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116.화려한 휴가(4)
* * *
“괜찮아?”
“아, 아니...신경 쓰여서 잠을 못 잤어.”
복도는 조용했다. 들리는 것은 거세게 몰아치는 비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 뿐.
바로 근처에 목 잘린 시체가 있다고 생각하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소리 하나하나가 신경쓰이고, 눈을 감으면 침대 위에 머리가 잘린 채로 올려져 있던 모습이 떠올라 송다정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송다정이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표정으로 졸기 시작하자, 하성진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서로의 거리가 0이 되었지만 송다정은 너무 졸린 탓에 별 반응이 없었다. 하성진은 그 상태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좀 자.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
무슨 일이야 있겠어? 하성진은 별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살인 사건에 휘말린 건 처음이지만 높은 확률로 범인일 금발의 여성은 그들 다음 차례였고, 앞서 불침번을 했던 사람들의 말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이대로 분위기를 잡고 불침번이 끝나면...하성진은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옆방에 시체가 있는 건 그에게도 소름끼치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바캉스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릴 순 없었다. 정말 힘들게 낸 휴가인데, 이렇게 뒤숭숭하게 마무리하면 기분이 나쁘다.
어차피 피해자라고 해봐야 타인일 뿐이었다. 원한에 의한 살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그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못하리라고 하성진은 확신했다. 그 여자가 범인이라면, 2대 1인 우리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하성진은 그렇게 판단했다.
애초에 그렇게 힘이 쎄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강할 수도 있었지만 하성진은 그런 가능성은 머리에 새겨두지도 않았다. 여자가 힘이 세봐야 얼마나 세겠어. 머리를 자른 것도 도구 같은걸 사용한 거겠지.
조용한 분위기에 하성진은 졸음을 참으며, 그의 기억에 박제된 머리를 떠올렸다.
다정이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로. 여신이 정말 실존한다면 그런 외모를 가지지 않았을까. 하성진은 그 평온한 얼굴을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작게 실눈을 뜨고 있었던 것 같기도...쿵!
“뭐, 뭐야?!”
하성진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다 그의 품에 안긴 연인을 생각하고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디서 들린 소리야? 한밤중에 복도를 울린 묵직한 소리는 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거칠게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하성진은 조용히 송다정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다정아, 다정아.”
“음...왜?”
“지금 뭐 떨어지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
“...잘 모르겠어. 하암...”
“잠깐 확인해 보고 올 테니까 기다려 볼래?”
“아냐, 같이 가자...”
다정은 성진의 팔에 팔짱을 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성진은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숨기며 조용히 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걸었다.
“여긴...”
딱 한번 낫던 소리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 했지만, 성진은 이곳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팔에 밀착된 온기로 인해 조금이나마 희석되었던 두려움이 다시 조금씩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스윽스윽끼이익
꿀꺽.
성진과 다정은 자기도 모르게 꿀꺽 삼키며 긴장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아주 희미하지만, 두 사람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무언가 스치는 소리였다. 창문을 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마, 말해야하지 않을까?”
“그, 그래...지배인 아저씨를 불러보자...”
성진과 다정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한 채...
강제 단식을 하게 된지 무려 하루가 지났다.
배고파, 배고프다고! 휴가 와서 이게 무슨 꼴이야! 진짜 그냥 당당하게 나갈까? 그냥 우기면 어떻게든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냥 ‘사람이 머리 떼놓고 살 수도 있지 웬 호들갑이세요? 하고 우기면 ’아 그럴 수도 있지 ㄹㅇ ㅋㅋ‘하고 넘어가주지 않을까?
...배고프니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하게 되는 구나. 군대 동계훈련 때 이후로 이렇게 오래 굶은 건 또 처음인데. 나뿐만 아니라 여신님도 밥이 먹고 싶다고 아우성을 쳐대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아니 이 여신님은 전쟁의 신이 아니고 걸신 아니야? 환장하겠네.
[무례 하느니라!]
아 좀. 그러니까 배고프다고 그만 좀 칭얼대봐요. 그렇다고 내가 듀라한이라는걸 커밍아웃 할 수는 없잖아.
아니면 그냥 말하고 협박이라도 해서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기밀관리본부에서 적당히 입막음 하는걸 도와주면 의외로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말해도 상식 외의 사태라 우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단체로 집단 환각 증세에 걸린 것도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모형 가져와서 장난치려다가 걸렸다고 하면...모형이 없잖아.
