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SIDE.한솔
* * *
SIDE:김한솔
“도대체 무슨...”
정신을 차린 김한솔은 어둠속을 응시했다. 조금 눈에 힘을 주고 집중하자, 조금씩 어둠 속에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흡혈귀라서 다행이야. 김한솔은 진심으로 자신이 흡혈귀인 것에 감사했다. 흡혈귀 특유의 강력한 신체능력이 아니었다면 절대 저 붕괴의 현장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다행히도 그녀는 1층 입구 근처에 있었기에, 곧 구조될 입장이었다.
유진씨랑 유라는 괜찮을까...?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 대한 걱정이 들었지만, 김한솔은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도리어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침착한 자신에게 의아해 할 뿐. 위화감에 한솔은 눈가를 찡그렸다.
곧 이어 사방에서 몰려오는 피 냄새에 김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최근에 유진에게서 피를 많이 얻어 마시면서 흡혈욕구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살려주세요!”
목소리? 김한솔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흡혈귀 특유의 어둠을 꿰뚫어 보이는 시야에 희미한 인형이 잡혔다.
김한솔은 잠시 머뭇거리다, 인영이 보이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녀가 있는 틈새는 아주 좁아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이곳저곳에 긁혀 다칠 수도 있었다. 한솔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이동하다,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해 사이에 틈이 있었지만 그녀의 풍만한 몸은 그 틈새를 지나갈 수 없었다.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지나지 못하는 틈새였기에, 한솔은 조심스럽게 틈새에 얼굴을 갖다 대고 안쪽을 살폈다.
“제...발! 살려...주세요!”
진한 피냄새와 함께, 울부짖는 듯 한 목소리가 잔해 속에서 울려 퍼졌다. 한솔은 잠시 숨을 크게 삼켰다가, 다시 틈새 너머를 천천히 살폈다. 잔해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여기 좀 꺼내주세요! 잔해 사이에 끼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쪽으로 갈 수가 없어요!”
목소리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이 틈새를 지날 방법이 없었기에, 한솔은 점점 줄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구조대가 도착할 테니 조금만 버텨주세요! 제가 구조대원들한테 구조를 요청할게요!”
한솔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켜고 소방서를 향해 전화를 걸었다.
[여기는 OO소방서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OO백화점인데 백화점이 무너져서 갇혔어요! 구해주세요!”
[OO백화점 말입니까! 현재 저희 구조대원들이 OO백화점에서 구조작업을 진행 중이니 구조를 위해 자세한 상황을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레 무너져버린 백화점 때문에 서울 곳곳에서 파견된 구조대원들이 구조에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도대체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 건지, 생존자가 존재 하기는 하는 건지, 하나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구조대원들은 어떻게든 잔해를 치우고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솔의 전화는 백화점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걸려온 전화였다. 한솔은 입으로 숨을 크게 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곤, 애써 침착하며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백화점이 진동하더니, 천장이 무너져서 1층 정문으로 뛰, 뛰었는데, 입구가 무너져서 갇혔어요! 여기 저랑 한분이 아직 살아계세요!]
[다른 생존자 분들은 없습니까?]
“모르겠어요! 일단 제 주변에서 찾은 부, 분이 한분 있는데 잔해가 길을 막고 있어서 목소리만 들려요!”
[잔해를 치우는데 못해도 세 시간 이상 걸릴 수 있습니다. 혹시 휴대폰의 배터리가 어떻게 되십니까!]
한솔은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화면 상단의 배터리 바를 쳐다보았다.
50%.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애매한 양이었다.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한솔은 서둘러 배터리 소모를 줄이기 위해 절전모드와 각종 어플을 전부 꺼버렸다.
“반 정도 남았어요! 최대한 배터리 소모를 줄일게요!”
[알겠습니다! 1층 정문 쪽에 있다는 생존자의 연락이 왔습니다! 그 쪽을 우선으로 치우도록 이야기 해주십쇼!]
“저는 어떡하면 되나요!”
[가능하다면 추가 붕괴의 위험이 있으니 최대한 안전해 보이는 곳에서 쉬고 계시고, 30분 주기로 다른 생존자는 있는지, 상황은 어떻게 되는지 X톡으로 보내주십시오!]
최대한 배터리를 아끼기 위한 판단이었다. 전화를 계속 하는 것은 생각이상으로 배터리를 많이 잡아먹는 행동이었기에, 최대한 배터리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다시 어둠속에 홀로 남겨지게 된 한솔은, 다시 목소리가 들린 틈새로 다가가 힘껏 외쳤다.
“저기요! 구조대원들이 곧 구하러 온대요! 힘내세요! 저기요?”
한솔은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머릿속에서 그 광경을 지워냈다. 그냥 지쳐서 기절한 걸 거야. 부질없는 희망이었지만, 한솔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 살려달라고 외치던 상대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끔찍했으니까. 한솔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붉게 빛나는 두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얼굴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유진씨...유라야...”
차라리 나중에 갈걸...둘의 생사를 알 길이 없으니 한솔의 마음속에서 후회와 죄책감이 고개를 슬금슬금 기어 나와 그녀의 마음속을 조금씩 물들였다.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나 때문에...내가 오늘 백화점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오늘 유라에게 유진을 데리고 쇼핑을 하러가자는 깜짝 계획을 실행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한솔은 강렬한 죄책감을 느끼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였다.
“...세요!”
“거기 누구 계세요?!”
한솔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소리쳤다. 한솔은 1층에 있던 화장실 방향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솔은 목소리를 따라 좁은 잔해 속을 이동하며, 마침내 목소리가 들려온 듯 한 다른 틈새를 찾아냈다.
“화장실에 갇혔어요! 살려주세요!”
“지금 구조대원들이 잔해를 치우고 있대요! 조금만 참아 봐요!”
“그쪽은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화장실에는 혼자 계신건가요?”
목소리는 남성이었다. 한솔은 반가움에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나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어.
“여기엔 저 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1층 화장실 쪽에 생존자가 있어요! 남성이고.,,혼자 있다는 것 같아요!]
한솔은 재빠르게 X톡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곧 이어 감사하다는 답변과 함께 다른 생존자들을 발견하면 연락하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여긴 괜찮을까. 화장실과 그녀가 있는 곳 사이의 거리는 못해도 50미터 정도는 된다. 잔해로 가로막힌 곳을 뚫고나가는 미친 짓을 할 수는 없으니, 그녀는 일단 사정을 설명하고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주 미미한 진동이 느껴지는 게, 잔해가 또 한 번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는 좀 더 안전한 곳에 있을게요! 혹시 휴대폰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요! 잃어버렸어요!”
“일단 제가 구조대원과 연락하고 있으니, 있다가 다시 와서 상황을 전달해 드릴게요!”
“알았습니다!”
한솔은 다시 돌아가 조심스럽게 잔해 사이를 지나 처음 일어났던 곳으로 돌아왔다.
더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돌아다녀본 바에 의하면, 그녀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그녀가 깨어난 지점에서 좌우로 30미터 정도였다.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잔해였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한솔은 잔해에 기대어 무릎을 끌어안고 다시 슬픔에 잠겼다. 다른 생존자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의 마음을 침범하고 있었으니까.
엄마, 나 살 수 있을까?
한솔은 정말 오랬동안 보지못한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말 보고 싶어. 엄마.
* * *