖다 박고 시작했고, 게이트 건은 맹약 빨이었고. 내 힘으로 온전히 어루어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난 평범한 사람인걸. 이런 스케일 큰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엮인 이상,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 하다는 것도 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세상은 변하고 있고, 나는 그 변화의 한 복판에 서 있으니까. 틈새가 뭔지는 모르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만은 안다.

“그 변화하는 세상에 유진씨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에요. 왜 유진씨가 여성이 되었고 듀라한이 되었는지도 이젠 알잖아요?”

여신님이 내 몸 뻇으려다 역관광 당한 거?

[잠깐 빌리는 것 뿐이었느니라!]

그게 그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나한테 뭐가 떨어지는데?”

“부? 명예? 사랑? 유진씨가 원하는 모든 것이요.”

동생 아니랄까봐 언니랑 하는 말이 소름끼치게 똑같네.

도대체 나한테 왜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꿀 좀 빨면서 살겠다는 게 그렇게 아니꼬와? 막 배알이 꼴리고 그래?

“그러니까...저희가 틈새를 닫는데 협력해 주세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신들이 나서는데도 그런 문제가 생기는데, 일개 인간인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나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야. 영웅도 아니고.”

나는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도 아니고. 내가 메시아도 아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왜 나한테 무언가를 바라는 걸까. 말마따나 정의감 있고 용맹한 사람을 뽑아다 부려먹으면 그만 이었을 텐데.

아주 잠깐의 침묵이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마리아는 그 고혹적인 분홍빛 입술을 조심스럽게 뗏다.

“그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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