몰래 밤에 나가서 편의점 갔다 올까. 5km면 이 개쩌는 신체능력으로 15분 안에 왕복할 자신이 있다. 지금 나는 시속 60km로 달리는 유사 말딸인 것이다. 조만간 우마뾰이 댄스라도 추겠네.
[그대는 참으로 사건에 자주 휘말리느니라.]
혹시 듀라한으로 바꾸면서 제 행운 스탯 나락으로 박은 거 아니죠? 어째 제가 요즘 전혀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거든요? 여신님이시면 제 행운 스탯 좀 올려주실 수 있잖아요?
[금전운은 좋지 않더냐?]
듣고 보니 그러네. 최근에 1억 넘게 벌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거랑 별개로 트러블이 더 자주 생기는 것 같지만. 이쯤 되면 나도 주인공체질을 가진 게 아닐까. 세상에 반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수십 개의 트러블을 겪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조금만 있으면 용사로 소환되어서 이세계 모험물 찍고 있는 거 아니냐? 이젠 갑자기 용사소환을 당하던, 외국인 여자애가 찾아와 약혼녀라고 우기든 이 세상이 사실 가상공간이고 내가 사실 통속의 뇌라는 진실이 밝혀지든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질 일은 없느니라.]
아 예...근데 진짜 배고픈데 이대로 굶어야 하나? 일단 기밀관리본부에서 사람이 오면 먹을 것 좀 달라고 해야 되나? 언제오지?
나는 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반. 이렇게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치는 날씨에 바로 올 수가 있을까. 겸사겸사 알림 탭을 확인해보니 한솔이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걱정 되서 잠을 못 잔 건지. 한솔이의 메시지를 보낸 시각은 10분전이었다. 내가 걱정이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유라랑 에포나는 자고 있나? 하긴 시간이 시간이니까 자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야 괜찮은데, 배고파.]
[베란다로 나와 봐요. 베란다로 나와서 먹을 거 넘겨줄 테니까.]
[ㅇㅋㅇㅋ]
먹을 거다! 나는 주린 배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베란다 문을 열고 나와 옆방을 쳐다보았다. 내 양옆으로 한솔이와 유라와 에포나가 있는 방이, 반대쪽에는 나를 발견한 커플의 방이 있었다. 나는 한솔이가 있는 방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유진씨, 괜찮아요?”
나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려 한솔이가 넘겨준 봉투를 받아들었다. 단팥빵이랑 우유였다. 뭔가 짬내 나는 메뉴인데.
“아까 낮에 편의점에서 사왔어요. 냉동식품은 돌릴 수가 없으니까...일단 이거라도 드세요. 오늘 아침에 은하 씨가 온다니까 일단 그걸로 버텨요.”
“생각보다 빨리 오네.”
“그거야, 들키면 골치 아프니까요.”
하긴, 목격자가 7명이나 되면 그걸 수습하긴 힘들겠지. 나는 단팥빵을 먹어치우며 생각했다. 근데 이제 이거 어떻게 수습하려는 거야? ‘짜잔! 사실 이유진양은 살아있었답니다!’할 수도 없고 ‘그래, 내가 듀라한이다’라고 할 수도 없잖아.
난 인간관악기가 되고 싶지 않은걸. 그렇게 잠시 긴장이 풀렸을 때였다. 문 쪽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맹약을 맺은 이후로 신체능력이 지나치게 강해진 내 몸은 그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 잠깐 시발. 나 어떡하지? 이거 창문 닫아도 돼? 나는 재빠르게 바깥 베란다 창문을 대충 밀고 재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내가 제자리를 찾는 것보다 문이 열리는 게 더 빠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머리는 핏자국위에 놓긴 했지만...
“...창문이 열려 있군요.”
지배인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아니 뭔데? 혹시 베란다 열리는 소리를 들은 건가? 다행히도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건지 손전등을 내 얼굴에 비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 얼굴에 비췄으면 눈이 너무 부셔서 눈가를 찌푸렸을 거야.
“...사람들을 전부 모아주십시오.”
지배인 아저씨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폼 그만 잡고 좀 나가주면 안될까? 나 빵좀 마저 먹게 해줘! 나도 밥 좀 먹고 살자!
“그럼 다시 나가도록 하죠.”
지배인 아저씨와 망할 커플 둘은 방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그럼 이제 남은 빵을 먹어 보실까...
끼익
“무슨 소리가...?!?!?!?!?!”
[너무 경솔하게 움직였느니라.]
아, 좆됐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내 몸을 비추는 불빛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 트러블은 이제부터 시작인 모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