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EX.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다
* * *
“...실패했나.”
“한 번에 성공할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거구의 노인은 가슴께까지 닿는 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탄식했다. 부서진 건물들이 가득한 폐허 한가운데 있는 부서진 석상더미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은 초라해보였다. 하지만 그를 알았던 사람이라면 그를 얕잡아 볼 수 없으리라.
한때 판테아 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제국의 황제, 파르사드.
비록 망국의 왕이 되었지만 그 이름만큼은 대륙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어느 날 미쳐버려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사라진 미치광이 왕.
“폐하.”
“백성 없는 황제가 폐하라 불릴 자격은 없다네.”
망국의 황제가 폐하라는 소리를 들을 자격은 없네. 스스로 백성을 져버린 자가 폐하라는 말을 듣는 다면 모두가 비웃지 않겠나. 죽어버린 백성들이 비참하게 널브러진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스스로 백성을 모두 죽여 버린 망국의 황제, 파르사드는 자조했다.
“제게 폐하는 여전히 폐하십니다.”
“맹랑한 녀석.”
거구의 노인은 강렬한 의지를 담아 자신을 쳐다보는 청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망국의 황제인 그에게 유일한 백성. 그가 유일하게 구할 수 있었던 소년이 장성하여 그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럼 황제로서 그대에게 명하노니, 살고 싶은 대로 살 거라. 늙은이의 망집에 어울릴 필요는 없다. 해가 뜨고 달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정해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건 어리석은 나 하나로 족하단다.”
“또 그 소리시군요.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어릴 적 폐하께서 해주셨던 용사의 이야기처럼, 세상을 구하는 것. 제가 하고 싶기 때문에 폐하를 돕는 것입니다.”
“고얀 녀석. 폐하라고 꼬박 꼬박 부르면서 정작 명령은 듣지 않는구먼. 에잉. 허수아비 황제가 어떤 기분인지 알겠구나.”
파르사드는 청년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넘기며, 청년과 눈을 마주쳤다.
청년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파르사드는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맑고 올곧은 눈. 그가 유일하게 구한 소년은 나라가 멀쩡했다면 후계자로 삼고 싶었을 정도로 총명했다.
멀쩡한 세상에 태어났으면 용사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청년이, 파르사드는 안타까웠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것도, 자신을 폐하라 부르며 끝까지 함께하려는 것도.
그는 시선을 내려 흙바닥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실험은 실패였다.
첫 실험으로 코볼트를 세뇌해 그 세계로 보내고 게이트를 만드려 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게이트가 완성되기 직전에 박살난 것을 보면 누군가 게이트를 박살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작동되려 하던 게이트가 갑작스레 빛을 잃고 작동을 멈춘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또 다시 게이트를 만들려면 한 달은 걸릴 테니, 돌아다니며 다시 재료를 구해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라고 예상했던 만큼, 파르사드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과거 문헌에 존재했던, 이제는 그 존재조차 아는 자가 드문 이세계가 실존 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허황된 계획이 드디어 실체를 가지고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생명체라고는 한줌밖에 없는 세상을 구한다는 계획이.
“다시 재료를 모으려면 대륙을 한 바퀴 돌아야 갰구먼...”
“어디까지고 보필하겠습니다.”
“입 발린 말은 잘하는 구나.”
“이게 다 폐하가 가르치신 겁니다.”
능청스러운 대답에 파르사드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제는 바쁘게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청년, 포모르는 그의 뒤에 따라붙어 폐허가 된 마을을 떠나갔다.
폐허가 된 마을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적막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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